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35
사실주의에 빠지지 않은 사실 화가
서양화가 김현철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미술교육학과
(2004-02-12 13:02:13)
근대 이후 전북 지역의 신미술을 이끌어왔던 인물들은 그 수가 적지않다. 다만 세월의 풍상 속에서 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었고 또한 작가들도 제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떠나간 인물들 또한 많았다. 이러한 많은 인물들속에서 비교적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지녔던 인물들 중에 표현주의적 경향의 진환이 있었다면, 인상주의의 화풍을 배경으로 했던 김현철을 들 수 있다. 그 만큼 김현철은 인상주의의 작품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업속에서 독자적 표현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작가였다.
근대 초기 한국 화단의 전반적인 흐름은 인상주의, 특히 서구의 후기 인상주의 경향에 밀착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출발은 일본으로부터 신미술 도입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이 지역의 신미술 도입기에 앞장섰던 이순재나 김영창 등과 같은 인물들이 일본으로부터 인상주의 경향의 화풍을 받아들이고, 또한 전북 화단에 보급한 일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현철이 이들 선배 화가들을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 수업에 젖어든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진환과 같은 진보적인 표현파가 있었으며, 또한 추상주의의 화풍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진보적 화풍을 수용하기에는 신미술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너무 엷었다. 특히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보수적 성향이 두드러진 전북의 상황은 진보적인 미술을 도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역적 풍토에서 자란 김현철은 어쩌면 가장 지역적인 미술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만큼 그는 지역적 풍토성을 일구어 낸 화가였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작업을 했다는 평가보다는 기존의 화풍을 가장 깊게 수용하고 삭혀낸 작가라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김현철은 1924년에 부안에서 나서 서울로 유학했다. 서울에서 경복고교를 마치고 다시 전주에 내려와 전주사범을 다녔다. 그가 언제부터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그림에 눈을 뜬 것 같다. 전부사범학교는 1937년에 설립된 당시에 가장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던 학교였다. 그리고 김현철은 여기에서 일본인 미술 선생이었던 우라자와를 만났다. 우라자와는 일본에서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던 인재였는데 전주사범에서 많은 인물들을 길러 냈다. 그리고 전주사범을 다니면서 그림 활동을 하던 김현철은 1946년 서울대학에 미술학과가 창설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서울미대에서 유화를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곧바로 냑향하여 평생을 통해 교직과 작업에 열중했다. 그의 32년간의 교직생활은 이리, 전주 등을 옮겨다니며 이루러졌는데, 그러면서도 작업만은 꾸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무렵 그의 활동은 1947년 대한미협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이래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문교부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입선한다. 이 무렵은 그가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으며 서울미대에서 수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낙향하였던 것이 끝내 고향에 몸담에 된 계기가 된다. 그가 이렇듯 전쟁의 와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꾸준한 열정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1952년 그의 첫 개인전에서 확인된다. 당시 전시장이 없던 상황이어서 주로 미국공보원의 낡은 콘서트 막사를 이용했는데 그의 개인전이 이 곳에서 마련되었다. 지금 그 당시의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아카데믹한 인상주의 화풍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개인전은 1958년 군산비둘기 다방으로 이어지고 1967년, 1974년으로 계속되며 지속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간의 열악한 지역미술계의 입장을 감안하면 그의 활동은 지속적이며 열성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분만 아니라 그의 활동은 1954년에 창립됩 신상회의 창립회원으로서 보여준 활동에서도 읽혀진다. 역시 미국공보원 건물에서 창립전을 가졌던 신상미술회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동인 활동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창립 멤버로 가입하고 있음은 이 때 이미 한사람의 작가로서 탄탄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비슷한 연배들이 일본 유학을 다녀왔거나 혹은 김영창과 박병수가 주도했던 동광미술연구회의 출신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김현철은 전주사범을 더녔으면서도 이들과는 다소 그 활동 범위가 달랐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김현철의 행로는 오히려 작품의 성격에서 훨씬 강조된다. 그만큼 그는 동세대들과 같은 경향을 걷고 있음에도 개인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작가였다.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앞서 여러 가지 개인전이나 그룹전 등의 작품발표외에도 한국미협 전북지부장을 맡기도 했고 여러해 동안 전북도전에서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하는 등 활발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김현철의 작품은 대부분 풍경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물 등과 같은 소재도 그의 작품 세계를 읽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느끼다 보면 그가 얼마나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깊이있게 다가가고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그의 작품은 앞서 지적한대로 인상주의를 기초로 한 사실적 화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수업기에 여느 화가들처럼 당시에 유행했던 인상주의 특히 후기 인상주의화풍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풍경에서보다는 정물 등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주변 산천을 매우 친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리고 독특한 우리 자연풍토에 대해 깊이 있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풍경들은 주변의 평범한 들이나 야산들과 함께 바다 풍경 그리고 사생을 했음직한 소문난 풍광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풍경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여지없이 자신의 묘법과 회화적 감수성으로 소화하여 독특한 풍경으로 자기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년에 다가오면서 이러한 대상의 자기화는 한층 더 깊이를 더해 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대상을 순수하게 화면에 나타내는 그다운 묘법을 얘기한다면 어김없이 칼로 화면을 넓게 혹은 가느다란 선묘처럼 긁어내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이러한 칼자국은 암벽에서는 바위의 주름을 설명하기도 하고 숲이나 야산에서는 나무줄기가 되고 풀잎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가 즐거 그린 들녘이나 숲 같은 소재에서는 더욱 두드러져 붓의 텃치보다는 더욱 화면을 압도하여 가장 중요한 그의 회화적 특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자국은 마치 수묵화의 묘필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분방하고도 활발한 손놀림에서 생동감을 자아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전통 회화가 가지고 있는 선묘의 특징을 유화에서 살려 내려 노력하였던 것 같다. 김현철이 전통 회화의 맛과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유화를 통해 그 정신을 이루어내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은 그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유화의 질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엷다. 매우 엷게 바르며 투명하게 빚어내려고 노력하였다. 끈적끈적하여 두껍게 바르는 유화가 아니었다. 마치 캔버스 천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애쓴 듯이 보인다. 수묵화가 화선지의 질감을 살려 내는 것과 일치한다. 그가 얼마나 상식적인 유화의 기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는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파도」라는 작품을 보면 바닷가 바위나 파도는 두께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부피를 가지고 있으나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은 마치 수채화처럼 혹은 수묵화의 선열 기법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대상을 찾아내려 고심했던 작가였음을 읽어내게 한다. 그는 인상파 화풍에서 출발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한 사실화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사실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실에 바탕을 깔고 유화를 한국화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고 보아야 되지 않을까? 그는 분명 상식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전북 화단에서 개성을 창출해 낸 뚜렷한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