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 | [세대횡단 문화읽기]
노동은의 근대음악사
반외세 민족자주의 민중가사
1860년대 음악사 전개(2)
글·노동은 목원대교수·한국음악학과
(2004-02-12 14:27:35)
조선의 모든 사람들은 서교·서학이 민족문화를 해체시키는 ‘서양’ 그 자체로 여겼고 1860년 동학(東學)의 창도는 이 같은 민족적 정서와 무관하지 않았다.
안으로 봉건체제를 마감하고 밖으로 서교·서학 등 외세를 대응하여 새로운 상원갑 시대를 맞이하려는 동학은 기층민중들을 중심으로 그 교세가 불길처럼 번져갔다.
1860년대부터 안으로는 봉건적 수탈에 대한 농민항쟁으로 대응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탈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근대음악사의 주요 과제였다. 이 시기는 봉건 사회 모순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시기이자, 서구와 일본이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로서 조선의 영토를 식민지화하려는 시기와 맞물려 가는 시기였다.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이자 민족위기의 시대였다. 이를 대응하려는 움직임은 모든 계층에 나타나고 있었는데, 기층민중들 중심인 동학(東學)의 노래가 그것이다. 또 중인 출신인 신재효의 단가(短歌)와 양반 출신인 홍순학의 노래도 그러했고 민중예술인들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시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음악도 자주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민족의 노래와 춤, 「탈 노래」와「칼 춤」
누구나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위기’로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한편 종교에서 안식처를 찾으려 한다. 서양신부들이 ‘조선 땅 끝까지 기독교를 복음화’ 하기 위하여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천주교 교세가 확대되었다. 봉건 사회를 개혁하고 격변의 시대를 대응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천주교가 구원처로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누구나 천주교를 서교(西敎)라는 종교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서양문화의 총체로 꽃핀 서학(西學)으로 간주하였다. 더욱이 서교보다 서학이 조선후기에 먼저 들어왔으므로 서교가 자연스럽게 번져갔다.
그러나 이 시기 서양제국주의의 팽창에는 서교와 서학의 뒷받침이 있었고 또 서교는 조선의 제사문화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있었다. 자연히 주선의 모든 사람들은 서교·서학이 민족문화를 해체시키는 ‘서양’ 그 자체로는 여겼고 1860년 동학(東學)의 창도는 이 같은 민족적 정서와 무관하지 않았다. 안으로 봉건체제를 마감하고 밖으로 서교·서학 등 외세를 대응하여 새로운 상원갑 시대를 맞이하려는 동학은 기층민중들을 중심으로 그 교세가 불길처럼 번져갔다. 동학의 불길 중심에는 이들의 신앙가사인 동학가사가 있었다. 그 동학가사는 언제나 노래와 춤이 동반되었다. 「칼 노래」와 「칼춤」은 물론 「용담가」,「안심가」,「교훈가」,「도수가」,「몽중노소문답가」등이 1861년에 나왔고, 「흥비가」,「도덕가」등이 1863년에 나왔다. 「칼노래」는 이후 「시검가」(恃劍歌)나 「격흥가」라는 이름으로 전라도에서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불리워졌는데 반봉건과 반제를 드러낸 노래와 춤이었다.
두 번 다시 못 올 때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동학으로 일어서자라고 노래부르면서 장쾌하게 춤을 추었으니 그것이 「칼노래」이자 「칼춤」이었다. 춤의 형태는 달랐을지라도 ‘칼추’은 ‘검무’(劍舞)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춤이었으며, 그 춤을 추면서 “시호 시호 이내 시호”라는 노래로 혈맥을 뛰게 하였으니 해방성이 번뜩이는 노래이자 춤이었다.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노래가 그렇듯이 그 지역의 음재료에다가 ‘즉흥적으로 얹혀부르기’를 하였으므로 「칼노래」는 지역마다 그 노래가락이 달랐다. 위 악보는 흔히 경토리라고도 하고 경기도 창부타령조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노래를 부른 사람(한창화, 1927년생) 역시 경기도 태생이다. 즉 가사는 전국이 같았어도 노래가락은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불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은 이 노래를 ‘반체제 노래로서 혁명가’로 판단하고 있었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1821-1864)를 1864년에 처형시킬 때에도 그 죄목에 “칼춤을 추며 흉한 노래를 불러 퍼뜨리고 태평한 세상에서 난리를 도모하고자 은밀히 도당을 모은다” (일성록, 1864년 2월 29일조)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최제우가 처형되었다고 이 노래와 춤이 처단된 것은 아니다. .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면서’ 「칼노래」등의 노래를 도처에서 불렀다.
