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2 | [문화시평]
'도약'과 '정체'의 갈림길에 선 예향의 상징
도립국악원 10년의 의미
글·유영대 고려대 교수·국문학과
(2004-02-12 14:10:53)
내 마음의 고향 전주의 도립국악원이 개원한지 벌써 10년이 되었노라며 이에 대한 축하의 글을 적어달라는 <문화저널>의 연락을 받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송구한 마음이 앞섰다. 전주에서 살던 10년을 생각해도 가슴 한가운데가 시려오는 부분이 있어 기뻤는데, 이제 전주를 떠나 살면서 전주를 그리워 하는 위치에 있으니 내가 온전하게 도립국악원 창립 10주년을 축하할 위치에 서있는 것이지 송구스러워 청탁의 수락여부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청탁을 받고보니 그래도 나같은 사람이 별나게 축하를 해주는 것이 도립국악원에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전주를 예향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예향'이라는 애칭 속에는 전주가 국악의 고향, 우리 예술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그리고, 예향을 이끌어 가는 든든한 기둥 가운데 하나를 도립국악원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다. 보통 사람이 열살을 먹는 것도 크게 잔치해야할 일이거니와, 예향 전주를 뒷받침하는 도립국악원의 10년 기념 덕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법하다. 진심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국악원을 끌어온 것에 축하를 보낸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 10년이란 물리적 시간을 일종의 전환기로 삼아서 새로운 도약을 꾀해야 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10년은 결실과 위기가 동시에 오는 시기이며,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도약하느냐 혹은 정체하고 마느냐가 결정되는 시기이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여러 상황이 안정됨과 동시에 자칫 지금까지의 관성으로 굳어져서 고여있는 물처럼 정체될 가능성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점은 지금까지의 여러 양상을 면밀히 반성, 앞으로 10년의 기획을 마련하는 데서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립국악원의 10년 업적에 대하여 칭송의 말도 들어보고, 우려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일이 이 자리에서 제일 요긴할 듯하다. 그 동안 도립국악원에서 기획하여 성공한 창극은 전국적 수준임을 평가받았다. 역대로 연주부를 지휘했던 분들도 인물별로 각각 독창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어서 짧은 연륜임에도 제대로의 궤도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도립국악원 교수부의 일반강습은 국악원의 간판노릇을 충분히 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어찌 듣기로는 도립국악원에 쌓여 있는 현안 문제들이 갈등요소가 많아 해결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도립국악원 교수부에 대한 운영방식에 대하여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도립국악원 관리와 단원들 사이에 일정하게 갈등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도 그다지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단원 사이의 인화에 대하여 우려하는 소리도 들린다. 거칠게나마 문제의 소재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기로 도립국악원은 크게 세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전통예술을 전공한 이들로 구성된 창극부·연주부·무용부 우리의 전통예술을 공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하는 무형문화재, 혹은 그에 준하는 분들로 구성된 교수부가 있어서 이분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습을 하는 것이다. 이는 수준있는 예술을 보여줌과 동시에 공개된 강습을 통해 전통예술의 저변을 확대한 공로가 있다. 마지막으로 연구단이 있어서 현장조사를 통해 확보된 자료를 연구하여 책으로 간행하거나 채보하여 출판하고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특히 국악원의 강습제도를 무척 부러워한다. 아주 저렴한 수강료로 최고 수준에 있는 교수들의 지도를 매일 한시간씩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제도의 뒤안에는 교수진의 큰 희생이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다음 세대에는 찾기 어려운 명인· 명창· 명무 들이다. 그분들은 출퇴근 시간을 정한 다음, 하루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오랜 시간을 대중을 상대로 강습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귀한 분들이다. 그분들에 대한 배려가 가장 아쉽다. 예술인 집단에 적용되어야 할 특별한 규칙이 정착되어야 한다.
도립국악원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누구나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면 항상 지적하는 문제로 관료주의의 입김이 너무 드센 점을 들고 있다. 단원들이 무기력하며 문제해결 능력마저 상실하였다는 지적은 바로 이 관료적 운영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예술활동에 관한 모든 것은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뜻과 형편이 우선 논의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행정편의에 이끌려다니기 일쑤이다. 연주부·창극부·무용부가 독창적으로 행사를 계획하고 실천시키면서 그 과정을 행정 실무자들이 도와줘야 하는데, 간혹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단체들이 관리들의 뜻대로 휩쓸려 다닌다고 한다.
