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문화저널]
신년대담
본분을 지켜 세상이치를 깨닫는다
강암 송성용 선생과 천이두 발행인의 대담
문화저널 (정리·홍나영 기자)
(2004-02-12 14:34:09)
1997년 정축년 새해를 맞아 문화저널은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을 찾아뵈었다. 문화저널 발행인으로 전북문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천이두 교수와 한국서예의 거두이신 강암 선생과의 대담은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손때가 묻어 반지르해진 쇠문고리가 달린 나무문을 ‘삐거덕’하고 열면 흙마당에 심어진 옛날 맷돌이 강암 선생의 거처로 인도한다.k 방안에는 오래된 문갑과 필묵지연이 빽빽이 차있고 묵향이 그윽이 배어있다. 천이두 발행인은 먼저 큰 절로 예를 갖추었다.
천이두: 안녕하셨습니까? 당대의 문필가이시고 이 지역의 원로이신 선생님을 뒤늦으나마 찾아뵙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문화저널이 올해로 10주년이 됩니다. 이번 신년호를 통해서 이 지역의 큰 어르신이신 선생님의 속 싶은 말씀을 후학들이 얻어들으면 큰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리라 생각되어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문은 선대부터 혁혁한 전통과 학문의 흐름이 있고 또 선생님께서 그 정점을 이루어 내셨다고 생각하는데요. 군장(君章) 어른을 비롯해서 선생님 그리고 그 아래대까지 학문과 예술분야에 혁혁한 인물이 많이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소개를 해주시지요.
강암: 나는 공부도 못허고 제대로 구실도 못허는디 과분헌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나는 성장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히 보탤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디 알아서들 들으세요. 우리 선대는 몇 대로 올라가서는 농사도 짓고 선비로도 살고 별 특별헌 거 없어요. 조부님만 혀도 문서 쓰고 정리 허는 그런 일들을 하셨던 분이여. 그게. 이 정도였지. 학문으로 크게 발전헌 거는 없어요. 조부가 참말로 성의가 대단하셨죠. 그란디 불행히도 내가 네 살 적에 돌아가셨어. 조부가 그렇게 성의 있는 양반일 수가 없었는디 조모가 과부가 되았어요. 그래도 조모가 장하신 양반이었제. 그 살림을 다 하시고 자식들 가르치고 하셨응게. 그 때 마침 그 동네에 이석정 선생이라고 있었지. 그 양반 아시는가?
철학이 종두라고 다들 그려. 아무튼 우리 조모께서 헌 말이 있어. 그런게 정성혀서 “너는 공부를 열심히 혀야 혀. 들어보니까 석정 선생님께서 훌륭하다시니 다른거 헐 것 없이 거기 다녀라.” 그려서 거기에 입학을 허게 되았지. 참마로 재주가 대단허셨제.
천이두: 그렇게 해서 선생님께서 공부를 시작하시게 되었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군부이신 군장어른께서는 대단히 훌륭하시고 재주가 출중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군장 어른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강암: 성함이 기(基)자, 면(免)자이시고 , 자(字)가 군장(君章), 호가 유제(裕濟)여. 선부는 소년 때부터 대단혔지. 그러닝게 문인들, 노인들과 상대를 허면서 호를 얻고 그때는 호가 귀헐땡게. 암무튼 그 정도로 젊을 때부터 유명허셨지. 그때부터 문장과 명필을 모두 다 성취허셨다고혀도 과언이 아닐것이고만.
천이두: 군장 어른에 대해서는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김제 백산에 나시고 서도에 능하셨지요. 군장 어른께서는 어떤 어른께 사사 받으셨는지요.
성함이 기(基)자, 면(免)자이시고 , 자(字)가 군장(君章), 호가 유제(裕濟)여. 선부는 소년 때부터 대단혔지. 그러닝게 문인들, 노인들과 상대를 허면서 호를 얻고 그때는 호가 귀헐땡게. 아무튼 그 정도로 젊을때부터 유명허셨지. 그때부터 문장과 명ㅊ필을 모두 다 성취허셨다고혀도 과언이 아닐것이고만.
