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2 | [문화저널]
잊혀진 역사 복원이 과제로 남았다
글·이철량 전북대교수·미술교육학과
(2004-02-12 14:13:22)
93년 11월부터 장장 3년 1개월을 연재해왔던 이철량 교수의 전북미술사가 이번호로 막을 내린다. 거의 황무지와도 같았던 지역미술사에 대한 이철량 교수의 끈질긴 조사와 탐구는 역사속에 숨어버린 많은 미술의 거장들을 오늘에 되살려 놓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름으로만 전해지던 지역작가들의 작품이 새롭게 발굴되었는가 하면, 자칫 중요한 의미들을 간과해왔던 미술작품들이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다. 3년을 넘는 세월동안 매월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나름대로 전북미술사의 새로운지평을 열어온 이철량 교수께 깊이 감사드린다.
전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 있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외지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전주를 그리워하며 한번쯤 찾아 가 봐야 할 곳으로 말하는 것을 많이 듣는다. 사실 그렇다. 먹고살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에 와서 허기진 배를 달랬었고, 먹고 살기가 넉넉할 때는 이 곳에 들려 풍물을 즐기고 갔다. 특히 삶이 극심하게 어지러웠던 일제시대와 전쟁을 겪던 시절에는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던 인물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 근대 화단의 대가들이었던 소정 변관석, 묵로 이용우, 고암 이응노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전주를 다녀갔다. 그들은 여기서 그림을 팔기도 했고, 간판을 그리기도 했으며, 혹은 그림 애호가들로부터 그냥 쌀을 얻어가기도 했다. 실상 전북이 한국 근대화단을 먹여살린 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70년대 이후 우리 경제가 좋아지자 호사가들은 골동품을 찾아 나섰다. 서울의 목기, 서화, 그리고 각종 골동품들은 모두 전라도의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의 옛 생활용기나 장식물들이 현대에 들어서는 모두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 고대의 민속물들로 꾸며지고 있다.
이러한 저간의 가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 고장이 오랜 세월 동안 넉넉한 살림을 꾸려 온 유서 깊은 지역이었으며 이곳에서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배경에서 서화가 발달해 왔음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유품은 별로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들도 지극히 적다. 역사에 무관심했던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우리 선조들의 그림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과 같은 연가의 황폐화를 낳았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그림을 장려하고 수용할 위치에 있었던 사대부들의 생각은 그림에 대단히 비우호적이었다. 그림을 감상하고 즐기는 풍습은 일반화되어 있었으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천한 잡기의 하나로 치부했었다. 조선 초기에 대표적인 선비화가였던 강희안은 “그림을 후세에 남기는 것은 그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남에게 그림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사회 풍조가 조선조 전반에 퍼져 있었으니 화가들이 이름을 남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작가를 찾아가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일이 어찌 중앙에만 해당되는 일이었겠는가. 오히려 지방에 내려가면 한술 더 뜨는 일이었다. 중앙에서처럼 도화서나 화원이 활동하지 않았던 지방에서는 아무리 전주와 같은 크고 부유한 도시일망정 전문화가가 활동할 수 있었던 무대는 못되었다. 지방의 전문화가라는 것은 그저 떠돌이 화가였고 문전 취식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천민들의 직업이었다.
그 동안 필자가 연재했던 거의 모든 작가들은 전문 화가들은 아니었다. 사대부 화가들이었다. 물론, 전북 미술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구한말 이정직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정직 이하 근대 작가들이 사대부 화가들이며 그 그림의 내용이 주로 문인화라는 사실이 오늘의 전북미술사의 현실이다. 더욱이 이정직을 비롯한 구한말 이전의 작가와 기록이 전무한 것이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림을 이들만이 그렸겠는가.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갔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 지역의 지주들이나 양반들의 가정을 장식하고 그림을 생산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화가들의 작품이나 이름은 어디에도 전하지 않는다. 구한말 이후에 급속히 사대부 화가의 숫자가 늘고 작품이 남아있는 사실은 기실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던 현상으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 어떻든 우리에게는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남아 있다.
필자가 그 동안 기록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은 비교적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그 만큼 기록하는데 있어서 미술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미술의 역사를 기록하는데는 전적으로 그 작품이 중요한 대상이 된다. 그리고 나아가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와 작가의 주변을 찾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에게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일은 과연 이 지역 작가들의 작품 수준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 생각하기에는 그간의 작품들이 대단히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필자의 욕심대로 작품의 흐름을 찾아 기록하지 못하고 작가들의 이름만 올려놓고 말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노력 부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그 동안 전북미술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탓에 작품이나 작가를 찾아 나서기가 너무 힘겨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몇가지 숙제를 떠맡게 되었다. 그 첫째가 그간 남겨진 작품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이 무관심 속에서 산실되거나 혹은 서울 등 여타 지역으로 흘러 나갔다. 이제 이들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관심있는 개인이나 기업 등도 해야할 몫이지만 지방 정부에서도 노력해야 한다. 도립미술관이나 시립미술관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보관하는 일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는 체계적인 자료수집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작품의 수집과 함께 중요한 작가의 자료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들의 출생과 환경, 작업에 대한 활동과 성품 등 작품연구를 위한 다각적인 자료 수집이 필요하다. 지역 미술에 대한 관심깊은 학자들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셋째는 전북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과거 전북의 역사와 경제, 정치 등 다양한 구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한다.
필자가 그 동안 다소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자료를 토대로 삼국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이 지역 출신들의 화가들을 추적해 보았다. 이녕에서부터 김현철까지 많은 서화가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어느 한사람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을 아쉽게 생각해 왔다. 그저 그러한 작가들이 이 땅과 바람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로 자위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작품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후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조사를 기초로 하여 더욱 풍부한 연구조사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