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관습과 계몽으로부터의 탈피, 그리고 퇴행의 근거
〈세 친구〉
글·이정하 영화평론가
(2004-02-12 14:18:14)
〈세 친구〉는 임순례 감독의 데뷔작이다. 임순례는 여성 감독이다. 임순례는 〈우중산책〉이라는 단편영화로 제 1회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세 친구〉는 적은 예산의 영화라는 점과 주인공들이 모두 신인이라는 파격성을 갖고 있다. 이래저래 주목할 요인이 많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여러 번의 기회를, 나름의 ‘어떤 이유’ 때문에 미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친구〉는 참 잘 만든 영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울하고 패배적인 영화이다. 잘 만들었지만 패배적인 부분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잘 만든 점들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동시에 패배적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정직하게 패배적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왜 그런가를 해명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국 영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세 친구〉의 이야기 방식은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억지로 짜맞추지 않는다. 등장 인물들의 성격적 갈등과 이의 극적 왜곡에 매달리는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 대신 삶의 구체성과 일상성에 초점을 두는 열린 양식의 전략을 택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달동네를 맴도는 ‘무소속’, ‘삼겹’, ‘섬세’ 이 세 친구의 형상은 과연 관습적인 한국 영화의 청년상에서 벗어나 있다. 거기에는 열아홉살 젊음의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끽해야 만화방이고 뛰어야 비디오 가게일 수밖에 없으며 벗어날래야 연탄재처럼 버려진 어린이 놀이터며 날아오른대야 한뼘 옥상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열아홉 살 젊음이란 얼마나 남루하며 얼마나 서글픈가. 좌절의 밑바닥도 탈출의 환상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일 수가 없다. 좌절에서 벗어나기에는 가난의 대물림과 가족의 족쇄가 너무 무겁고 환상을 바라기에는 일상화된 억압과 제도화된 폭력이 겹겹의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럴 경우 세부에 대한 진실한 묘사는 전체를 환기하는 힘을 갖게 되며 얼핏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단편적 사건들은 오히려 현실의 연속성을 더욱 풍부하게 연상하게 한다. 예컨대 교사가 무소속을 개 패듯 때리는 장면은 그 자체가구체적인 사실이면서 오늘날 교육 현실 전체에 대한 풍자가 되며, 체중 과다로 군대를 면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먹어 치우는 삼겹의 모습은 웃지 못할 현실이면서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우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후반부의 군대 문제이다. 그것은 마치 전혀 예기치 않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예정된 운명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들에게는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셋은, 그리고 그들이 발디딘 땅은, 이렇게 서서히 내려앉는다.
〈세 친구〉에서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가족 문제와 폭력 구조에 대한 집요한 접근이다. 사회, 학교, 가정, 개개인간의 제도화된 폭력과 일상화된 폭력, 금지로서의 억압과 울분으로서의 폭력 등 오늘날 현실로 존재하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억압과 폭력의 양상은 영화 곳곳에 드러나 있다. 과장하자면 영화는 이러한 폭력의 단락으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회상 장면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교사가 무소속을 때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군대 상관의 폭행으로 연결되어 무소속은 의병 제대를 하게 되지만 대신 더 이상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섬세의 경우에는 그 폭력의 양상이 한층 심층적이다.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그는 동네 불량배에게 맞아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는데, 이 때의 폭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신적인 성격을 띤다. 요컨대, 그것은 동성애자에게 대한 파시스트 적인 혐오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폭력의 테마야말로 이 영화의 심층인 셈인데 임순례 감독은 그것을 대체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며 어떻게 전달하고 있을까. 임순례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차분하게 가라앉은 ‘관조적인 카메라 스타일’ 로 담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 관점의 성격을 찾아낼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 속에서 가족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먼저 해명해야만 명확하게 정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사실 7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에서 가족문제는 헌신짝처럼 버려져 왔다. 그것이 현실생활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는 구태여 설명한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 친구〉는 이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리얼리즘으로 가는 통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소중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월남 참전 용사 출신의 무기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달동네에서 허름한 미장원을 하는 어머니, 재수학원 대신 미용학원을 다니는 섬세, 본드 소녀인 빗나가는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섬세의 가족을 보자. 알콜 중독에 빠진 무기력한 그러기에 더 조폭하고 자괴적인 가장, 그 가장을 증오하는 어머니, 부모를 증오하는 오누이, 아이들을 미워하는 부모...... 섬세의 가족은 철저히 분리되어 개별화되어 있거니와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오직 증오뿐이다. 헌데 그 증오는 애정의 이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적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닫힌 원을 이루고 있다. 섬세의 가족이 적의로 분리·연결되어 있다면 무소속의 가족은 무관심으로 삼겹의 경우에는 경멸로 분리·연결되어 있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닐까. 운명론이 아닐까. 세 친구와 그들이 발디딘 대지는 이상하게 현실과 고립되어 있다. 영화 속의 폭력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제도화되고 일상화된 억압과 폭력을 임순례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에는 가학적인 폭력은 있지만 폭력에 저항하는 폭력은 미미하다. 폭력의 한 측면이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대문에 구조화된 억압과 폭력의 문제는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 구조로 전화하지 않는다. 영화는 피가학적이고 비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여기서는 저항이 없으며 따라서 희망도 없다. 이럴 때 열아홉 살 젊음이란 얼마나 남루하며 얼마나 서글픈가! 관조적인 카메라 스타일은 바로 이러한 관점의 결과이자 그것을 관객에게 심어 주는 매개이다.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개입을 가능한 배제하고 담담하게 응시하는 형식인 관조적인 카메라 스타일은, 예컨대 〈비정성시〉에서와 같이, 어떤 반성적 성찰적 인식을 동반할 때에는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그러나〈세 친구〉의 경우에는 우울하고 쓸쓸한 정조를 자아낼 뿐이다.(〈세 친구〉의 형식은 오리엔탈리즘과 관련지어서 살필 필요도 있다.)
이 영화의 패배주의는 한국 영화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필 때 한층 잘 드러난다.〈세 친구〉의 이야기 전개는 이장호의〈바람불어 좋은 날〉과 다르다.〈바람 불어 좋은 날〉은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이농세대 젊은이들의 좌절을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에 놓음으로서 그 내부에 강렬한 저항의 싹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될 수 있었고 패배의 이야기에는 역설적으로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세 친구〉에는 저항의 싹도 국가 경쟁력이라는 새 이데올로기를 쓴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통렬한 공격도 그렇다고 무규정적인 힘의 분출도 없다 . 물론 전자를 나이브한 민중주의라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세 친구〉는 묘사방식으로서의 리얼리즘에는 충실하지만 영화를 현실 공간으로 이전시키지는 않는다.
내가 〈세 친구〉를 미루고 미루었던 ‘어떤 이유’를 대략 말한 셈이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나의 잘못이지만 그것대로의 근거는 또 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지적 예술적 상부 구조를 휩쓸고 있는 거대한 ‘퇴행’에 대한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영화에 있어서도 이 화두의 탐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