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7.1 | [사람과사람]
전북의 인물, 전북의 역사① 전북 서예의 뿌리 일구어 온 치열한 작가 창암 이삼만
글·김은정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 (2004-02-12 14:40:10)
전북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고장이다. 각 분야에서 이 고장을 빛내고 나라를 세워놓은 인물은 당대를 떨쳐 살았으나 정작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찾는 일에 나서지 못한 안타까움이 크다. 거슬러 올라가면 저 백제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한국 근대사, 그리고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와 경제 교육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그 빼어난 역량이 돋보인 인물들은 연이어 배출해냈다. 그들 수많은 인물들은 더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 업적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채 시대를 잃어버렸다. 새해 기획으로 전북의 인물 사를 시작한다. 사회 각 분야에서 모름지기 정의롭게 자신의 영역을 갈고 닦아 후대들에게 훌륭한 삶과 정신을 남겨준 인물들을 조명하는 이 작업은 이미 알려진 인물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족적을 좇는 일에 중심을 실어둘 계획이다. 그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관을 배우고 이 지역의 자랑스러운 뿌리를 확인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북이 예부터 예도를 일컬어진 데에는 오랫동안 굵은 맥으로 이어져온 회화의 영향이 크다. 그 중에서도 서화는 이 지역의 예술과 문화를 대표하는 바탕이 되어 왔으며, 그 면면들 또한 널리 내놓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튼실했다. 그러나 서화의 맥을 잇고 있던 대부분의 내노라하는 당대의 대가들은 전문적인 서예가나 화가라기보다는 학자나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친, 이를테면 학문을 하는 여기로서 서화를 가깝게 하다가 그 기량의 탁월함과 원숙함으로 예술성을 인정받는 예가 대부분이었다. 1700년대 말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 서예를 아우르며 이름을 날렸던 명칠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은 전문서예가로서 그 예술성과 이름을 오롯이 간직했던 예인이다. 물론 당시의 분위기로 미루어 학문과 문장, 서예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놓여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서예의 경지를 깨치기 위한 일념으로 외길을 걸어간 창암이야말로 진정한 서예가의 변모를 갖추고 있었다해도 지나침이 없다.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명필로는 추사 김정희가 독보적이다. 그러나 창암 이삼만 또한 추사에 버금가는 명필로 인정 받을만큼 그 기량과 예술성이 빼어났다. 물론 그 활동 영역의 차별성이나 우리나라 서예에 미친 영향력은 추사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예술가로서의 치열한 정신과 사상은 그 누구에도 못지 않을맘큼 강직했으며 철저했다. 전북의 서예 맥이 그 깊은 전통과 연원에도 대표적인 서예가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 이삼만을 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암의 서예와 예술세계, 서예에 대한 연원에 대한 구체적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만큼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말년에 남겨놓은 적잖은 작품들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와 삶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독창적인 예술세계나 철저했던 서예관, 탁월한 예술적 기량에도 불구하고 고향땅에서 오로지 서예를 향항 열정만을 채우며 살았던 창암의 생애 또한 이들 작품이나 혹은 아주 일부분 구전으로 전해오는 일화들을 통해 정리된 것이다. 창암은 1770년(영조 46년) 전주 자만동 (현재의 교동)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1847년 78세로 세상을 떴다고 전해진다. 한 때 1830년 정읍현 동면 부무곡, 현재의 내장면 부전리에서 이기철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나 후에 부친의 고향인 전주로 옮아왔다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창암의 작품들 중 이전에 씌여진 것이 적지 않아 1770년 출생설이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창암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추적하는 작업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온 향토사학자 작촌(鵲村) 조병희 선생 역시 1770년에 전주에서 출생, 1847년에 작고했다는 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창암에 관한 일화는 입에서 입을 통해 오늘까지도 전한다. 