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2 | [서평]
인디언, 그 슬픈 역사의 진실된 기록
미국 인디언 멸망사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프레스하우스
글·이재규 자유기고가
(2004-02-12 14:16:00)
여기 한 자의 사진이 있다.
무뚝뚝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을 담은 사진이다. 그 남자의 눈길은 슬픔, 분노, 체념 등의 명쾌한 한마디로 담아내기가 곤란한, 다분히 복합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눈길은 매우 강력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붙들어 버리고 만다. 머리에 꽂은 깃털 하나와 길게 땋은 두 갈래의 머리가 인디언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식인 셈인데 얼굴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치어 미처 깨닫지 못하게 한다. 흑백사진이 주는 강렬한 대비에 의해 카메라의 초점이 맞추어진 얼굴 정면은 인쇄된 지면에서 솟아 올라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태양의 힘을 받아 굵게 새겨진 미간의 주름과 구리빛 피부, 앙다문 입술에 황인종 특유의 강인함이 번져나오는 사진 밑에는 <앉은 소 -홍크파파족의 추장, 카스터 장군의 제7기병대를 전멸시키는 수우 족의 대추장. 그는 모든 추장의 좌장으로 추앙받는다. 일생을 미군과의 투쟁으로 보냈다.> 라는 지문이 딸려있다.
언제였던가. 이 사진 한 장이 주는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이 책을 다 읽어버린 것 같았던 느낌으로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던 때가. 나는 처음 대면한 이 인디언 추장의 얼굴에서 그들의 가슴 밑바닥에 잠겨있는 '역사'를 단숨에 읽어버린 느낌이었다.
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은 청년사에서 좀더 작은 판형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책은 70년대 말에 초판이 나왔다) 책머리에 실려있는 몇 장의 사진이 주는 인상을 따라 숨가쁘게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그 당시만 해도 비판적 접근 자체를 금기시 하던 미국 역사의 진면목을 대하는 흥분으로 하루밤을 꼬박 새웠다.
'자유(-누구의 자유?)', '프론티어(-누구를 위한 개척?)' 따위로 덧칠된 미국 역사의 추악한 출발에 대한 피어린 규탄의 목소리가, 흑인노예와 인디언 학살로 빼앗은 땅에서 나는 신음소리가 이 책 곳곳에서 울려 나왔다.
이 책은 1860년-1890년대 말을 주요배경으로 원래 그들의 땅이었던 북미대륙에서 백인들의 말살정책에 의해 사라져간 인디언 부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른바 '서부개척의 시대'를 다룬 '야사'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대개 그렇듯 '야사'로 취급되는 민간의 이야기가 진실에 휠씬 가까운 법이다. 백인들의 후예가 만든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황량한 서부의 벌판을 배경으로 총솜씨를 자랑하는 가짜 영웅들의 이야기 뒷편에서 '개척자' 백인들은 엉터리 약속과 사기, 협박, 대학살극을 통해 인디언들을 '보호'의 명분 아래 그들의 광대한 평원에서 내쫓았다.
<여름의 태양을 만난 눈처럼 그들(강대했던 인디언부족들)은 모두 백인의 억압과 탐욕 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면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위대한 정령(精靈)이 주신 정든 땅과 집 그리고 조상의 무덤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싸워보지도 않고서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들을 포기하고 몰살당해야 하겠는가? 여러분은 나와 똑같이 외치리라. "절대로, 절대로 안된다!">
'둑을 무너뜨리고 흘러 넘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봄 홍수와 같은' 백인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서긴 했지만 원래 싸울 의사가 없었던 인디언들은 여러번 평화협정을 맺고 한정된 주거지역을 받아들이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미 맺은 협정도 필요에 따라 뒤집기를 반복하면서 끝내는 운디드 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인디언들을 집단학살하기까지 했다.
이 말살작전에 따라 모히칸 족, 세네카 족 등 음악적인 이름을 갖고 있던 수많은 인디언 종족들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미국땅의 지명으로 남아 있을 뿐 '그들의 뼈는 수천 개의 불타버린 마을이나 2천만 침략자의 도끼앞에서 사라져간 아름다운 숲속에 묻혀졌다.'