강암: 석정 선생으로부터 받았어요. 최승범 선생이나 이강오 선생, 다들 그 선생으로부터 배웠제. 석정 양반은 어떤 양반인고 허니 재주가 출중한 양반이었어. 근디 참 가난혔어. 그려서 먹고살려니까 부잣집을 많이 돌아다녔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시계가 고장나니까 그걸 다 뜯어서 고친 양반이지. 글씨, 그림은 말헐 것도 없고 의학, 이기학, 점술 등 못허는 게 없었지. 근디 선생이 그러고 지낸게 사람들이 선생께 돌아다니시지 말고 선비가 그렇게 다니면 못쓴다고 먹을 것이랑 다 드릴테니 걱정 말고 글이나 쓰고 공부허라고 그렸제. 약방도 시작허고 그렸는디 그러다가 돌아가셨지.
천이두: 선고장 어른께서는 석정 선생님 문하에서 수학하셨군요. 간재 선생님으로부터도 배우셨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참으로 재주도 탁월하시고 무든 분양에 능하신 양반이셨지요. 그러다가 선고장 어른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강암: 74살에 돌아가셨지. 1882년에 나셔서 1966년까지 사셨어요.
천이두: 그렇다면 강암 선생님께서는 어떤 분에게 공부를 배우셨는지요. 한학은 주로 간재 선생님께 배우셨나요?
강암: 주로 석정 선생한티 배웠제. 서예도 그렇고. 그러다 석정 선생이 돌아가시고 간재 선생에게도 배웠지. 간재 선생은 그 당시 전국적으로 백두산부터 제주 한라산까지 제자들이 3천명이 된다고들 혔어. 그 선생헌티서도 많은 걸 배웠지.
천이두: 선생님과 군장 어른 모두 석정 선생과 간재 선생에게 사사 하셨군요. 선생님께서는 본래부터 서도에 관심이 많으시고 능하셨는지. 어떻게 해서 서도에 입문하시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강암: 내가 삼형젠디 그 중 막내여. 우리 형님도 재주가 많았어.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불행히도 40대에 돌아가셨어. 폐병으로. 그 땐 폐병이란 말도 없었고, 약도 없었지. 그 병에 걸리면 그냥 보약이나 해먹고 그랬응게. 결국 그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았어. 나두 걸렸었지. 내가 15살에 결혼을 혔는디 그 전부터 병에 걸렸었어. 내가 그땀시 공부를 못혔지. 폐병이란 게 생각을 못허게 해.
천이두: 옛날에는 허손이라고도 했죠. 권태감이 오고 빨리 피곤하고 그랬죠.
강암: 암먼. 저녁에 공부를 허면 그 다음에 다 잊어 먹어. 생각을 할려면 열이 나고 그려서 공부를 못혔지. 내가 남도로 사방간디 돌아다닌 것도 바로 그거여. 사람들이 날 밖으로 내보낼려고들 그렸지. 속도 모르고 말여. 그러다 보니 글씨랑 그림도 보고 배우게 된것여. 내가 머 공부를 혀서 문집을 낼것여 뭐여. 글씨나 써야제. 한창 공부헐 나인디 내가 그렇게 생겨갔고 공부는 무슨 공부여. 어쨌든 그렇게 헌 것이 시방 오늘의 내가 된것여.
서예라고 하는 게 옛날 선비들이 기본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옛날 선비란 술도 잘 하고 풍류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데 요즘은 컴퓨터라는 게 나와서 두드리기만 하면 글씨를 쓰니 말입니다. 그러니 서예란 게 전시대의 문화, 뒤떨어진 문화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시대변화 속에서 서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게십니까?
천이두: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책을 공부하기보다는 서예로 정전할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이시지요. 오히려 저희들로서는 잘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선생님과 같이 훌륭하신 서예가를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강암: 서예란 눈으로 보고 손으로 허는것인게. 내가 그 병에 걸려있어도 공부보담은 훨씬 나았지.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여 다들.
천이두: 서예라고 하는 게 옛날 선비들이 기본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옛날 선비란 술도 잘 하고 풍류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데 요즘은 컴퓨터라는 게 나와서 두드리기만 하면 하면 글씨를 쓰니 말입니다. 그러니 서예란 게 전시대의 문화, 뒤떨어진 문화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시대변화 속에서 서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게십니까?
