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특집]
특집 / 문화유산의 해, 그 의미와 방향
미래의 삶을 비춰 주는 역사의 거울
문화유산의 의미
글·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12 14:41:56)
문화유산은 문화만큼이나 폭넓은 범주를 지니고 있다.
무릇 역사는 과거에 대한 평면적 기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총체로 살아있으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도 역시 남겨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80년대 뜨겁게 불붙었던 진보사학의 관심이 최근에 이르러 민중 생활사로 이전하고, 현대적인 삶의 모든 기록물들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세 가지 방향의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각 지역 문화유산을 재조명하고 알려지지 않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재현하며, 마지막으로 문화유산의 보호와 지원활동을 촉진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알고 찾고 가꾸자’는 정부의 프로그램은 문화유산에 대한 과제를 집약하고 있다.
문화유산은 문화만큼이나 폭넓은 범주를 지니고 있다. 무릇 역사는 과거에 대한 평면적 기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총체로 살아있으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도 역시 남겨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80년대 뜨겁게 불붙었던 진보사학의 관심이 최근에 이르러 민중 생활사로 이전하고, 현대적인 삶의 모든 기록물들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 이미 철거되어버린 옛 일본 총독부 건물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은 문화유산이 시대를 거슬러 현실과 얼마나 절실하게 만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문화유산은 삶의 흔적으로서 한 시대의 애환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 진솔한 기록은 한 나라와 지역의 문화적 상징이자 자존심이 된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치에 대한 인식은 한 사회의 정신적인 성숙의 지표로 평가되어 왔다.
문화유산에 대한 최근의 뜨거운 관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적극적인 개발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재부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몇 년 전부터 급격하게 각광받고 있는 ‘문화상품’의 개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문화유산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획일화된 공업도시가 강요했던 일률적인 소비의 양상이 변화하면서 도시는 문화적 가치에 의해서 이미지 화되고 있다. 공업화로 표상 되었던 근대화의 결과는 곧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획일화된 삶을 강제했지만, 궁극적인 삶의 근거는 늘 문화적 지표 속에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공업도시의 경제적 부가가치는 삶의 흔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문화도시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궁극적으로 압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품’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유산의 범위는 폭넓게 확장되고 있다. 일본이 그들의 가장 뼈아픈 역사로 남기고 있는 원폭 돔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문화유산의 목록에 집어넣은 것은 가장 극단적인 정치의 산물이 문화적 유산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측면은 물질문명이 가져온 일방적인 발전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출발했다. ‘옛것’에 대한 한층 구체화된 관심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가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 경제적 성과에 못지 않게 옛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움으로의 회귀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과학문명의 급속한 발달이 초래한 근본적인 삶의 피폐가 ‘옛사람들의 사는 방식’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문화유산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유산은 문화재의 개념을 넘어서 옛사람들이 남긴 흔적과 삶의 애환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땅과 노래와 다양한 풍물들이 모두 새로운 의미에서의 문화유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옛것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바램은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같은 놀라운 변화야말로 21세기 포스트 모던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편에서 끝없는 논쟁을 가져왔다.
이른바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시대적인
각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편에서 끝없는 논쟁을 가져왔다. 이른바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시대적인 각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개발과 보존’에 대한 전통적인 논쟁과 함께 문화유산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도 경계해야할 대목이다. 정권에 따라 최우선의 가치를 두었던 문화유산이 늘 변화해왔던 것은 그것의 정치적 성격을 반영한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정신적인 유산이 시대와 권력에 따라 늘 새롭게 평가되어 왔던 것은 문화유산이 언제나 가변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문화유산이 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고 한다면 문화유산에 대한 개념은 보다 정교하게 점검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문화유산의 해에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일지 모른다. 문화유산은 다양한 의미에서 접근된다. 그것은 국가적인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는 문화재 제도만이 아니라 의도적인 손길이 미치지 않는 많은 것들이 문화유산의 개념 위에서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화유산보다는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이 훨씬 더 많고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단기간에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걸었던 한국의 경우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이미 때늦은 감마저 있다.
특히 지방자치제 이후 각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개발사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고 있다. 민선지방정부는 보다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개발의 성과를 선호하고 그 같은 바탕 위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른바 국보급 문화재에 대한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생활문화의 유산들은 정책적인 배려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보다 근본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 이미 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는 문화재에 국한된 가시적이고 소극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생활문화의 유산들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유산이야말로 한 지역의 가장 적절한 상징이며, 한편으로 그 지역의 정신적이고 실질적인 힘이다.
결국 문화유산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화유산으로 남겨진 결과에 대한 치밀한 관심과 함께
문화유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리와 함께 문화유산의 목록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단지 애틋한 향수로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비춰주는 역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정책은 보다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역개발과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과제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유산의 문제가 온전히 정부의 정책적 관심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유산은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되어진 결과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유홍준 교수의 말은 무척 시사적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결국 문화유산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화유산으로 남겨진 결과에 대한 치밀한 관심과 함께 문화유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리와 함께 문화유산의 목록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단지 애틋한 향수로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비춰주는 역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행정적인 제한과 규제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는 문화유산은 결국은 소멸의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다. 생활 속에 남겨진 많은 것들이 전해주는 역사의 지혜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문화유산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의식의 문제이며 삶의 방식의 문제가 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가 강제하는 소비적인 생활의 규범이 초래하는 삶의 피폐 화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옛 선인들의 삶과 생활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부활하고 있는 것은 시대사조가 복고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몸과 마음에 가장 걸맞은 질서에 대한 본능적인 복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유네스코가 97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정한 것은 그 같은 시대적인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회귀의 경향에는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비용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관리에는 파괴의 비용보다 엄청나게 높은 비용이 소요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상품화된 문화유산은 그만큼 높은 비용을 요구한다. 근본적으로는 그 비용을 낮추는 것이 문화유산에 대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정책적 개입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생활과 삶의 질서에 대한 목적의식 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