민족의 노래, 단가와 유교가사
반외세 성격으로 민족의 자주성을 노래한 것은 동학뿐만이 아니었다. 전 계층이 함께 하였다. 중인출신의 판소리 개작으로 유명한 신재효(1812-1884)조차 단가「괘심하다 서양되놈」을 내놓았다. 1866년 정족산성에서 조선과 프랑스가 맞서서 치른 전쟁(병인양요) 직후 서양제국주의의 정체를 ‘천주학’으로 파악하고 이를 비판하는 단가를 불렀
괘심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나라나 할것이지
단군기자 동방국의 충효윤리 받았는데
어히감히 여어보자 홍병가해 나왔다가
방수성 불에타고 정족산성 총에죽고
남은목숨 도생하자 바삐바삐 도망한다
19세기 60년대부터 전국의 남녀 판소리 명창이 2백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판소리 장르가 최고 융성기에 도달하고 있었으니, 신재효측 가객을 중심으로 이 단가가 불리워졌다. 이 시기 판소리는 전 민족의 음악예술로 자리잡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전라감사를 통하여 전주 단오절과 동짓날 판소리 명창대회를 전주감영에서 주최케하여 장원한 명창을 상경케하고, 이를 ‘전주통인청 대사습’으로 승격시켜 명창들의 꿈이 제전으로 삼았던 것이나, 또 1867년부터 신재효가 상류층의 정서에 맞게 판소리를 개작하거나 1868년 경복궁 낙성연 기념공연 당시 진태선과 허금파 등 여류명창을 출연시킬 정도가 되었고, 또 판소리 하나로 국가에서 벼슬을 받아내 천민에서 계급상승을 이룰 정도여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기이고 보면 이 때는 또 다른 판소리 전성시대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1866년 청나라 북경을 다녀온 홍순학 (1842~1892)도 「연행가」(燕行歌)를 내놓아 서양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양귀자놈 통분코나
처처의 천주당과 사해편만 하였다며
눈깔은 움푹하고 코마루는 우뚝하며
키꼴은 팔척장신 의복도 고이하다
양귀자(洋鬼子)와 천주당은 홍순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서양제국주의의 산물로서 민족문화를 해체시키는 서양문화로 보고 이를 경계라고 있었다. 1876년 전라도 장흥 선비인 이중전(1825~1893)이 지은 「장한가」(長恨歌) 역시 “왜화(倭和)를 자파하며 양로(洋路)를 거세하며 사방에 일이 없이 보국주신 아니될까”라며 일본과 서양을 막아내어 위기를 극복하자는 유교가사를 지었으니, 이러한 유생들의 가사는 도처에서 지어졌다. 물론 가사는 가사로 암기하지 않고 언제나 노래에 얹혀 즉흥적으로 불린 역사적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새로운 역사평가와 서양음악수용
오랫동안 음악사를 주도한 기층민중들은 왕권중심의 역사평가에서 제외되어 왔었으나, 1860년대에는 이들이 새로운 역사대상이 되었다. 이미 1844년 조희룡의 『호산외기』에서 시골마을(이항)에서 ‘시들어 썩어 없어지는 시·서·화·가객’등을 새로운 서술대상으로 삼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1862년 적하시사 출신인 시인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이나 1866년 역시 적하시사 동인인 이경민의 『희조질사』등에서 기층민중들 출신의 거문고 명인 김억, 생황의 명인 임희지, 가곡의 명인 장우벽, 거문고의 명인 김영면과 김성기 등을 역사 대상으로 삼고 이를 기록하였다.
한 편 1631년부터 서양음악문화를 소개한 바 있었지만 홍대용·이규경·서유구·최한기 등의 개신악 학자들은 서양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조선의 음양(陰陽)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서양음악총론과 관련한 이론과 양금(洋琴)을 들여와 율방 음악으로 정착시켰으며, 뮤지컬 박스인 자명금(自鳴禁)이나 바이블 오르간 등이 들어와 서양음악을 소통시키고 있었다. 이 밖에도 최양업(토머스)신부가 1849년에 귀국하여 1861년 선종할 때까지 천주교 신앙가사인 각 종 천주가사를 조선민요에 얹혀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 방식을 보급한 것도 토착화의 전형을 보여준 예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세계음악사적 관점에서 조선음악의 보편적이고도 자주적인 입장으로 그 세계관을 확립한 최한기(1803~1877)의 음악기학(音樂氣學)이야말로 이 시기 우뚝 솟은 한국 음악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