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저널]
꽁트
도둑에게 시집보내기
글·이병천 소설가
(2004-02-12 14:08:57)
누이동생이 혼기를 놓쳐버린 지 이미 오래라서 어머니께서는 자나깨나 그 걱정이 크다. 한동안 아내를 통해 들려오는 얘기로는 길을 걷다가 바지를 입은 사내만 봐도 예사로 보이지 않더라고 하시더니 급기야는 모로 가거나 뒤로 걷거나 얼굴 아래에 팔다리만 성하게 달려 있다면 얼씨구나 딸을 내주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이제 몇 조금이나마 결혼을 삼가는 시한(時寒)이라 이름은 좀 덜 하신 모양이지만 새 봄이 되면 그 표현이 어떻게 달라질는지 나로서도 짐작이 되는 바여서 명색이 큰아들 입장으로 이만저만한 고민이 아니다.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모르쇠를 해온 셈이지만 당신 눈감기 전에 남의 후처든 배냇병신이든 그냥 처분하겠다고 은근히 나를 협박하기 시작하면 그 또한 견디기가 쉽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방귀 뀐 놈은 으레 제 밑이 근질거리는 법이라고, 내가 입을 못 열고 어머니가 그런 나를 섭섭히 여기는 배경이 있긴했다. 언젠가 한번은 동생이 맞선을 보고 일이 마악 성사되려는 찰나에 내가 완강히 퇴짜를 놓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을 시앗 싸움에 요강 장수 격으로, 흥(興)이야 항(恒)이야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확실히 아니었다. 인천 세무서 비리사건으로 복장 터지지 않는 놈dl 없는 판국에 하필 그 방명에서 일한다는 사내가 나타나 내 누이에게 침 바르려고 했던 것이다. 언감생심이라니......! 물론 녀석의 생각이야 다를 수도 있었다. 녀석은 어쩌면 어수룩하기가 밀가루죽 같아서 국민감정이 그쯤 됐으니 제대로 장가들기는애저녁에 글러버렸다고 지레짐작하고 노처녀인 누이에게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4천만이 하룻밤 새고나면 얼마나 잘 잊어주는지를 미처 헤아리지도 못하고.
어쨌든 내가 쌍심지를 돋우는데 비해 아내는 극성이다시피 옹호하고 나섰더랬다. 당사자인 누이는 사내의 키가 작아서 코가 땅에 닿을 정도라고 표현은 했지만 켕기는 부분은 자신에게도 있어서인지 드러내놓고 내색은 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어머니야 앞서 얘기한 대로 개 코든 닭 턱이든 그만하면 탓도 못한다는 식이었다. 앞 산 나무가 우거지면 우거진 대로, 밭으면 밭은 대로 숲을 이뤄서 산이 되는 법이라고.
어머니가 그러면서도 끝내 내 눈치를 무시하지 못하셨던 건 혼수품에 얽힌 갈등 때문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찬물 한 대접이지 딸 하나 시집 보내려면 혼수 비용이 적지 않을 텐데 어머니 살림으로 그게 늘 걱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제금난 내 선심에 의존해야 하는데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결혼에 내가 숟가락 한 벌 선뜻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임은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겠기 때문이었다. 나도 가뭄에 오갈 들릴 물푸레나무처럼 키가 크지는 못해서 허우대를 두고 시비할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풀이고 나무고 남의 뿌리에 제 발 걸고 자빠트려서 남을 못 살게 구는 한편 제 가지만 살찌우는 가시나무나 칡넝쿨은 안된다고 제법 흥분했더랬다.
아내의 찬성은 내 감정이나 내 반대와는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완강했던 건 아내 때문일 수도, 아내가 늘어놓던 찬성의 변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고...
우리 아파트 옆 칸에 세리(稅吏)하나 제 식구 데불고 살았더랬다. 요즘 세상에 이웃의 직업이 소도둑인지 백정인지 눈치챌 일은 없지만 그나마 우리가 알게된 것은 사내가 어느날 비리에 연루돼 직장을 잃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처음 아내는 소문 듣고와서는 깨소금이라도 빻아대는 듯 여간 고소해마지 않았더랬다. 그럼 그렇지 어쩌구, 사필귀정을 다 들먹이면서...... 사내는 부정한 돈 삼백만 원을 꿀꺽 했다가 들통이 났다고 했다. 그때 사실 나로서는 그게 좀 이상하기는 했다. 그 까짓 액수라면 다 큰 아이들이 동전 한 잎을 갖고 놀다가 어쩌다 목구멍에 삼킨 것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사정이 아니었다. 밖에서 아내가 하루하루 소문을 물고 들어오면서는 서로의 생각이 영판 달라지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자 하니 과연 그랬다. 사내는 불과 삼백만 원으로 해고된 게 아니었다. 문제가 커지면 그나마 축적해 둔 재산이 다 드러날 테니 그만 시작하는 편이 낫겠다고 제 직장 주변의 동료들이 편을 들어 권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설마 했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사내가 다른 직장 하나 얻어보려고 초췌하게 이곳저곳을 배회하겠지,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내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시내 중심가에 시가 15억원 짜리라는 어마어마한 건물을 사들이고 주인으로 들어앉았던 것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윗대에서 물려 받은 재산이라고는 이쪽의 불알 두 쪽과 저쪽의 째진 살가죽밭 한 뙈기 뿐이었다는데 세리 이십여 년을 통해 장만하고 숨겨둔 적잖은 부동산은 여전히 손도 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도둑질을 했다는거야?”