이제 문제의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개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토론이 필요하다. 도립국악원에 문제점이 있음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고, 개혁에 대한 요구는 높지만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은 요원하다. 도립국악원을 구성하는 세 요소, 관료와 전문예술인들과, 지지기반인 대중들 모두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각자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도립국악원이 창립 10주년을 맞는 잔치를 기화로 삼아 전북 도민과 전주 시민의 합의에 의해서 도립국악원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도립국악원의 앞으로의 10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 듯 싶다. 도립국악원은 훌륭한 우리 예술 작품의 정수를 대중에게 보여주고, 진정한 우리 시대의 명인과 명창·명인 등 훌륭한 예술가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며, 생활문화의 현장으로서 강습과 공연을 통해서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이는 관료의식의 극복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행사의 기획 뿐 아니라 예산의 집행에서도, 예술창작을 담당하는 지휘자라든지 예술감독의 입장을 존중하고, 문화재급 예술인의 자문을 앞에 두어야만 전북 예술의 창조적이고 발전적 방향을 제대로 밟아 나가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예향 전주, 내 마음의 고향 전주가 훨씬 더 넉넉하고 풍요로운 고장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10년을 맞는 도립국악원에 축하를 보내는 진정한 의미이다.
유영대 / 전북 남원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주우석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민속과 풍속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특히 판소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전라북도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활동해왔다.
6백년의 세월을 건너 만난 두 시대의 미술
「고려 말 조선 초의 미술」특별전을 보고
글·장순순 전북대 강사·사학과
얼마 전인 10월 29일부터 11월 24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찬란한 고려의 석양과 새로운 조선의 여명」이라는 주제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미술풍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의 기획 목적은 1997년 우리 고장에서 개최되는 동계U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국립전주박물관 개관 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별히 '고려 말 조선 초의 미술'을 주제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이 시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라는 정치사적인 변화 만큼이나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전화기였기 때문에 그 변천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전시회의 개최의도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왕조교체라는 정치사적인 시대배경이 예술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표현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겨울을 알리는 비가 조금은 추적추적 뿌리던 날이었다. 주말을 날씨만큼이나 우울하게는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모처럼 맘을 다져먹고 벼르고 있던 특별전시회를 보러갔다.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자 일군의 하얀 드레스 차림을 한 신부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이제는 박물관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어 버린 광경이 오늘도 예외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꾸물꾸물한 날씨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모두 밝고 행복한 얼굴을 하며 사진사의 요청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작품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 주말이어서인지 전시실에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도 꽤 보이고, 한쪽에서는 전시물에 대한 설명에 온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일군의 학생들도 보였다. 설명하시는 분도 듣고 사람들도 제법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유물은 크게 유물과 자료로 나누어진다. 유물로는 이성계 관련 고문서, 목판·활자인쇄, 사경(寫經), 어보(御寶), 회화, 불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금속공예, 도자기 등 122건 135점, 자료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같은 복제품, 모사도, 탁본, 판넬 등 65건 65점, 합하여 187건 200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국립전주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국립박물관, 동국대학교 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남원 실상사를 비롯한 사찰, 여러 문중, 호림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 여말선초의 미술품으로 대표할 만한 유물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국보가 4건 5점, 보물은 10건 11점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미술품의 특징은 불교미술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고려말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중국문화 특히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중국문물의 유입은 통치자들 스스로 중국문화에 접하거나 -고려말 충선왕이 연경(燕京;현 북경)에 설치했던 만권당에서 한·중 학자간의 교류가 있었고,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기 직전 10야 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많은 원의 문물을 접하였다- 원나라 불교인 라마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는 불교 관련 그림인 불화가 귀족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발달하였으며, 고려후기에는 중국의 송·원의 영향으로 작은 불상의 제작이 유행하면서 이전의 불상들과는 달리 이국적이면서도 화려한 장식이 많이 된 금동불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화려한 양식은 원나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라마불교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러한 원나라의 영향은 탑의 양식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고, 14세기부터는 라마탑의 형식을 갖춘 사리기와 다층 장식의 사리병이 제작되어 매우 이국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천사지 삼층석탑, 원각사지 삼층석탑 등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자 왕족과 귀족 위주의 고려미술은 사대부와 서민이 즐길 수 있는 미술로 다양해졌다. 아울러 보다 소박하고 절제되며 정형화된 양식을 지니게 되었다. 회화에 있어서도 좀더 대중적인 취향을 반영하여 더 이상 종래의 섬세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도자기도 청자는 쇠퇴하고 조선 개국의 신선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여 분청과 순백자, 그리고 여유있는 한국화로 장식된 청화백자와 토석적이면서도 단순하게 추상화된 상감청자등 독특하고도 다양한 도자기가 제작되었다. 금속공예에 있어서도 조선시대는 전반적으로 다소 형식화되고 단순하거나 둔중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 특유의 장식을 보이고 13~14 세기에 원의 나전칠기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는데, 14~15세기에 이르러서는 전통양식과 새로운 조선 특유의 양식이 혼합된 형태를 보인다.
