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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 | [서평]
‘쓰메끼리’에 담긴 말의 사대주의 박숙희 『반드시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한울림 1996
글·이태영 전북대 교수·국문과 (2004-02-12 13:03:35)
“오다가 보니까 구루마에서 오뎅을 팔고 있더라.” “아가, 쓰메끼리 못 보았냐?” 어려서 어머니가 쓰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던 필자는 ‘구루마’가 일본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삿짐을 나르기 위해서 남문에 구루마를 대놓고 손님을 기다리시던 ‘구루마꾼’아저씨가 떠오른다. 차가 드문 시절이라서 멀리서도 이 아저씨를 모시러 와야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구루마’가 없어졌지만 우리는 이 일본말을 우리말로 알고 있었다. '손수레‘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말에는 ‘쓰메끼리’라는 말도 있었다. 어린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스메끼리’를 가지고 손톱을 자르곤 했다. 언제부턴가 국어순화를 한다고 하더니 이것이 ‘손톱깎기’로 쓰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매우 어색해서 이것이 순화가 되겠느냐 싶었는데 이제는 ‘손톱깎기’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다. 일제시대를 사셨던 우리 어머니가 쓰시던 말에 일본말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역사적 산물이다. 필자는 아주 많은 일본말을 우리말로 알고 배우고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는 말들이 있다. ‘구슬치기’를 할 때, 그 구슬을 ‘다마’라고 했고, ‘백열전구’를 지금도 ‘전기다마’라 하고, ‘알사탕’을 ‘다마사탕’이라고 한다. 필자도 모르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기이한 것은, 이러한 일본말이 우리말 속에 깊이 들어와서, 이제는 이 말이 일본말인지 우리말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는데도, 학교에 다니면서 이러한 현상을 별로 배운 적이 없고, 가슴아프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사회 생활에서 보면 일본말을 섞어서 하는 것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구장에서, 건축 현장에서, 공무원의 공문에서, 심지어 음식점에서도 수많은 일본말이 쓰이고 있다. 차가 대중화된 이 시대에 차량에 대한 일본어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쪽에다 시네루를 주고 쳐봐.” “아주머니 여기 사라 하나 갖다 줘요.” “아저씨 여기 시아시된 술 두 병만 주세요.” 일제가 우리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우리말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던 일본인들의 말을 이제 우리가 매우 자연스럽게, 그것도 아주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살았을까? 우리는 진정 일제 치하 36년간의 역사를 잊었는가? 오르고 쓰는 일본말이 있다면 가르쳐서 알려주고, 알았으면 고쳐서 우리말을 쓰는 것이 단일 민족으로서 오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사대주의’에 빠져 얼마나 한문을 숭상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오늘날에도 자본주의의 ‘사대주의’에 심취되어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추억이 깃들인 우리말은 내팽개치고, 저 먼 나라에서 쓰는 일본말과 미국말을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마구잡이로 수용해서 쓰고 있는 배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떤 말이 일본말이고 어떤 말이 우리말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 이 때,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를 박은 일본말을 소개하면서 반드시 고쳐서 써야 한다고 부르짖는 책이 나와서 소개하고자 한다. 박숙희 선생이 지은 『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이란 책은 그간 문체부나 국립 언어 연구원에서 나왔던 책과는 달리 일본말을 하나씩 풀어서 독자가 알기 쉽게 해설해 놓고, 또 우리말로 예를 달아서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말을 보면 평소에 우리말로 알고 쓰는 일본말이 아주 많이 나온다. 