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문화저널]
이정하의 영화이야기
검열, 무의식적인 책임전가의 표상
글·이정하 영화평론가
(2004-02-12 14:38:32)
검열은 왜 하나? 국가기구가 영화검열을 왜 해? 신문 검열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로 한다. 그럼 영화 검열은 왜 폐지되어야 하나. 신문검열이 철폐되어야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 국가 기구가 제도적으로 신문 검열을 하고 있는가. 하지 않는다. 그러면 영화검열은 어떻게 해야하나. 당연히 철폐되어야 한다.
이런 논리전개는 너무 유치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왜 당연하냐고?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구구단을 계속 외워야 할 형편이다. 영화검열이 철폐될 뻔했다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부터 마저 해보자. 지난 해 시월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영화검열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간 검열철폐를 외쳐오던 영화계는 흥분했다. 그러나 정부여당이나 사회일각에서는 이 판결이 시기상조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부 언론의 보도방향이었다. 검열의 철폐는 곧 외설적, 폭력적 영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신문의 사설에서는 검열 철폐를 무장공비 출연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일부 언론인의 성향과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요컨대 구구단도 모르는 치들이다. 헌재 판결의 핵심은 국가기구에 의한 사실상의 영화검열은 언론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면 ‘언론도 검열하자’고 떠들고 싶었으나, 다음 순간, 그거야말로 그런 기사를 써댔던 치들이 정말 바라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사회 일각에서 청소년에 대한 음란물과 폭력물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은 물론 근거가 있다. 그래서 영화계는 청소년 관객보호를 위해 자율적인 등급 판정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검열이 철폐되더라도 형법, 청소년 보호법 등에 의해 소프트코어 포르노조차도 상영될 수 없게 되어있다. 문제는 모든 논의를 민주주의 전제 위에서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영화진흥법과 공연법 개정안은 헌재의 판결정신, 곧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공윤을 공연문화진흥회인지 뭣인지로 바꾸어 여전히 심의를 하게 하고 등급 심사제를 도입하되 ‘등급외 등급’을 두어 그에 해당하는 영화는 상영을 못하게 하잔다. 검열철폐를 주장해온 변호사들은 이것도 명백한 위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강행하는 속뜻은 무엇일까. 위헌이라 하더라도 다음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통제할 수 있다는 누더기 같이 꾀죄죄하지만 쥐새끼처럼 영악한 발상에서가 아닐까.
지난 해 시월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영화검열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간 검열철폐를 외쳐오던 영화계는 흥분했다. 그러나 정부여당이나 사회일각에서는 이 판결이 시기상조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부 언론의 보도방향이었다. 검열의 철폐는 곧 외설적, 폭력적 영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신문의 사설에서는 검열 철폐를 무장공비 출연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일부 언론인의 성향과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주제를 바꾸어 몸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영화에 음란성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지 노출 정도로만 음란성을 따지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에 ‘성욕이나 성적 환상은 추잡하며 인간이란 고결해야 한다’는 도덕론이 개입되면 문제가 더 꼬이게 된다. 음란성이란 영화 전체의 주제, 관점, 표현방식 등으로 판단해야지 노출의 정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도 구구단에 속하는데 구구단도 모르는 축들이 너무 많다. 한 발 더 나가자면 인간은 고결하기 만한 동물은 아니다. 인류학이나 사회 생물학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동물이다. 어느 정도냐면 성 에너지로 거대한 문명을 만들고 문화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성욕과 성적 망상을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면서부터 억압이 생겨난다.