이렇듯 여말선초의 미술은 고려시대의 왕조의 쇠망과 더불어 화려했던 불화와 청자, 금속공예와 나전칠기 등의 현저한 퇴락을 보이다가 조선 건국 이후 명의 선진문물을 접하는 과정에서 산수화와 분청자기, 백자가 성행하게 된 전환기 혹은 과도기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말선초의 미술이 이렇듯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 배경에는 두 왕조를 이끌어 간 미술 애호가의 신념과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고, 이번 전시회는 그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본다면, 전시된 유물들에서 '찬란한 고려의 석양과 새로운 조선의 여명' 이라는 기획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전시된 유물들이 -물론 유물들이 시기적으로 상당히 오래된 만큼 현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주로 지배층에 한정되어 있고 일반 맥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면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족 위주의 고려미술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대부와 서민이 즐길 수 있는 미술로 다양해졌다' 라는 전시 기획자의 설명이 큰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회는 기존의 전시회에서는 잘 시도되지 않은 주제를 설정하여 언뜻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품을 집합시켜 놓음으로써 여말선초의 예술품의 전반적인 형태를 한꺼번에 잘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주제를 잘 볼 수 있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할 수 없어서 한 곳에 모아 전시할 수 없는 사찰이나 유물들, 특히 해외에 있는 우리의 진귀한 유물들을 사진이나 복제품을 통해서나마 함께 전시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 텐리대(天理大)에 소장된 것으로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했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등이다.
장순순 /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조 초기의 한일관계사를 전공했으며, 작년에는 일본 도호쿠대학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했다.
연극 속에서 역사 만나기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보고
글·김정수 문화저널 편집위원·연극연출가
눈이 내린다. 아니 눈이 아니라도 좋다. 김제 만경의 황량한 겨울 풍경을 뒤로하고 충청도, 경기도, 어느 언덕, 어느 계속을 휘어돌아 전봉준이 간다, 서울로 간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봉준은 혁명의 상징이다. 반란의 꿈이다. 백년을 가로질러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뜨거운 가슴을 두드려대는 큰 북이다.
더제 100주년 기념공연으로 제작된〈서울로 가는 전봉준〉(안도현 원작시, 곽병창 극본·연출)은 바로 백년 전 이 전라도 땅을 달궜던 뜨거운 피의 함성을 힘주어 돌아본다는 점에서 의의있는 기획이었다.
이 지역의 내노라하는 시인과 연출가의 작업이라는 사실 이전에〈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관에서 선택한 작품에다 관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일찍이 눈길을 끌었다. 백년 전 관의 폭정과 탄압에 목숨으로 항거한 이야기가 오늘에 와서 관의 자랑거리로 편입된 것은 전봉준이 꿈꾸던 혁명이 성공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 내의 상황은 달랐다. 아니, 전혀 아니었다. 작품 내의 현재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백년전 함성의 주인공들에 비해 훨씬 의기소침하고 왜소하고 생기 없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백년 전 힘을 굳건히 땅을 딛고 항거했던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현재의 농민들이 있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주는 형식으로 구성 되어있다. 첫째는 전봉준 시대에 농민군들의 이야기다. 폭정에 못 이겨 낫과 괭이를 들고 일어선 농민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싸움과 사랑이 춤과 노래로 형상화 되어있다. 다른 한 이야기는 농업정책의 실패, 대량 이농 이후 젊은이를 찾아보기도 힘든 현재의 농촌을 담고 있다. 서른 일곱 살까지 장가를 들지 못하다 연변의 처녀와 결혼을 했으나 농촌의 삶은 힘겹기만 하고 급기야 연변여자가 영농자금을 들고 가출을 하자 사내는 아내를 찾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이 두 이야기는 농민과 사랑이라는 점에서 일치되기도 하지만 각기 다른 시대 배경과 행동양식으로 차별된다. 여기서 두 이야기가 제시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서사극의 상투적인 창문 구조와 확실히 다르다. 