모두271개의 단어를 순일본어, 일본식 한자어, 일본식 외래어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무데뽀, 앗싸리, 뗑강, 나래비, 나가리, 아다리’ 등 순일본어와, ‘견양(見樣), 견적(見積), 노임(勞賃)’ 등 일본식 한자어, 그리고 ‘난닝구, 뎀뿌라, 돈까스’ 등 일본식 외래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앞으로 이 책처럼 우리말 속에 깊이 퍼져 있는 일본말을 찾아내어 우리말로 순화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박숙희 선생이 계속 이러한 작업을 해 주시리라 믿는다. 박숙희 선생을 들어가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하고 있다.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데,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있는 비속어 위주의 일본어나, 한자로는 그 뜻을 가늠하기 힘든 일본식 한자어, 원어 발음과는 동떨어지고 마구 줄여쓰는 일본식 외래어는 건강한 우리말과 생각을 해치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문화 가운데에서 말의 문화는 가장 중요하다.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인간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썼던 일본말을 우리 자식들이 따라서 하게 되면 더 이상 고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어떤 분들은 한 번 굳어진 말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구루마’를 ‘손수레’로, ‘쓰메끼리’를 ‘손톱깎기’로, ‘사시미’를 ‘생선회’로, ‘야끼만두’를 ‘군만두’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일본말을 쓸 때는 특정 계층에 있는 사람만이 쓰던 말이 되지만, 우리말로 쓰면 오히려 알아듣기에 훨씬 쉽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쓸 수 있는 말이 되는 셈이다. 말이란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오늘날은 정보매체가 잘 발달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청소년들이 일본 문화에 차츰 젖고 있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일본을 닮아가고 유행하는 놀이도 일본을 닮아 가는데, 이제 말까지도 일본어를 쓰게 된다면 그 때는 또 다시 문화의 식민지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면 또 모르겠지만 우리말이 있는데도 구태여 일본말을 쓴다면 그게 과연 자랑스럽고 옳은 일인가? 이태영 / 전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국어문법을 전공했다. 역사와 방언에 대한 관심이 많고 특히 전북의 방언에 대한 연구업적을 내놓은 적이 있다. 황량한 거리에 울리는 가벼운 블루스 신현림 시집.「세기말 블루스」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6 글·정철성 문화저널 편집위원·전북대강사·영문학과 당신은 파란 리본을 본 적이 있는가? 여기 파란 리본이 있다. 이것은 검열에 반대한다는 표시로 가상공간에 걸린 리본들과 같은 종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미성년자라면, 성인일지라도 성적인 주제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흥미없는 사람이라면, 즉시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란다. 신현림의 시집을 소개하면서 가당치 않게 연막을 치고 시작하는 것은 그(녀)의 시가성의 주제를 대담하게 언급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속표지에 시인의 얼굴이 실리는 것이야 거의 관행으로 굳어진 일이지만, 시인 자신의 거의 전라에 가까운 누드가 실린 시집이란 발가벗은 이 시대에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쓸데없는 호기심과 기대로 책장을 넘긴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시집에서 그것을 보고 싶다는 말인가? 여하튼『세기말 블루스』는 도발적인 몸짓으로 시선을 끈다. 신현림이누구야, 아 그이 딸이야, 이런 말이 심심치않게 나올 만큼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르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기말 블루스』는 자극적 언사로 거리낌없이 성적인 이미지들을 쏟아낸다. 영화, 비디오, 티비, 재즈, 블루스를 배경삼아 “빨랫줄에 간신히 매달린 흰 치마같은/ 금욕의 처절함을 해제하고/ 이글이글한 정사를” 꿈꾸는 섹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욕망은 불가능을 꿈꾼다. 불가능을 꿈꾸는 욕망은 가속도에 비례하여 배가하는 중력의 억압을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아래로 끌어당기고 위에서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한다. 