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저널]
영화 속의 인권, 인권 속의 영화
제1회 인권영화제 전국 순회상영
글·김태호 문화저널 기자
(2004-02-12 14:21:30)
제1회 인권영화제 전국 순회상영
우리 나라 최초의 인권영화제
인권의 사각지대를 파헤치고 고발하는 영화들이 전국에서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다. 인권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을 선정, 전국 10개 도시에서 공동으로 제1회 인권영화제가 개최된 것이다.
서울지역에 이어 열리고 있는 이번 인권영화제의 전주행사는, 제1회 인권영화제 집행위원회 (이영호 집행위원장) 와 전북대학교 총학생회 주최로 12월 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전북대학교 합동강당에서 진행되었다.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인권을 주제로 다룬 영화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일이다.
이번 인권영화제는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 과 이화여대 총학생회의 주관으로 지난 11월 2일부터 8일까지 이화여대 법정대 강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막을 올린 이 영화제는 각지역의 적극적인 호응을 바탕으로 한 달 만에 전국적인 규모로 열리게 된 것이다. 행사자체가 인권운동의 일환인 제1회 인권영화제는, 전주를 비롯해 전국 17개 도시에서 무료공개 되었으며,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당국의 사전심의를 인권의 이름으로 거부했다.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가 이미 위헌이라고 결정되었지만 우리말 자막을 단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하는 경우 아직은 법적으로 유효한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의 사전심의 절차를 거부한 것이다. 또한 자본에 구속당하는 일반 영화의 상업성을 거부하고 '인권을 생각하는 국민이 함께 하는 영화제' 를 지향하면서 전국적으로 개인과 단체 자격의 후원과 자원봉사 등 국민적 힘을 영화제 개최의 토대로 삼고 있다. 여기서 '표현의 자유' 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이끌어내는 또 하나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간성 회복을 호소한다
인권영화제 전주행사에서는 전체 영화제에서 상영된 서른여섯 편의 영화 가운데 다시 열일곱 편을 선정 상영했다. 내용적인 면과 예술적 완성도를 고려해 엄선된 '볼 만한' 이 영화들은 국내외의 인권 현실을 다양한 색채와 형식으로 담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 (엠네스티) 가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다큐멘터리 <잊지 말자>는 독특한 영상 편지글을 담고 있다. 1991년 제작된 이 영화는, 부당하게 감금된 양심수 및 피살자 혹은 실종자들을 30여 개 나라에서 한 명씩 선정해 3~5분씩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상영되는 많은 수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무색의 환한 빛이다. 희극적이고 풍자적인 기법을 동원해 카스트로 정권치하의 관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블랙코미디 <어느 관료의 죽음>(쿠바·1966). 세르비아 군대가 보스니아 여성들에게 자행한 반인륜적 살상과 폭력을 기록하고 있는 <유령을 부르며>(미국·1996), 르완다 학살 과정 속에서 집단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끔찍한 고통과 힘들게 자신의 모성애를 되찾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악마의 자식들>(벨기에·1995) 등은 누구나 하나의 생명을 보듬고 사는 기본권 속에서 자행되는 탄압과 억압을 여러 형태로 보여 준다. 볼리비아 우카마우 집단이 제작한 <지하의 민중>은 1989년 산 세바스찬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다. 125분 짜리 이 영화는 남미의 오늘을 사는 원주민 출신 지도자의 변절과 회개를 그리고 있다.
한·중 혼혈의 미국인 여감독 크리스틴 최가 1988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는 1982년 백인에게 살해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 사건을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 편견을 고발한 문제작이다.
콜롬비아는 마약의 본산으로도 유명하지만 최악의 인권상황은 그 이상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마약 마피아가 저지르는 납치와 살인이 난무하지만 군대와 경찰의 힘을 업은 암살대가 정치적 목적으로 저지르는 살인행위도 만만치 않다. 30분 짜리 기록영화 <살인자의 천국>은 이러한 콜롬비아의 인권현실을 담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 <데드맨 워킹>에서 만났던 수잔 서랜든이 나레이션을 맡은 1994년 미국 작품 <암살학교>는 남미의 살인 병기를 길러내는 미국의 군사학교를 고발하고 있다.