이 억압은 대체로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정치적으로는 파시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히틀러는 누드화조차 금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여기서 낮과 밤이 다른 성에 관한 이중성이 생겨난다. 이럴 때 낮과 밤은 다 심각하게 뒤틀리게 된다. 낮에는 도덕군자연하고 밤에는 세상의 아비들이 세상의 딸들을 강간하는 난륜이 난무한다. 이런 밤은 성의 해방이 아니라 몸의 쇼핑이고 또 다른 억압이고 권력을 가진 측의 폭력이고 결국은 성적 지배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세력들일수록 또는 그런 정신적 충동에 가득 차 있는 세력들일수록 낮에는 더 도덕군자가 되는 듯하다.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심층에 도사린 사상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파시즘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한편의 그림으로 보고 눈높은 이들이라면 고상한 예술로 볼 누드화를 거부한 히틀러는 대체 어떤 정신구조를 가졌었단 말인가. 에리히 프롬의 “인간파과성의 해부”는 결국은 히틀러 인격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거기서 히틀러의 인격을 ‘네크로필리아’로 규정한다. 시체애자(屍體愛者)? 하여간 죽고 썩은 것들을 사랑하는 인격, 그런 의미이다. 이것이 파시즘의 심층적 정신세계이다.
지금은 정치체제로서의 파시즘은 한물갔지만 그 정신적 사상적 감성적 유산은 이빨에 낀 치석처럼 도처에 자라나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파시즘의 태반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심하다. 이런 부류들은 살아있는 몸을 싫어한다. 그래서 배꼽티를 문제삼고 몸이 뛰놀고 몸을 부딪는 락카페도 싫어한다. 대신 모든 질서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사람 죽이는 체제다. 봄날 비온 뒤 터지는 꽃망울처럼 몸의 모든 세포가 터져 나오고 또 몸에 대해 가장 예민해지는 청소년들에게는 입시라는 족쇄를 채워버린다. 어떤 아이들은 견디다 못해 가출을 하고 비참하지만 행복한 자기들의 해방구를 만들어나간다 즉자적이지만 저항할 줄 아는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들은 차라리 자기 몸을 죽여버린다. 극단적인 절망이 자기파괴로 치달은 경우이다. 몸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란, 아이들이란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고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존재로 본다. 그래서 줄 것과 안 줄 것, 가르칠 것과 가르치지 말 것을 딱 구분한다. 단세포 생물조차도 거대한 우주와 대결하면서 살아가거니와 사람을 그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억압은 대체로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정치적으로는 파시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히틀러는 누드화조차 금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여기서 낮과 밤이 다른 성에 관한 이중성이 생겨난다. 이럴 때 낮과 밤은 다 심각하게 뒤틀리게 된다. 낮에는 도덕군자연하고 밤에는 세상의 아비들이 세상의 딸들을 강간하는 난륜이 난무한다. 이런 밤은 성의 해방이 아니라 몸의 쇼핑이고 또 다른 억압이고 권력을 가진 측의 폭력이고 결국은 성적 지배이다.
영화의 폭력성과 음란성에 대한 경계도 너무 지나치면 위험하다. 아이들이 폭력물을 보면 폭력적이 되고 음란물을 보면 성범죄를 일으킨다는 발상은 전혀 옳지 않다. 이 박한상은 무슨 미국영화 비디오를 보고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니고 지존파는 홍콩영화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았고 막가파는 <보스>가 만들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무의식적 방어심리의 발로일 뿐이다. 범죄심리학을 하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를 두고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지적한다. 왜? 간단하다.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무의식적인 책임전가다. 그리고 표적을 찾으면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나쁜 영화를 부면 나쁘게 되고 좋은 영화를 보면 좋게 된다면 왜 세상에 온갖 좋은 교육도 많이 하고 온갖 좋은 이야기를 하는 종교도 천지인데 이런 세상이 되었냐고. 이런 대답이 들려온다. 사람들이란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은 것에 더 끌린다고. 결국 성악설이다.
원래는 이 글에서 ‘영화에서 몸을 다루는 방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던 것이 위헌판결을 비웃으며 영화검열을 유지시키려는 족속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는 좀 흥분해버렸다. 다음으로 넘겨야겠다. 이왕 연재를 하게 되었으니 이 지면을 통해서는 주로 영화에 대한 그릇된 상식이나 상품화된 지식과 싸우고자 한다.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영화를 보듬고 온갖 우상 숭배를 일삼는 태도도 그러한 종류의 하나이다. 그러나 일단은 몸에서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