사내가 이사를 갔다는 날, 나는 화가 나서 아내에게 물었었다. 그들은 자기 재산을 숨기기 위해서 한 곳에서는 일년 이상 살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운을 뗀 아내가 그때 말했었다.
“그러니 당신도진작 그런 곳의 수위라도 들어갈 것이지.”
“뭐야?”
“뭐긴 뭐예요. 오늘 당장 저녁 뉴스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요즘 과연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미꾸라지 몇 마리가 방죽을 흐리는 법이야.“
“웃기고 있네. 흐려진 방죽이 더 살기가 좋다면 미꾸라지 아닌 것도 자랑을 못하는 법이예요. 아 그리고 너나 나나 서로 미꾸라지가 못 돼서 한이랍디다. 요즘 세상에 미꾸라지가 용 될라고 애쓰는 줄 아시오? 하늘에서 용이 서로 내려다보고 돈 있는 미꾸라지 될라고 용썼으면 썼지.”
“에라, 니미럴!”
그랬다. 그러던 차에 누이동생이 그 녀석하고 맞선을 봤던 것이다.
“어머 아가씨 두 눈 딱 감고 물어버리세요.”
“뭘 물어.....!”
“당신은 괜히 쌍지팡이 들고 나설 생각 말아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서 도둑이 다 부러운 거야?”
“아니 도둑이라니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럼 도대체 도둑이 아닌 사람을 한번 들어보세요. 수긍이 가면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나는 솔직히 할 말을 잃었더랬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절대 안된다고 쇠못을 박기만 했었다. 집안에 도둑을 들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고 마찬가짏 그 소굴에 집안 식구를 내몰 수도 없다는 알량한 윤리의식이 아직 내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한번 하룻동안의 뉴스를 꼼꼼히 살펴보라고 했던 날,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해본 적이있다. 사실이 그랬다. 그날 하루에 전해진 세상 소식만으로도 나는 아내의 얘기가 충분히 옳았음을 실감했다. 한강에서 잡아올린 오염된 물고기가 매운탕 비으로 팔려갔다는 소식. 장관 부인이 라는 여자가 무슨 무슨 협회로부터 돈을 처먹고 구속됐으며 같이 나눠먹은 국회의원은 합법적이라서 괜찮게 풀렸다는 소식, 불우 이웃을 돕겠다고 하더니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소식, 또 어떤 사기꾼들은 중국 연변의 동포들을 산대로 돈을 받고 결혼 사기며 취업 사기 등의 행각을 벌여 조선족 사회가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다는 소식, 그렇게 해서 중국 북경을 비롯한 대도시 매춘부의 40%가 조선족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소식 등등.
그러니 한편 생각하면 그렇다. 만약 우리 아파트 옆 탄에 살던 사내나 인천 어딘가 에서 마구 처먹다가 들킨 작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녀석도 실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면, 혼수품 좀 마련해준 대가로 내게도 훗날 아파트 한 개쯤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조금만 미뤄 짐작을 해볼작시면 내게도 정작 그런 일이 일가붙이 하나쯤 생긴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 국민들의 피를 쥐어짠 이른바 혈세(血稅)가 됐든 말든, 녀석은 아무래도 뒤가 구릴 테니까 이리저리 그 돈을 위장 분산하려고 할 것이다. 아내 말처럼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나섰는데 뭐. 그때 까짓 거, 모른 체하고 나도 슬쩍 받아둬?
듣자니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아직 내 누이에게 관심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동생을 사랑해 준다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도...... 에라 니미럴. 그 뒤야 뉘 알랴. 더질더질.
이병천 / 소설가 전북 완주에서 출생, 전주고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이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창작집으로「사냥」,「모래내 모래톱」,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저기 저 까마귀떼」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