신현림의 시가 마약과 섹스를 함께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감각의 성감대를 찌르고 핥고 부드럽게 매만지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매혹적인 영화”일 뿐이다. 시인의 경험 부족인지 전도된 상황의 의도적인 배열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순서가 뒤바뀐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기껏해야 상상의 산물일 뿐이며, 불손할지언정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자극적인 도발이 그리 두렵지 않은 또다른 이유를 가벼움에서 찾을 수 있다. 신현림이 언급하는 대중문화의 요소들이 가볍다는 느낌의 근원은 아니다. 가벼움은 예컨대 “열린 의식, 열린 세상, 열린 대문, 열린 지퍼/ 시도 때도 없이 지퍼는 닫아주게”와 같은 구정에서 나온다. 여기서 의식, 세상, 대문, 지퍼로 이어지는 연상은 직관이나 통찰의 소산이라기보다 재치있는 말장난의 결과일 뿐이다. 시인이 스스로를 평가하여 말한 “성급함의 결정”은 그의 시집을 관통하는 흐름을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인의 책무라고 일컬어졌던 진지한 고뇌를 대신하여 신현림은 “겨울엔 기쁨이너를 원하므로/ 비누처럼 거품을 물고 즐거워하라”는 쉬운 충고를 던진다. 가벼움을 보상하는 방법은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신현림의 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구어체의 여담처럼 흘러간다. 언어의 구사가 그러하듯이 과거를 회상하는 시각도 거칠 것이 없다. “의리를 따라 여당이 되신”아버지의 고민이 “돈은 번만큼 몸과 마음은 부서진다”는 한마디로 해소된다. 사실 이 문장은 통사구조도 불분명하여 정확한 뜻을 파악할 수 없다. “독신생활은 때론 향기로우나 처절해서 교도소가 따로 없더라”는 독백도, 마찬가지로 감동의문지방에서 헛발을 디디며 넘어진다. 속도를 구가하는 신현림이 “팔십년대의 그림자가 파걸레처럼 뒹굴고/ 투사의 외로운 운동화가 쓰러진 곳에/ 우르르 삐삐와 쇼핑백을 든 이들이 몰려갔다”고 자조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것은 신현림이 종말론을 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십년대와 “가벼움의 허무”사이에서 배회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심한 말을 껌 씹듯 쉽게 해서” 점잖은 귀에는 다소 요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허무주의다/ 구부러진 못 같은 시든 좆 같은 너의 체념이다”라고 세기말의 블루스를 부를 때 시인은 세상을 향하여 손을 내민다. 당신은 이 손을 어떻게 처리할 작정인가? 그의시선은 시집의 말미에 실린 시「자화상」과 파스텔화가 보여주듯이 창밖의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외롭고 황량한 이별의 거리에서 사대를 만나 아이를 갖기를 소망한다. 신현림의 시가 모성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지만 그 중 가장 서정적인 구절을 찾으려면 ‘종말의 두려움, 재생을 위한 상상’이라는 부제가 붙은「너를 위해 죽어도 좋아」를 읽는 것이 좋다. 이런 곳에서도 여인들은 아이를 낳아 강물에 씻고 스모그가 꺼지도록 하늘을 보며 기뻐하는 것이 신기해 자조 뒤에 묻어나는 감탄은 신현림의 시가 산업사회와 남성문화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지생에 대한 경외심을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애정을 기울이는 또 하나의 대상은 예술이다. 그의 관심은 시와 시각적인 작업, 다시 말해 미술의 두 분야에 걸쳐 있고, 이 시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두 분야가 어떻게 간섭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선 접어두자. 우리는 “잠옷처럼 편안 바람이 불면/ 그 날 만큼은 TV를 끄고 시를 읽어”달라는 그의 간청에서 허무를 가로질러 건너가는 예술이라는 외나무다리를 볼 수 있다. ‘세기말 블루스’라는 말을 듣고 보니 20세기가 정말 저물어가고 있다. 시간의 마디라는 것이 인위적이어서 마디의 앞과 뒤를 달리 보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건만 천년의 단위가 바뀐다는데 그저 무덤덤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묘한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 더러는 세기말적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에게 세기말은 오래 전부터 진부한 냄새를 열어놓은 문민시대보다 더 미지근하다. 게다가 블루스라니! 블루스의 쥐어짜는 가락이 우리들의 세기말에 울려야 할 나팔소리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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