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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 | [문화비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기지촌 지식인들의 글쓰기
강준만(2004-02-12 14:25:42)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하고 통쾌한 책을 하나 읽었다. 전주 한일신학대 김영민 교수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다. 그는 이 책에서 이른바 ‘학문’을 한다는 교수들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아니 ‘날카롭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김 교수가 주로 지적하는 문제는 논문 중심주의, 원전 중심주의, 자신을 숨기는 글쓰기 등 세 가지다. 이 세 가지 글쓰기 방식은 학계에선 신성불가침의 신앙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건 학문을 하겠다고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아니 이미 학부 시절부터 ‘자연의 법칙’처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문중심주의란 무엇인가? 김 교수의 정의에 따르자면, “논문이라는 글쓰기 형식 속에만 최량 최고의 진리를 담을 수 있다고 믿는 허위의식과 이를 부추기며 뒷받침하는 문화 조건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건 “논문만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글쓰기이며, 오직 논문을 통해서만 학문성이 보장된다는 지적 허위의식”이다. 논문이란 무엇인가? 그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형태의 글쓰기”다. 그건 ‘형식성의 체계’인 바, 논문중심주의는 ‘형식 숭배주의’인 것이다. 형식을 숭배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형식 숭배 이외에 다른 길이 전혀 열려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게 논문이야? 잡문이지!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글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문제삼아 하는 소리다. 김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논물중심주의의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학자들은 논문을 글쓰기의 유일무이한 원형으로 보고, 특히 시적 표현이나 이야기식의 즉물적인 묘사에 타성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김 교수는 “논문이 학계의 글쓰기 시장에서 공정거래법을 어기고 독과점을 자행해 왔으며, 급기야 문약한 여러 학인들의 머리 위에 강박으로 군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한다. 그는 “표현의 자유는 그 내용에만 국한되고 있을 뿐, 표현의 형식에 관한 한 실질적으로 자유가 없는 실정”임을 지적하면서 “매체(형식)의 자유가 없으면 결국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논문이라는 놈이 학문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을 지배해 왔는가? 김교수는 “논문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이야말로 줏대 없이 학문을 해 온 이 땅의 지식인들을 묶어두는 가장 원형적인 차꼬”라고 말한다. “내 생각을 담아 내는 논문이라는 그릇은 서구 정신문화의 정화로서 수입된 상품이며, 이 땅이 서구 문화의 중계상 노릇을 멈추지 않는 한 그 상품은 학계라는 시장을 계속 독식하게 될 것이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그건 논문의 밥이다. 논문은 학원의 부분이 아니라 학문의 전부가 되었고 학문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학문은 논문에게 바치는 연중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논문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하나의’방식이 아니라 학자로 행세하려는 자라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하나뿐인’ 방식”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게 논문이야? 잡문이지!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글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문제삼아 하는 소리다. 김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논물중심주의의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학자들은 논물을 글쓰기의 유일무이한 원형으로 보고, 특히 시적 표현이나 이야기식의 즉물적인 묘사에 타성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김 교수는 “논문의 불행은 복잡한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의 경직된 스타일 속에 담을 수 있다는 독선적 태도에서 연유한다”며, “‘지금 이 땅에서’ 학문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땅의 특수성과 이 시대의 보편성을 아울러 살릴 수 있는 글쓰기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촉구한다. 교수들은 남의 논문을 잘 읽지 않는다. 자신이 논문을 쓸 때에 자신의 주제와 관련된 논문들을 챙겨 놓고 그때서야 읽을 뿐이다. 모두 다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그런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 논문은 ‘재래식 변소’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도 알고 남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소리에 형식의 갑옷을 입힌 그 허위의식의 덩어리를 무슨 재미로 읽는단 말인가?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논문을 쓸 때마다 비굴감 비슷한 것을 느껴 본 사람은 없을까? 특히 학원 논문의 경우에 더욱 그렇지 않았던가? 김 교수는 “형식성을 빌려 권위를 세우는 심사, 그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서 논문이라는 형식성과 공모해야만 하는 학생들의 허위의식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 땅에서 시행되는 논문쓰기라는 형식은 학자의 문턱에 서성이고 있는 학생들을 지배하기 위한 기존 학자들의 통제 장치로 전락한 느낌이 들 정도”라며 “논문은 누구나 인상을 찌푸리면서 통과 의례를 치르지만 일단 통과하기만 하면 못 본 체하는 재래식 변소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김 교수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교수들은 남의 논문을 잘 읽지 않는다. 자신이 논문을 쓸 때에 자신의 주제와 관련된 논문들을 챙겨 놓고 그때서야 읽을 뿐이다. 모두 다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그런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 논문은 ‘재래식 변소’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도 알고 남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소리에 형식의 갑옷을 입힌 그 허위의식의 덩어리를 무슨 재미로 읽는단 말인가? 논문중심주의의 하위 개념으로 원전중심주의를 들 수 있다. 김 교수는 원전중심주의를 “소위 몇몇의 원전들을 논의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 삼는 논문류의 글쓰기와 그 심리”라고 정의하면서 “원전중심주의의 글쓰기 풍토와 직접 연관되는 학인들의 정신적 악덕은 일종의 포장 심리나 광고 심리에 비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장 심리나 광고 심리는 남을 의식하는 심리다. 김 교수는 “논문이란 눈치 보는 글쓰기의 전형이며, EH한 글쓰기에서 눈치 보기의 전형이 바로 원전중심주의”라고 말한다. 눈치는 주로 상향적이다. 윗 것들이 아랫것들의 눈치를 보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주로 아랫 것들이 윗 것들의 눈치를 본다. 그렇지 않은가? 김 교수는 이 위계질서와 관련하여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벌써 지면이 다 됐다. 다음 번에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김 교수의 주장과 함께 저널리즘에 있어서의 글쓰기와 관련된 나의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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