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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세기말의 모든 것을 기록한 이미지의 순례자 잉겔로 폴리즈의〈율지시즈의 시선〉
글·유지나 영화평론가·동국대교수 (2004-02-12 13:05:17)
영상시대라고 하는 요즘 이미지는 모두가 창조하고 모두가 소비하는 일상적인 것이 돼 버렸다. 그리하여 본래 움직이는 이미지에서 시작된 영화에는 온갖 이미지 조작자들이 모여들어 이미지 게임판을 만들어 낸다. 옛 이미지를 정의의 이름으로 도용하는 이, 여성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훌터내는 이미지를 에로티시즘이란 별명으로 사용하는 이들. 이제 영화는 이미지 사낭꾼들의 집합소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오락에서 농담으로까지 변형되는 세기말 영화에서 고집스레 이미지의 숭고함, 이미지의 본질을 관조하는 소수의 영화작가를 만나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한국 극장가에 늘 한발 뒤늦게 소개되는 공통된 기록을 갖고 우리에게 뒤늦게 발견된다. 타르코프스키, 키에슬롭스키, 키아로스타미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의 테오 앙겔로플로스...... 〈안개 속의 풍경〉(1989)에 이어 소개되는 앙겔로플로스의〈율리시즈의 시선〉(1994)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지 찾기로 영화를 밀고 나간다. 여러 민족이 평화롭게 살았던 시절, 영화가 발명되었던 세기초, 세기초의 모든 것(혁명, 축제, 사람들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한 그리스 최초의 필름, 마나키아 형제의 현상 안된 세 개의 릴을 찾기 위해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던 영화감독(하비 카이텔)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제 관객은 영화감독과 시선을 따라 그가 보는 혹은 그가 상상하는 이미지의 마력에 끌려 들어갈 차례다. 푸른빛 바다에 푸른 돛배가 떠다니는 몽환적인 이미지는 사라진 세 개의 릴 과 겹쳐지고, 폐쇄적인 그리스의 작은 도시에서 과거 사랑했던 여인의 이미지는 시위 진압대의 행진 속에 묻혀진다. 사라진 세 개의 릴을 찾아 떠난 감독의 여정은 알바니아 국경으로 이어진다. 눈밭에 서있는 배낭을 맨 가련한 군상들의 모습은, 과거의 영화에 눌려 죽어가는 그리스가 빨리 죽으면 좋겠다고 엄살을 부리는 텍시 기사의 외침과 공명한다. 세 개의 릴이 거쳐간 영상자료원들을 따라가는 감독의 여정이 지속될수록 “처음부터 이세개의 릴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강하게 일어난다. 그건 마치〈안개 속의 풍경〉에서 “어린 남매가 찾는 아버지란 애초부터 현실적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혹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무너진 그리스 신전들의 돌조각을 플라로이드로 찍었을 때 아무런 이미지도 찍혀지지 않은 영화감독의 블랙홀 이미지의 경험 자체는 이미 이 불가능한 여정을 함축한다. 그렇다. 본질적인 것은 목표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목표를 찾아가는 시지스프적인 여정이고. 그건 우리 삶의 방식고 동형태이다. 단지 엥겔플로스는 그 여정 속에 아름답고 슬픈 이미지, 그런 비장미속에서 (관객/감독)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놀라운 힘을 가진 이미지들을 창조해내는 이미지 연금술사이다. 그리하여 영화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시선은 과거와 현재, 이 곳과 저 곳을 봉합해 내는 틈속을 파고 들어간다. 서양문명들의 대들보인 신들의 나라 그리스, 여러 민족이 평화롭게 살았던 발칸 반도, 사랑하는 여인과 지냈던 과거, 그 곳이 한쪽에 망령처럼 버티고 서 있다면, 여러 민족의 침략과 반목과 전쟁, 군사독재와 압제, 레닌의 거대한 동상을 잘라내 배로 옮기는 또 다른 풍경이 다른 한 쪽에 있다. 감독 주변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과거 연인에서 영상자료원 여직원으로, 다시 보스니아내전으로 가족을 잃은 여인에서 다시 사라예보의 여인으로)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 이 쪽과 저 쪽을 통과하며 끔찍한 변화 속에서도 하나로 살아남아 있어야 할 어떤 것(영화 이미지의 본질 혹은 삶의 본질)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여러 도시, 여러 영상자료원, 여러 개의 강을 거쳐 보스니아 내전 중인 사라예보에 도착한 영화감독은 세 개의 릴을 현상한 노인을 만난다. 이제 목표는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있다, 때 맞춰 짙은 안개로 전쟁이 일시 중단되고 이동 악대가 평화의 월츠곡을 연주한다. 근거 없는 민족적 증오로 총을 겨눴던 여러 민족이 오랜만에 안개속에서 춤을 춘다. 마침내 세 개의 릴을 찾게 된 감독은 성취의 기쁨에 겨워 필름을 복원한 노인의 딸과 춤을 춘다. 생명을 걸고 사라예보까지 찾아온 감독의 울부짖음은 블랙홀에 빠진 이미지, 만신창이가 된 세기말 인간 증오의 역사를 목격한다. 그건 세기초 모든 것을 기록한 마나키스 형제의 최초의 필름처럼 세기말의 모든 것을 기록한 셈이다. 그 동안 우리가 뉴스와 시사시진을 통해 본 수많은 보스니아 참상에 관한 양적으로 풍요한 이미지들은 앙겔로폴리스가 복원한 이미지들과 질적으로 대항하지 못한다. 뉴스 이미지들이 보스니아를 세상 저쪽의 것으로 나와 무관하게 배열된 것이라면, 앙겔로폴리스의 보스니아 이미지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파리 7대학에서 영화기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편역서로「페미니즘/영화/여성」,「시나리오란 무엇인가」,「영상기호학」등을 펴냈으며, 대표적인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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