학살과 패배의 기록인 이 책을 뒤집어서 읽는다면 이 책은 침략자에 맞서 결연히 싸워나가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은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페인 침략자에 대항해 250년 동안이나 게릴라전을 펴온 아파치 족의 마지막 추장 제로니모(고야스레이), 오글라라 수우 족의 대추장 붉은구름, 1876년 리틀 빅 혼 전투에서 인디언 사냥개 카스터의 제7기병대를 몰살시킨 앉은소…이들의 이름은 '서부개척사'(정확한 표현은 인디언 멸망사)의 가짜 영웅들, 인디언 사냥에 명성을 떨친 장군들과 백인식 정의의 간판스타로 나서는 전설적인 백인 총잡이들의 이름을 대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묘미는 인디언들의 삶과 죽음을 다룬 이 기록이 '대지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글을 쓸 줄 모르고 말만 아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디언들은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많이 썼고, 그들의 말은 자연계의 생생한 직유와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붉은 구름, 차는 곰, 외로운 늑대, 차는 새, 말을 두려워 하는 사나이, 앉은 소 -인디언들의 이름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린다. 대지와 인간, 생물과 인간과의 생동하는 관계가 그들이 부여한 사물의 이름에서 드러나 보인다. 인디언달력에서는 5월이 '들꽃이 시드는 달.' 8월이 '옥수수가 은빛 물결을 이루는 달.'12월은 '나무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이다. 이보다 더 자연의 흐름을 잘 표현한 이름이 또 있을까.
다시 앉은 소의 사진을 들여다 본다. 아마도 백인 사진사가 찍었을 그 얼굴을 가둔 사진의 경계선을 부수고 넓은 평원이 열리고 들소떼를 따라 말을 달리는 인디언전사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인디언은 원래 에스키모의 조상과 같은 몽고족이라고 한다. 2만년 전 베링해협을 건너 북미와 남미로 흩어져 간 먼 옛날의 우리 종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햇볕에 그슬린 굵은 주름과 구리빛 피부, 무뚝뚝한 눈길이 그토록 강하고 친숙한 느낌으로 와 닿았던 이유가 내 핏줄안에 흐르는 같은 종족의 울림 때문이었을까? 이 사진을 대하는 순간 같은 종족으로서 인디언의 피가 흘러들어와 펄떡이는 것을 느낄 사람은 필자 하나뿐일까?
이재규 / 전북대 법학과를 81년에 입학하여 사연많은 대학시절을 보냈다. 전민련 정책실장과 전북연합 편집실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민주주의민족통일국민회의에서 일하고 있다. 숨가쁜 사회운동 속에서도 자유기고가로, 컴퓨터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래로부터 들여다보는 새로운 역사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서
글·이동희 전북대 강사·사학과
일찍이 아날학파는 일상적인 것들을 분석하여 그 시대의 의식과 역사상을 그려냄으로서,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역사 연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연히 보여주었다. 보벨(M. Volle)이 프로방스 지방에서 작성된 유언장 18,000여 개를 검토하여, 장례 행렬에 사용되던 초가 1770년까지 증가하다가 이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을 밝혀 내고 이를 통해 18세기, 즉 혁명 전부터 프랑스인들의 종교적 무관심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읽어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생활사를 다룬 『조선시대 생활사』,『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등 대중적인 연구서들이 연이어 출간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이 책들이 아직은 생활의 단편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지만, 이제라도 한국사학계가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고문서학회에서 펴낸 『조선시대 생활사』는 족보·호적·소정·토지대장·매매문서·재산분재기 등 각종 고문서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생활사에 접근한 것으로 총 19명의 필진이 동원되었다. 총론, 가정 생활, 공동체 생활, 신분별 생활, 제도와 생활, 경제 생활,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또 여러 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모두 21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 조선시대 여성에 관한 것을 일부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혼례를 신부집에서 올리고 1년 혹은 그 이상을 처가에서 생활하는 오랜 혼례풍속이 있었으며 이러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풍속은 『주자가례』의 친영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조선건국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명종대 이후 반친영(半親迎) 이라 하여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른 후 신랑집으로 돌아오는 형태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재산상속의 경우 17세기 전까지는 장자·차자·남녀 구분 없이 균등 상속이었다. 친정집에서 물려준 재산은 부인의 명의로 되어 부인에게 재산 행사권이 있었으며, 만약 후손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재산은 시댁이 아니라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모시거나, 분담하여 모셨다. 당연한 결과로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를 모셨으며, 이것은 자연스레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이어졌다. 이런 외손봉사는 조선 중기까지도 사대부가에서 간간히 행해졌다. 율곡 이이가 외가 신씨의 제사를 모셨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랬던 것이 17세기 이후 적장자 위주의 사회로 변모되어 감에 따라, 재산상속에서 딸을 차별하는 등 여성의 지위가 격하되어 갔던 것이다.
