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 | [시]
깊은 밤 선운사 山門을 지나
이영진
(2004-02-12 13:04:02)
Ⅰ. 도솔암
산을 마주보고 걸어간다. 즐거운 건지, 슬픈 건지 가물가물 스님 하나 산 뒤로 사라진다. 이 길(道) 위에 서면 어느덧 흐르는 물소리가 밝고, 수면세 산 그림자를 담고 가는 아, 고요한 정오. 나는 쉬 다치지도, 시들지도 않던 이름들을 가만히 불러 본다. 그들은 어디로도 사라진 적 없고, 무한한 생을 나는, 그들과 함께 어둠속에서 어둠속으로 떠나고 되돌아올 뿐, 山과 山 사이를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나는 산을 마주보고 간다. 이 산모퉁이를 지나면 나는 이제 무엇도 기다리지 않는다.
Ⅱ. 석상암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 길, 산새들도 밤이면 잠이 드는 줄 새삼 새삼 깨달아 가며, 어둠 속을 홀로 걷다 보면 어느덧 가슴에 등불 하나 켜져, 지나온 길들이 문득 따뜻해 진다. 이제 쉽사리 동백꽃 피리란 희망에 기대지 않아도 이 산길 무심히 걸어갈 수 있으므로 끝나지 않는 먼 길도 멀지는 않다. 이 구비 돌아서면 저 깊은 어둠 속에 庵子 하나 머물러 그저 讀經으로 한 생을 쉬어 갈 수 있을까.
Ⅲ. 참당암
고개들어 보면 어둔 미루나무 꼭대기 온통 별밭이었네, 별자리들이 훨씬 北쪽을 향해 기울어진 산등성이, 바다를 넘어 노는 바람에 숲속에선 파도 소리 들리고 낭자에 흰머리 가르마가 고운 늙은 보살의 물같은 눈 빛 떠오른다. 아무도 거쳐가지 않는 그 눈 빛 속에서 나는 새롭게 내 이름을 짓고, 그네는 흰 보세기에 붉은 홍시 하나 말없이 건넨다. 아, 주책없는 사랑이여. 너는 어느적 하늘 밑, 검은 귀밑머리였느냐.
이영진 / 1956년 전남 장성 출생. 76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81년〈5월시〉동인을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자유실천문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시집 「6.25와 참외씨」,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