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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화이야기 / 영화의 대중성 대중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글·이정하 영화평론가 (2004-02-12 14:57:56)
대중예술의 생명은 바로 대중성이다. 대중이 문제로 삼는 것, 대중의 흐름, 대중이 원하는 것, 대중과 나누고 싶은 것, 이것들이 대중성의 요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과연 이를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형상화하는가의 문제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섣불리 재단하고 함부로 업수이 여기고 무조건 추수하고 끝끝내 두려워하고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갖은 반대중적인 영화형태들이 만들어진다. “대중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김지하 시인이 지기인 하길종 감독한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나는 최근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이 화두를 곱씹어 보곤 한다. 하길종 감독은 70년대 초 UCLA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귀국했으나 그는 한국영화에 절망하고 분노하고 고뇌하고 울분만 내뱉다가 요절했다. 술잔을 든 채로 운명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때는 혹독하기 짝이 없는 유신시대였다 . 이해가 간다. 그는 진정 대중의 아름다움을 발견치 못한 감독은 아닌가 하는 <화분>이나 <수절> 같은 영화는 너무 어렵다. 검열을 의식한 탓도 있지만 에두르고 상징하고 비비 꼬여 있다. 혼돈상태의 지적 과잉이고 표현되지 못한 자의식의 덩어리, 그것이 그의 영화였다 <바보들의 행진>은 그런 결함에서 벗어나 있다. 이 영화는 70년대 대학가 젊은이들의 고뇌와 좌절을 갖은 주변적이 사건들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슬픈 현실일수록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더 슬퍼진다. 이 한편의 영화를 하길종은 남겼다. 다행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12억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 . 불과 오 년 전에 3억에서 5억 가량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비약적인 상승이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는 이 액수가 미국 영화 제작비의 5%도 안된다고 말하지만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의 평균제작비를 넘어서고 있음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한데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이 너무나 쉽사리 버림받고 잊혀지고 만다. 가장 상처받는 쪽이야 물론 만든 쪽이겠지만 이런 경우는 남의 일 같지 않게 화가 난다. 제일 화가 나는 부분은 명백히 상업적이고 흥행을 지향했던 영화들이 왜 그리 맥없이 깨졌느냐는 데 이르러서이다. 영화가 실패하면 기획, 홍보, 완성도 등의 측면에서 자체 점검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점검 목록의 중심에 대중성이 위치해 있지 않는 한 그 모든 진단은 사실 수박 겉 핥기에 불과하다. 영화가 대중예술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너무나 명백하여 쓸모가 없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아예 반대중적인 영화를 표방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의 종류를 창작층과 향수층에 따라 지배층이 향수하는 고급예술과, 민중이 창작하고 민중이 향수하는 민중예술과, 전문가가 창작하되 민중이 수용하는 대중예술로 나눈 바 있다. 노래에 이를 적용시키면 오페라 따위가 고급예술이라면 민요는 민중예술의 전형이며 대중가요는 그야말로 대중예술이 된다. 영화는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꽃 핀 대중예술의 대표적 양식이다. 이러한 대중예술의 생명은 바로 대중성이다. 대중이 문제로 삼는 것, 대중의 흐름, 대중이 원하는 것, 대중과 나누고 싶은 것, 이것들이 대중성의 요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과연 이를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형상화하는가의 문제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섣불리 재단하고 함부로 업수이 여기고 무조건 추수하고 끝끝내 두려워하고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갖은 반대중적인 영화형태들이 만들어진다. 가장 흔한 방식이 섣불리 재단하거나 함부로 업수이 여기는 방식이다. 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 대중은 이런 걸 원한다. 이렇게 하는데도 안보고 배기겠느냐. 이런 기획 심리를 말한다. 예컨대 화려하게 스타를 동원하거나 베스트셀러 원작(소설. 만화 등)을 영화하는 경우, 많이 벗고 피가 튀기고 특수효과가 나오고 하는 식의 눈요깃거리가 많은 영화가 흔히 이런 오류에 빠진다. <아마겟돈>이나 <나는 소망한다> 따위의 영화들이 이런 경우다. 무조건 추수하는 경우는 대중이 코웃음을 친다. <젊은 남자>같은 영화가 그러하다. 교모하게 이용하는 영화들은 성공한다. <투캅스> 같은 영화가 그러하다.<투캅스>가 탁월한 점은 경찰에 대한 대중의 집단적 경험(기억)을 자극하였다는 점이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그러한 원칙에 따라 선택되고 구성되어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무수한 연상을 낳으면서 관객은 자기의 기억과 접합한다. 그 효과는 웃음으로 나타난다. 웃음은 공격성의 이면이다. 한데 <투캅스>가 교묘하다는 것은 찻잔 속의 폭풍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관객이 느끼는 것은 통쾌함이다. 썩어빠진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다 그렇고 그런게 아니냐는 자조가 뒤를 잇는다. 대중예술이 사회적 안전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영화들은 친화력이 측면에서는 대중적이지만 대중의 생명력을 가두는 구실도 한다. 이게 오락이다. 한편 <은행나무 침대> 같은 영화는 대중의 잠재적이고 공연한 ‘영원한 사랑’ 대한 갈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평가할 수 없는 미덕을 갖고 있다. 대중성을 아예 무시하는 영화들도 있다. 대중이 뭐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영화가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다. 중요한 것은 창작자가 표현하고 싶은 것 뿐이다. 유럽의 작가영화, 예술영화가 한국적으로 왜곡된 형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소외를 낳는다. 대중으로부터 영화의 소외. 그러나 이러한 엘리트주의의 근저에는 대중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곧 대중을 ‘예술작품’을 상업성의 포로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복수(複數) ’, 곧 익명의 안개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양식에 대한 극도의 피해의식도 잠재되어 있다. <정글 스토리>의 경우가 그러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대중관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중을 그 내부로부터 파악하지 않는다. 영화의 전체 분위기는 바늘끝 하나 들어갈 수 없는 냉소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영화가 반드시 불특정 다수의 대중만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예언적 기능이나, 천재성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것들조차 대중과의 교감 없이는 무가치하다. 문제는 대중에 대한 태도에 있다. 대중의 눈으로 보는 것. 대중의 눈이 되는 것. 그것 없이는 참된 대중성의 눈이 되는 것. 그것 없이는 참된 대중성은 획득할 수가 없다. 동시에 대중의 내재된 생명력을 확장시켜줄 것. 이에 대한 방법론 없이는 상업성이 대중성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다면 그 방법론은 어떤 종류일까. 다양한 교감, 교섭, 교접의 형식들. 여기에 그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세상밖으로> 같은 영화는, 구조적으로 본다면 허점투성이의 영화인데, 그럼에도 성공하루 있었던 이유는 대중과 교접하는 형식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실상 영화의 완성도란 무엇이겠는가. 영화란 게 필름 속에 그 완성된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대중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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