병상에 누워 있을때에도 하루에 천 자의 글자를 썼다는 창암은 한평생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낼 정도로 많은 글씨를 썼으며 천 자루의 붓을 뭉그려뜨렸다고 한다. 그의 서예에 대한 자세는 철저했고 치열했다. 그를 찾는 제자들은 점찍는 법 하나만을 가지고 한 달이 넘도록 매달려야 했다고 하니 기초가 튼튼해야 함을 강조했던 그의 단호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창암은 당대의 3대 명필로 꼽힐만큼 그 독창적인 예술성이 돋보였다. 명필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벼슬길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는 고향에 파묻혀 오로지 서도의 경지를 깨치기 위한 삶에 일생을 실었다. 탐욕을 외면했으며 명리를 초월한 그는 함부로 벗을 사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속된 무리들의 근접도 꺼렸다. 창암은 오로지 글씨를 쓰는 예와 도를 향한 일념으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가 타고난 예술적 역량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서도의 세계는 당대에 이미 명필로서의 명성을 얻어내게 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자 했던 그의 사상과 삶의 방식은 당대의 또 다른 명필들의 활동영역에는 미치지 못했다. 창암이 독보적인 서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역량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지방의 한 서예가 로 남아있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창암 이삼만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 미술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해 온 조병희 선생은 창암의 예술적 기량이나 높은 경지에 오른 서도의 면모도 면모지만 그가 당대에 명칠로서 미술사에 남아야할 보다 큰 이유는 그의 정신세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창암은 서첩 등을 통해 남겨놓은 문장과 글귀에 자신의 예술세계와 사상을 긴밀하게 담아 놓았다. 창암의 방손인 이순상 씨가 소장한 유품 중에는 창암 자신이 회갑을 맞아 쓴 자서문이 전한다. 창암이 어떻게 서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또 어떤 정신으로 서도에 임해왔는지를 읽을 수 있는 내용의 이 자서전은 소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조병희 선생이 풀어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즐겨 몇 해 동안 필가들의 문에 드나들었으나 그 참 뜻을 알지 못하여 항상 탄식했다. 중년에 충청도에서 다가 우연히 진나라 사람 55인이 쓴 비단 바탕의 글씨를 얻어 당나라 때의 여러 명필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또 세 명 대가의 글씨를 밤낮으로 눈에 익히고 만번이나 써보았으나 재주가 모자란 탓인지 그 진경에 이르지 못함을 크게 개탄했다. 그러나 이제 경향간에는 어디를 가나 옛 법칙을 지키는 이가 없고 거의 과거 글씨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나같은 사람의 글씨는 도리어 쓸모 없을 것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옛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더욱 속된 글씨만 쓴다면 금석의 글씨와 큰 액자는 누가 써야하겠는가 (경인년-1830년-가을 팔월에 이삼만 쓰다)” 창암의 글씨를 향한 열정은 치열했다. 정신으로 뿐 아니라 실제 글씨를 공부하는 과정에서조차 그는 허술함을 스스로 용납치 않았다. 종이가 귀한 시절 글씨의 힘을 걷기 위해 그가 사용했다는 방법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젊었을 때부터 글씨 쓰기를 공부하여 일찍이 베를 빨아 글씨 연습을 했는데 그 베가 검어지면 빨아서 다시 썼다는 창암은 병석에서도 하루 천자의 글씨를 썼다하니 서도를 향한 철저한 자세를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그는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겨 맞았으되 초보자들이 글씨를 익히는 순서와 마음가짐에 대해서 한치도 소홀하지 않았다. 글자 오십 자를 제시, “이를 빼놓지 않고 날마다 공부하면 속되게 쓰는 사람의 글씨 열흘 배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가르쳤던 그는 서예 오체에 대해서도 이렇게 강조했다. “그러한 뒤에 해서로 필력을 얻어내어 반행을 쓰게 되는데 급히 서둘지 말고 붓이 종이를 뚫는 마음가짐으로 쓰되 원력과 골기를 바탕하여 필세에 따라 종횡으로 결구하지니 글씨가 크고 작거나 먹물이 덜가거나 더가거나 길거나 짧거나 획이 굵거나 가늘거나 간격이 착찹하거나를 마음에 두지 말아라. 이것이 바로 뜻을 얻는 운칠이라 하겠다. 그리하고 나서야 다시 변하여 초서를 쓰게 될 것이나 해서와 행서 쓰는 법과 다름이 없을 지라. 