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문화칼럼]
문화의 주춧돌을 추스릴 문화일꾼의 양성
글·이종철 국립전주박물관장
(2004-02-12 14:30:33)
오랜만에 찾아온 향토에의 귀소(歸巢)는 설레이는 흥분과 이색지대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 기대 섞인 행복함의 첫 발이었고, 96년 한 해는 시작도 끝도 없이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문화보존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둔한 머리와 병들어 버림 육신을 이끌고 발버둥친 고난의 수업시대였다.
예도(藝道) 예향(藝鄕)의 본거지인 전북의 역사적 실체를 찾아 해가 저물고 날이 밝을 때까지 연구실 구석주석을 찾았지만 그 풍부한 역사와 예술의 광맥을 시간 속에서 공간 속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탐구력이 부족하였나 아니면 발로 뛰어 만든 문화유적 지표조사나 도·시·군 사료지, 변변한 문화시설 하나 없는 현실이 예향이라는 말을 공염불 같은 허구로 만들었는지는 풀지 못할 담론으로 남아 있다.
이글거리는 야망의 눈빛 속에 포착된 97년은 전주박물관 앞 몰문화지대의 3000평이 1차로 문화시설 지구가 되는 해이다. 지난 해 섣달에는 결론 없는 지루한 소모논쟁만 벌렸던 전북문화예술회관 신축부지가 확정되어 아랫녘 전남 광주보다 6년 늦게나마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마저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한편 전북도는 미래산업의 총아로 각광받을 문화적인 관광을 연구·혁신·진흥시키려는 투철한 의지로 문화관광국과 문화예술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켜 우리의 기대를 부풀게 한다.
97년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늦은 봄에는 익산 미륵사지 전시관이 속가슴을 연다. 문화시군의 활기찬 기치를 내건 김제, 익산, 남원 시·군등이 조직한 지방 문화시설들이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생활문화를 꽃피울 것을 기대하니 어깨가 절로 힘이 생기고 뿌듯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다.
문화 일꾼이 없는 문화공장
그러나 이처럼 꽃보라 같은 환희 속에서 절망의 늪처럼 빠져드는 자괴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문화공간망의 거시적 기획가, 연구하며 추진하는 소신있는 행정가, 종합적인 내용이 담길 문화집일 지어낼 능력 있는 건축가, 전지 설계가, 공연기획 전문가, 발벗고 앞장 서 행동하는 예술인·지성인, 지역언론에서 길러 낸 문화예술 전문 언론인·방송인이 지금 이 시점에서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10년 후에는 잠재적 문화(재) 전문인력이 나타날 개연성(가능성)이 있을까. 아무리 전통 농업사회의 미풍양속을 지닌 전북이어서 이웃끼리 오손도손 사는 끼리끼리 인정이라지만 전문가 장인이 있어야 할 자리(직위: 기관장)에 학, 혈, 지, 재, 선연(學, 血, 地, 財, 選緣)이 능력과 실적에 우선하여 채용된 후 적당히 즐기는 자리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전문교육과 특수 보편적 지식을 훈련받은 검증되고 존경받는 인사, 성실성과 책임감 소명 의식으로 다져진 병아리들이 근무하여야 할 전문기관에 과연 꼭 있어야 할 훈련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외과병원 수술실에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무라이식 킥복싱 선수를 넣어 얼굴과 정강이를 찰 때 다친 머리와 발은 영원히 부러지고 만다. 소생이 5년동안 (82~86년) 몸담았던 전남 광주의 문화기관들은 이처럼 엽관운동을 벌려 자의적(恣意的)으로 행한 전문기관 인사배치가 10%를 넘지 않는다.
못된 송아지 같은 관의 횡포, 이를 공론화시켜 시정하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불평하거나 끼리끼리 모여서 험담하는 파우어 엘리트들, 인재를 자맥질하여 발굴해 내고 길러 내어야 할 대학 연구실이 동면과 휴면하고 있는 곳, 사회의 목탁으로서 책임과 자활을 외면한 채 거대한 공룡이 되어 멸종의 길을 가는 작태, 쓰레기 서울 지방 언론문화의 소비계층이 되어 버린 일반시민들이 아전시대에 길들여진 행태 속에서 안주하며 사는 곳이 예향의 현주소라면 지나친 말일까?
새시대 문화군웅(文化群雄)들의 혁신을 기대하며
사회계층의 전문 분화가 더디어 전문가나 장인정신 없이 대충대충 해치우는 곳, 귀신 씨나락 까먹듯 패어진 레코드판처럼 10년 동안 명색뿐인 자리를 지키며 희생의 행동 대신 허구뿐인 대표를 즐기는 유령의 도시, 원로(元老)와 지사(志士), 장로(長老)가 실종된 실향문화 지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전북도민은 그래도 세계 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의 심장이 전북이라고 자부해 왔다. 이제 용담댐 건설, 전주 3공단, 새만금지구, 군장 신항만과 다른 차원의 새로운 의미의 지역발전의 틀을 마련하여야 한다.
전북도민의 자긍심을 매개할 예향의 재발견을 위하여 슈퍼컴보다 더 위력을 가진 새시대 문화 군웅(群雄)들의 문화를 혁신해서 갈팡질팡하며 한치 못 보는 일부 믿을 수 없는 월급쟁이 관료들을 일깨워야 한다.
97년은 문화유산의 신기원을 이룰 중요한 터전이 마련되는 기폭년이 될 것이다. 이제는 국가·지방 정부의 문화정책을 지원 협력하고 성원하며 감시한 문화적 구심체인 '문화 정의 실천 추진회'가 자생적으로 뿌리 내리도록 문화일꾼이 터파기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