강암: 그거 참 대답 허기 힘든 질문이고만요. 글씨란 게 선비정신을 가지고 써야 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차차 달라지더고만요. 경쟁이란 게 붙어서. 그전에는 농사 짓고 밥먹고 순박허게 살았는디 요즘은 돈으로 교환허는 시대가 되고 물질문명이 들어서서 돈만 바라보니께. 나도 서예 허는 사람이지만 요상스럽게 서예가 요즘 이상해져. 전남회 허는 게 그게 뭐시냐, 그려 경력, 경력으로 친다 이거여. 글고 돈이 왔다 갔다 허는 사회가 되았어. 나는 돈 받고 혀. 나도 물들었지. 내가 주장하는 것은 글씨를 쓰는 게 중요시되야는디 완전히 상품화가 되버렸어. 돈 많이 받고 많이 팔아먹는 사람이 일등이 되았다 이거여. 지금 내가 볼 때 글씨가 벌써 좋은 글씨가 안 들어와. 나도 깜냥에 내 작품을 관리해야 혀서 돈을 높혀 놓았어. 좋은 글씨를 위해서라도 그게 낫다고 생각혔제. 그러나 저러나 글씨 쓰는 사람 좀 살려야 헐 것 아녀?
천이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작품을 만들고 돈으로 작품이 평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선생님의 작품값을 올려놓으셨다구요. 일리가 있으시네요. 현재 젊은 세대들이 이끌어 가고 있는 우리나라 서예가 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 또 전북의 흐름은 어떤지 말씀 좀 해주세요.
강암: 내가 꼭 허고 싶은 말이 있지. 서도를 양성시키자 허는 것인디 양은 많이 늘었지. 전주 시내만 혀도 서실도 많고 서예 배우고 허는 사람도 많응게로. 근디 양에 비해서 질이 툭 떨어졌어. 씨앗도 많이 뿌리면 잘게 난다고 혔는디. 서예대학도 생겼지만 공부가 뭣인고 허니 입특선허는 것이 되야 버렸어. 경력이 최곤줄 알지.
천이두: 양산이 되는 것이 염려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작품들이 제대로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다 돈으로 평가되고 돈이 왔다갔다하는 세상이 되었지요. 서예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가 다 그렇습니다.
강암: 세상이 다 그렇다니까. 댕겨보면서 심사위원도 허고 다 혀봤는디 내가 서울 가서 호텔을 갔는디 전화가 왔더구먼. 심사위원들 해달라고 혀서 그러자고 혔는디. 심사 때 돈 문제가 있었던 걸 생각 허면 속상허고 괘씸허다니까. 어디 이려서 되겄냔 말이여. 앞이 캄캄혀.
작품들이 제대로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다 돈으로 평가되고 돈이 왔다갔다하는 세상이 되었지요. 서예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가 다 그렇습니다.
천이두: 서예란 게 넓은 의미로는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그리고 아드님도 두 분이나 도청에서 역학을 맡고 계시기도 하는데요. 문화의 큰 어르신으로서 부실 때 전북의 문화정책이 잘 되고 있는지 정부나 관에 제안을 해주신다면은요.
강암: 그건 말하기 곤란해요. 말해 봤자 그렇게 허지 말라는 소리인디 전문가들이 다 잘 허겠지. 제자헌티는 가르치면서 그 때마다 조금씩 말은 혀도 내가 무슨 말을 허겄어. 그거 말고 내가 허고 싶은 말은 현대서예라는 것 말여. 이름을 고쳤으면 혀. 서예라는 말을 빼야 혀. 아 어떤 사람은 서양화처럼 모양을 내고 색깔을 칠하고 나서 서예라고 허는디 그것이 어떻게 서예가 되는지 이해가 안가. 후세에게 알아보게 내 놓아야 허는 게 글씨 아녀? 아 그런 거 갔다 어디다 써. 전람회 허는디만 쓸거 아니겄어?
천이두: 서예의 현대화를 모색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만, 어떻게 하든 선생님 눈에 차시겠습니까 강암 서예관도 작년 7월에 개관하시고 재단도 만드시고 또 논문집도 계간으로 발간하시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하시는데 어떤 정신을 가지고 하시는지요.