이 책은 대중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색채가 강하여 비전공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 시대상을 무엇보다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1차 자료인 고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또 앞으로의 생활사 연구가 고문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을 때, 생활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틀을 짜보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조선시대 사람들은...』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보다 용이하게 서술되고, 주제 자체도 그렇게 설정된 본격적인 대중서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사회·경제생활, 하권은 정치·문화생활편으로, 총 43명의 필진이 「조선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 시기는」부터「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까지 모두 46개의 주제를 나누어 집필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금세기 이전까지는 하루에 식사를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점심까지 세끼 식사로 정착된 것은 금세기 이후였다. 18세기 1냥의 구매력은 현재의 화폐로 2만원 정도가 되며, 쌀 1섬은 대개 5냥 정도였다. 똥을 궁중용어로는 ‘매우’ (한자로는 ‘梅雨’)라고 하며, 왕은 ‘매우틀’이라는, 마치 아이들 변기와 같은 모습의 이동식 변기와 같은 모습의 이동식 변기를 사용하였다. 17세기 담배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상하노소를 불문하고 담배를 즐겼으며, 신하들이 왕 앞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관리들은 묘시(卯時, 5시~7시)에 출근하고, 유시(酉時, 17~19시)에 퇴근하였다. 다만 겨울에는 진시(辰時, 7시~9시)에 출근하고·신시(辛時, 15시~17시)에 퇴근하였다. 고추는 17세기말에 이르러서야 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는데 18세기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품종이 들어오면서 배추김치가 널리 담궈지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배추김치가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한국인 하면 매운 김치를 떠올리지만, 그렇게 오래된 전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생활사』와『조선시대 사람들은...』은 옛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풍부한 상식을 전달해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역사의 폭을 넓혀 놓고 있다. 또한 이 책들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몇 사람의 역사가만이 아니라 대중들이 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때 그 민족 그 나라의 미래는 보다 바르게 창출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대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생활사는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역사 대중화 작업의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이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제에 따라서는 한국사 개설을 생활사라는 옷을 입혀 놓은 듯한 것들도 있고, 피상적인 설명에 머무른 듯한 글들도 있다. 또 필자들이 언급하였지만, 생활사가 아닌 주제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생활사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고, 자료가 부족한 데에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자료 수집과 함께, 일상생활 하나 하나에 대한 찬찬하고 깊은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또 그랬을 때 생활사 연구가 범할 수도 있는 역사상의 왜곡을 말을 수 있으리라 본다. “역사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읽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이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나야 한다. ”(『우리 역사의 여러 모습』)라고 하한 이기백 교수의 역사관은 생활사 연구에 더더욱 적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보면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 연구는 식민사학의 극복, 민주화의 실현이라는 시급한 문제에 직면하여 옛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추적해 볼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최근 일기 시작한 생활사 연구 붐은, 국내외의 상황 변화와 함께 한국사학계에서도 그럴 수 있는 여유과 너그러움이 자리하였음을 보여 준다. 모쪼록 이런 생활사 연구가 한 사람, 한 집안, 한 마을의 일상생활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한 시대의 역사상을 아래로부터 그려볼 수 있는 그런 연구로 진척되기를 기대한다.
이동희 /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