왜냐하면 두 개의 이야기는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향해 열려 있거나 수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이야기는 백년 전과 현재에서 혹 있었거나 있었을 법 한 각기 독립된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둘 사이가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당시가장 평범하거나 혹 소외된 계층 남녀의 사랑이라는 공통의 이야기가 있다. 또 그들 주변의 삶과 그 삶이 던지는 숙명적 과제가 있다. 하지만 이 남녀의 이야기는 구태여 어떤 상징적 연관을 취하고 있지 않다. 연출은 무리한 이야기 엮기를 피해 같은 공간 안에 단순한 시간 대비를 펼쳐 보여 주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곽병창의 대부분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에도 역시 과거와 현재가 함께 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의 과거는 결코 지난 일에 불과한 것으로 묻어둘 수 없는 것들이다. 과거라기엔 너무 생생한 현실이다. 벗어나기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아직도 계속되는 상처로 남아 갑자기 현대로 뛰어들던지 《꼭두, 꼭두》, 귀신이 스며들 듯 환청과 환각을 통해 현재에 개입되기도 한다. 《녹두, 녹두》그것도 아니면 서사극의 전형인 극중극의 형태를 통해서라도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현재의 운명을 원격조정하려 든다. 《꽃신》그러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방법은 언제나 달라져 왔다. 이들은 각기 그 접근 방법만큼이나 다른 극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를 결코 역사책 안에 묶어둘 수만은 없다는 강한 의욕이 기존의 작품들과 또 다른 구성을 취하게 만든 것이다.
기존의 작품들이 갖는 과거와의 조우가 사적 체험에 가깝다면 이번 작품의 경우 전봉준이란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터라 그에 부응하는 현대적 화두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자연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극 중 자연스럽게 역사적 사실을 만나게 되는 곽병창의 연극은 그 역사적 사실 못지 않게 그 사실을 만나게 하는 통로, 즉 현재라는 입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바로 작가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반영이며 역사적 사실을 펼치보이는 역사교과서로의 역할이 새삼 확인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현재는 다소 무거운 역사를 수평으로 지탱할 만한 저울추로서 다소 미약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내 순회공연 일정 중 그 시작인 11월 23일, 24일 정읍의 정읍사 예술극장 공연의 경우 공연장의 협소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초 기대했던 웅장한 면모를 보여주질 못했다. 참여하는 배우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같은 배우로서도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뮤지컬의 최대 관건은 당연히 음악에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노래를 소화해내지 못하는 배우들이 눈에 띄는데다 주인공 격인 몇몇 배우의 독창을 제외하고는 녹음된 음량이 작아 노래의 가사가 호소력 있게 와 닿지 않았다. 안무에서도 미흡함은 있었다. 고전 의상 안에 서구적 몸사위는 어색하게 눈을 자극했다. 안무는 닭들의 춤 등에서는 깔끔하고 발랄한 모습을 한껏 과시했지만 상대적으로 과거 농민군들의 춤에서는 부분적으로 어색한 모양이었다. 당초 뮤지컬이 미국의 현대적이며 도시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서구적 신명을 보여주는 극 형태임을 감안하면 한국적인 뮤지컬, 특히 이번 작품과 같이 과거와 현대가 상존하는 극에서 음악과 안무의 접근방식은 보다 많은 고민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연출은 극의 막바지에 그 동안 전혀 무관한 듯 진행된 두 묶음의 이야기를 동시에 같은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원작시의 이미지에서 차용된, 전봉준을 실었던 수레와 전라도의 땅을 울리며 달렸던 기차가 교차된다. 그리고 그들이 교환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교환되고, 만남과 헤어진다는 사실이 결코 다른 의미가 아니고 같은 하나임이 상징적으로 제시되는 장면이다. 지난 역사의 일들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우리 또한 그 역사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연극적으로 강변한다.
이번 뮤지컬을 통해 새로운 연극배우들의 등장이 눈에 띤다는 점, 또 수년동안 축적된 뮤지컬 역량의 정착을 확인했다는 점 등은 무엇보다 의미 있는 수확으로 손꼽을 수가 있었다. 도한 관의 지원이 도내 연극 활동을 자극했다는 점도 이번 작품의 또 다른 의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