강암: 서예란 게 구경만허고 끝낼게 아니라 이론도 공부 좀 허고, 또 전주가 서예의 도시라고 허는디 그런게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혔지. 홍익대 송수남 교수가 와서 전주 참 이상허더라고 혀. 서예의 도시라도 허는디 아무것도 없다고 말여. 내가 모아 놓은 돈이 적어서 시(市)에다가 말을 혔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디 있는 돈 다 털어서 헐팅게로 터만 좀 내놓으라고. 다들 좋다고 허더구먼. 그려서 시작혔는디, 아 처음에는 지금 도립국악원 옆에 터를 잡았어. 아마 300평 정도 되는딘디 한옥으로 지을랑게 좀 좁더만. 어쨌든 다 준비가 되야서 방송이랑 신문이랑 다 내고 혔는디 갑자기 시에서 자기네들까장 같이 허자고 허네. 전북미술관인가, 뭐시냐 향토미술관인가 혀서 같이 허는 걸로 허자고. 그려서 ‘나는 못 허겄다. 정 그렇다면 당신네들끼리 또 하나 지어라. 전주에 그런게 많이 있으면 좋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지금 있는 이 옷 교동에다 강암 서예관을 지었어. 내가 좀 서운헌게 있지. 누가 좀 뭐를 헐려고 그러면 도와 줘야 허는 건디 말여. 아 그러든 못허고 자꾸 방해나 시비를 놓으니까 말여. 나를 위혀서 허는 것도 아니고 시를 위허고 사람들을 위혀서 허겄다는디.
내가 허고 싶은 말은 현대서예라는 것 말여. 이름을 고쳤으면 혀. 서예라는 말을 빼야 혀. 아 어떤 사람은 서양화처럼 모양을 내고 색깔을 칠하고 나서 서예라고 허는디 그것이 어떻게 서예가 되는지 이해가 안가. 후세에게 알아보게 내 놓아야 허는 게 글씨 아녀? 아 그런 거 갔다 어디다 써. 전람회 허는디만 쓸거 아니겄어?
천이두: 그랬군요. 그래서 그렇게 터덕거린 게 그것 때문이었군요. 참 선생님. ‘호남 제일성’ 글씨가 이삼만 선생님이 쓰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관찰사가 썼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전주를 소개하기를 선생님께서 ‘호남 제일성’이 전주 양쪽에 있고 그 안에 전주가 있다고 했거든요.
강암: 아 맞아요. 그 안에 있는 글씨는 삼만 선생 글씨 같기도 헌디 ‘호남제일성’ 글씨는 뭐시냐 내가 이름을 잊었는데 그 때 관찰사가 썼다고 허더구만요. 그러나 저러나 내가 가장 서운헌 것이 있는디. 남도 부산이나 강원도 멀리서까지 다들 큰 차를 타고 이곳을 들러. 전주허면 그려도 서예를 떠올리고들 말여. 그런디 오히려 가까이에 사는 전주 사람이 안 와. 중고등학생들만 단체로 오긴 했어. 어디 그러믄 쓰겄냐 이말여. 모다들 말만 서예의 도시고 글씨가 살아 있는 도시라고 허지, 뭐 하나 특별허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것 같여.
천이두: 예향이라고 불려도, 서예의 도시라고 불려도 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문화 의식이 아직도 여전한 것 같아요. 선생님, 지금까지 80여년을 살아오시면서 선생님만의 생각이나 기준이 있으시다면 그게 무엇인가요.
강암: 세상 태어나서 못 헐일 안 허고, 죄 안 짓고 사는게 내 목적여. 사람이란 게 부나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들 있기 마련여. 근디 그것도 사람마다 깜냥에 타고나야 헌다 이거여. 우리 선부께서 말씀허시길 다들 학문을 허고 조신허게 살아라 이거여. 시기허지 말고 남 따라 갈려고 허지 말고 지 할 일 허면서 살라고 말여.
천이두: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선생님과 같은 훌륭하시고 덕망 높으신 분이 계시게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후배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다면 해주세요.
강암: 뭐 별 헐 말은 없는디, 한 마디 헌다면 말여. 내가 제자헌티 바른 말을 혀도 그것이 바르게 들어가지 않을 때가 있어. 경쟁 가회에서 먹고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허는디 내가 그렸어. ‘꼭 그렇게 살아야만 먹고 사냐?’ 모든게 돈으로만 해결되는 게 아녀. 세상에는 다 이치가 있는 법인게 말여.
천이두: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후학들에게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사코 나오시지 말라고 말려도 대문 앞까지 배웅을 하신다. 늙으면 늙을수록 걸음도 걷고 바깥 공기도 쐬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지팡이 짚고 허연 수염에 상투를 꼽고 탕건을 쓰신 강암 선생님은 진정 이 시대의 어른으로 거기 그렇게 서 계셨다.
(정리·홍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