1994년 호주에서 제작된 76분 짜리 <한 민족의 죽음>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영화다. 호주에서 북쪽으로 4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동티모르는 1975년 인도네시아에 의해 침공당한 후 지끔까지 그 군부에 의해 감시받고 인종 대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다. 이 영화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동티모르에 관한 얘기다. 언론은 물론 관광객마저 들어가기 어려운 이곳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인종 대학살의 증언과 국제적 외교의 음모를 다각적으로 밝히고 있다.
동성애자는 물론 미국내 소수자의 권리옹호를 위해 헌신하다 암살당한 샌프란시스코의 시정 감시관 하비밀크의 삶을 그린 <하비 밀크의 시대>, 군부의 모진 고문 끝에 프락치 노릇을 했던 여인의 고백과 자아회복을 보여주는 <배신의 시간 속에서>, 아르헨티나 군부통치 기간에 실종된 아이들의 증언을 담은 <도둑맞은 아이들>,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는 우리 나라의 양심수 100여 명의 얼굴사진을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그리운 사람들>, 세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과 세 명의 이스라엘 사람의 삶과 그들의 사회를 다룬 <평화의 가장자리에서>, 레이건 시대 미국 노동자계급의 고난에 찬 투쟁을 기록한 <미국의 꿈>, 우리 나라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투쟁과정을 다룬 <해고자> 등은 각자 스크린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호소한다.
미국, 호주, 벨기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수단, 브라질, 쿠바,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 세계 17개 나라에서 온 이 영화들은 소수민족, 노동, 환경, 여성, 동성애, 정치범 문제 등 오늘의 인권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양한 색채로 고발한다. 상업주의 영화에다 주는 오락적 재미보다 훨씬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영화제에서 얻을 수 있는 행운이자 커다란 선물이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 치뤄진 인권영화제
이틀 동안 내리던 눈이 그치고 1일 시작된 전주행사는 학교 당국과 관계기관의 인식부족이 안타까웠다. 이 날 전북대 합동강당 앞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북대학교 학생처 직원 등 학교 당국에서 동원된 40여 명의 직원들이 일찌감치 나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개막식 예정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면서 시민과 학생 등 관람객이 서서히 입장을 하자 입구를 막고 몸싸움을 벌이는 등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행사는 한 시간 반이 지연된 뒤 개막식을 생략하고 곧바로 영화상영을 시작했다. 당초 개막식에는 서준식씨 (인권운동 사랑방 대표)의 초청강연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열리지 못했다. 또한 학교측의 단전으로 인해 전력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열린 이 날 합동강당은 정상적인 난방이 이루어지지 않아 추위로 많은 불편을 겪었다. 인권에 대한 체감온도가 떨어져 있는 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시민과 도민의 호응과 각 사회단체, 인권단체 및 종교단체들의 참여로 열리는 제1회 인권영화제 전국공동행사 전주행사는 전북인권선교협의회와 온고을 영화터 등이 중심이 되어 기획했다. 전북연합, 민주노총 전북본부 등 도내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해 전북지역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이영호 목사)를 만들고 집행위원회와 전북대학교 총학생회가 주관을 맡아 진행해왔다.
"인권 문제 자체가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파급된 문제이고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이는 선진국이라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권력기구·아동학대·노동자·민족갈등 문제에 대해 일부 소수 운동가들만이 아닌 많은 사람의 관심과 참여를 필요로 하는 공동의 문제다. 제1회 인권영화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민들의 긴박한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리라 본다. 또한 인권영화제는 영상매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행사라는 면에서 이 지역 영상운동가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제1회 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영호 목사의 말이다.
전국 17개 도시에서 치뤄진 이번 제1회 인권영화제는 작품 하나하나의 상여에 대한 외국제작사의 허가를 받는 일에서부터 상영장소를 물색하는 일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