만약에서 글자로 힘을 얻지 못하면 글씨가 종이에 붙을리 없으리라”하여 해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과 자세를 가진 창암으로서는 당시 서단의 경향이 늘 안타깝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가볍게 쓰는 것을 일삼고 있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그에게는 가장 아쉬운 풍조였다. 창암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추사도 창암의 서에를 높이 평가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1840년 창암의 나이 71세, 추사가 55세였다. 추사가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로 귀영가는 길에 전주를 들어 만났다고는 하지만 이들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작촌 조병희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간찰(簡札)에는 창암을 칭송한 글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가 창암의 서예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추사가 귀양살이에서 풀려 다시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렀으나 창암은 바로 전 해에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추산은 슬픈 마음을 ‘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란 묘표문((墓表文)과 묘문에 담아 오늘에 남겨 놓았다. 창암은 결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 맞는 삶을 택하여 살았던 예술가였다. 어떻게 서예를 배웠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독학에 의한 서도의 섭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남겨놓은 적지 않은 작품들은 그의 예술세계와 사상을 읽어내게 하는데 바탕을 제공한다. 그의 정신과 사상은 서예사의 큰 맥으로 남아있게 하기에 족하지만 창암이 지녔던 그 높은 정신과 에술성에 비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도 미미하다. 이러한 상황은 정작 이 지녁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고 역사적 인물들을 바로 세우고 그들의 행적을 조명해 내는 작업에 미진한 탓이 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래들어 창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묘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하척부락(속칭 아래잣골) 낮으막한 산기슭에 놓여있다. 추사가 썼다는 묘포가 세워진 그의 묘지에는 이제 사람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얼마 전에도 세워졌다. 그리고 그 비석 뒤에는 그의 행적과 예술세계를 간추린 비문을 밝혀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당대 명칠 창암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인물을 바로 세우는 데 늘 게으른 이 지역의 척박한 문화환경은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외없이 드러난다. 그의 묘소가 있는 구이에서 평촌으로 가는 그 길목엔 창암의 묘소를 안내하는 묘지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묘소의 관리를 위한 별다른 시설도 없다. 묘소의 관리를 위한 별다른 시설도 없다. 밭고랑길을 더듬어 올라간 기슭 한편에 당대의 명칠 창암의 묘는 그의 나이 53세에 척 보인과 사별한 이후 풍류를 같이 하면서 말년을 보냈다는 심씨부인 묘와 나란히 앉아 드문드문 찾아오는 후대들을 맞고 있다. 넉넉한 살림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글씨쓰기에만 몰두했다는 그는 원래 이름은 구원(久遠)이었지만 글씨 쓰기에만 매달려 형편이 어렵게 돼 자연히 학문을 늦게 했고 벗을 사귐도 늦어졌으며 결혼 또한 늦어져 스스로 삼만(三晩)이라 이름 붙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창암의 서도를 향한 지고한 예술세계는 이제 후대들의 정당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묘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하척부락(속칭 아래잣골) 낮으막한 산기슭에 놓여있다. 추사가 썼다는 묘포가 세워진 그의 묘지에는 이제 사람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얼마 전에도 세워졌다. 그리고 그 비석 뒤에는 그의 행적과 예술세계를 간추린 비문을 밝혀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당대 명칠 창암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인물을 바로 세우는 데 늘 게으른 이 지역의 척박한 문화환경은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외없이 드러난다. 그의 묘소가 있는 구이에서 평촌으로 가는 그 길목엔 창암의 묘소를 안내하는 묘지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