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문화저널]
옹기골의 '풍'자 내력
문화저널 이현배이야기(2004-02-12 14:36:47)
지금은 고인이 된 '김풍'이라 불리는 옹기공이 있었습니다. 다들 '김풍' '김풍' 해싸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관청에서 ‘김정수 귀하’라고 쓰인 우편물이 왔는데, 주인 찾아 주다가 본이름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양반말고도 ‘풍’자 들어가는 이름이 더 있는데, 심하게는 이제 막 말을 꺼내는 면전에 대고 아예 󰡒이번에 몇 미리여?󰡓하며, 또 무슨 포를 떨려고 하느냐고 하기도 한답니다. 옹기공들이 대개 ‘풍’ ‘포’ ‘뻥’이 심하다는 애기지요.
가만 보면 옹기공들에게는 뜨내기 기질이 있답니다. 아마 흙 찾아 나무 찾아 굴을 묻고 접을 차렸던 것에서부터 가을일까지 하고 옹기를 팔러 여기저기 다녔던 습관에서 온 것 같습니다. 아무데나 가서 다짜고짜 일하자고 할 수 있는 것도, 또 그렇게 일을 붙이는 것도 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답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말을 할 때 좀 부풀리게 되었나봅니다. 장가를 두 번도 가고 세 번도 갈 수 있었다 하니 다른 얘기야 오죽했겠습니까.
저희가 사는 집 오르막길에 조대가마가 있었다 합니다. 가마가 없어진 지 한 이십 년 되었다는 데 그때라면 그래도 옹기 시세가 괜찮았던 시절이라 왜 그만 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 그때 점주 노릇을 했던 양반이 집에 오셨길래 물어 봤더니 ‘옹기쟁이 하나 데리고 일하느니보다 차라리 농사꾼 열을 데리고 일하는 게 낫겠더라’하시는 거였습니다.
이런걸 보면 우리가 물건 가지고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는 게, 물건과 그 사람을 동일시 한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런저런 인격하고 상관없이 옹기는 우리나라 수천 년 도자기 역사를 유일하게 이어온 물건이고 옹기쟁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니까요. 상황에 따라 말을 좀 달리하기도 하고 부풀려 얘기한다하나 옹기쟁이야 옹기그릇 만드는 게 일이고, 그릇은 저 스스로 품격을 갖추니 말입니다.
돌아오는 봄에 그이들을 한 자리에 모셔 볼 작정입니다. 꽃피고 새 울 때, 마이산 탑사 찾아가는 길에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그 바람 풍자 항렬하고 ‘몇 미리여?’하는 포자 항렬의 옹기공들을 다시 손내로 모셔 볼 작정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마다 북조선에서 노동 1혼가 뭔가 하는 미사일 실험 발사를 한다고 주목하던데 꽃피고 새울 때는 손내마을의 손내사람들을 주목해야 할 겁니다. 굉장한 바람이, 포가, 뻥하고 문화적으로다가 위력을 발휘할테니까요. 백검 김구 선생께서 원하셨던 무한한 문화의 힘을 이제껏 하찮게 여겼던 옹기공들을 통해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