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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 | [사람과사람]
당당한 여성으로, 자랑스런 농민으로 전북여성농민회 부회장 박찬숙씨
글·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12 13:01:41)
‘...작년에 우리 고추 심어서/육십만 원을 손에 쥐었지/댓 마지기 농사 이것도 농사라고/우리 식구 모두가 매달려/새참 때 막걸리 한 사발의 목마름도/해결치 못하면서/그렇다/우리의 노동은 이제/돈이 되지 못한다.’ 농사꾼 박형진의 시 「우리의 노동은 돈이 되지 못한다」는 이렇게 끝난다. 어디 ‘돈이 되지 못할’ 뿐이겠는가. ‘농사꾼들은 사람도 되지 못한다’는 처참한 시도 곧 나올지 모른다. 이 시대가 그렇다. 21세기의 신한국은 말한다. ‘농사는 이제 사람이 할 일이 못된다.’라고. 지난 늦여름부터 근 한달여를 여성농민들의 노래가락에 사로잡혀 지냈다. 언제부턴가 칼바람 나는 노래들을 귀설어하기 시작했던 나는 ‘우리를 농민이라 불러다오’라는 노랫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여름 내내 여성농민들이 직접 노래하고 땀흘려 만들어 낸 노래집〈청보리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청보리 사랑〉은 뜨거운 노래였다. 그 속에 다섯곡의 노래와 노랫말을 직접 지은 박찬숙씨가 있었다. “같은 편인가 보지요.”〈청보리 사랑〉을 들으면서 많이 힘을 얻었다는 내게 올해 나이서른 일곱의 박찬숙씨가 밝게 웃었다. “힘들어도...좋아요 농사짓는 일이 즐겁고 또 바쁠땐 한창 바쁘지만 농사일엔 자율권이 있으니까. 직업으로서도 만족스럽고 여유가 있어요.” 처음〈청보리 사랑〉을 만든 여섯명의 여성농민들을 만났을 때 들었던 ‘찬숙 언니’는 재능있는 남다른 농사꾼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화여대 78학번이고 80년대 초에농촌에 투신해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여성농민회 총연맹의 조직위원장이자 전북여농의 부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어쩌면 한국의 수산티쯤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와 첫 번째 통화를 하고 나서 그 곱고 강단진 목소리에 나는 ‘역시’ 하며 무릎을 쳤다. 그러나 마침내 가을 들판과 산길을 달려 순창군 인계면 금판리에 자리잡은 혁명가의 고택(?)에 들어섰을 때, 아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 자리에는 혁명가가 아니고 그냥 ‘찬숙 언니’가 있었다. ‘대학때 농활 준비하면서 선배들이 어찌나 찬숙선배, 찬숙선배 해서 막상 들어와 보면 선배는 없고 웬 촌놈 아줌마들만 있더라’ 는〈청보리 사랑〉의 노래단 단장 윤애경씨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농사꾼 한 사람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그곳에 서 있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어서인가. 얼굴엔 웃음이 배어있고 나이보다는 훨씬 어려보이는, 정말 언니 같은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농경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험난한 고비를 넘어가는 이 때, 이 경쟁력 없는 여성농민은 농사일에 그렇게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다른 78학번들이 그랬듯이 그도 어정쩡하게 대학시절을 보냈다. 워낙 내성적이고 남들앞에 서면 아무 것도 못하고 눈물 핑돌던 그런 성격을 고쳐보자고 탈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탈을 쓰니까 사람들 앞에서 조금씩 자신감도 생기고 내성적인 성격도 많이 극복됐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직도 다르지 않단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전공인 교육심리학보다는 문화운동 쪽에서 진로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문화운동의 현장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에게도 남아서 문화운동의 마당을 만들것이냐 현장으로 갈 것이냐는 고민이 남았다. 그는 별다른 망설임없이 농촌으로 길을 잡았다. 이유는 확실치 않았다. “농촌에서 문화운동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거의 없었고, 오로지 농사 잘 짓고 기반잡고 잘 살아보자”고 생각했다는 그의 농사내력을 들으면서 그의 선택은 거의 본능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저면 그는 태생적으로 농사꾼의 기질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으로 들어오기 위해 일년 여를 준비하면서 그는 비로소 ‘적당한’ 남자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난 한 살 연하의 남편 이선형씨와 83년 여름 이곳 순창으로 내려왔다. 물론 양쪽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갈길이 먼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듯 그가 담담하게 웃는다. 나는 안다. 지금은 담담하게 웃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는 지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시종 담담하게 웃기만 한다. 자기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유로움이 그에게 있다. 그가 애써 가꾸어온 그의 해방이 나는 부럽다. 그러나 시작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곳 마을에 정착하자 동네에 의견이 분분했다. 다들 떠나가는 마당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두 젊은이가 농사일이 뭔지도 모르고 산골마을에 나타났으니 시끌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렵게 올린 결혼식 사진을 지금까지도 대문짝만하게 걸어 두고 있다. 일종의 시위인 셈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농사일에 매달렸다. 농사일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그가 오로지 목표로 삼았던 것은 농사꾼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고추를 어떻게 하면 빨리 잘 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밭을 잘 맬 수 있을까 그래서 이웃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렇게 스스로 농민이 되고 허심탄회하게 교류하지 않고서는 그 이상 한 단계 나간 뭔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가 체득한 원칙이었다. 농사일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대학시절 농활 때 뙤약볕 아래 잠시만 서있어도 현기증이 나고 그렇게 힘들었던 농사일이 그에게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여기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서였나 봐요.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물론 힘은 들었지요. 농활때는 분명히 언제 점심때가 오나, 언제 해가 지나 이랬는데 여기가 내 인생터전이다 했을 때 그게 그렇게 달라지더라구요.” 농사가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생산이, 군더더기말 붙이지 않고 씨 뿌리고 가꾸어주면 나오는 생산의 단순한 기쁨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일하다 덥고 지쳐서 쉬고 싶을 때, 그늘에 가서 맹물 한잔이라도 마시면서 한숨 돌릴 때 책으로 읽었던 땀과 노동의 의미가 정말 맞아떨어지는구나 생각했어요.” 자신의 생산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대가가 주어지느냐 마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렇게 말할 때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뜨거운 태양도 숨막히는 더위도 두렵지 않다/모두 내가 거쳐야 할 삶의 통로다’ 그가 노랫말과 곡을 붙인 ‘나의 사랑 밀과 보리’는 그 단순한 깨달음 속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시절부터 만들고 싶어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노래들이, 그가 ‘사래긴 콩밭에서 종일토록 호미질’을 하다가 그 느낌 그대로 만들어낸 노래들이 이번〈청보리 사랑〉에서 다섯 곡이나 선택된 것이다. 생산의 단순한 기쁨 속에서 변화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길게 가면 3-4년밖에 못이기고나올 것이라는 시댁과 친정 부모님들이 이제는 이런저런 먹거리도 가져다 드리고, 모두 빚이긴 하지만 땅도 장만하고 집도 그럴싸하게 지었다. 이제는 동네에서도 조금은 말발이 서서 ‘꼬바리 며느리 신세’를 졸업한 것도 그에겐 큰 기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그가 농사꾼의 아내가 아닌 ‘한 사람의 농민’이 된 것이다. 생산의 기쁨과는 별개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그에게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농촌생활 1-2년만의 일이었다. 똑같이 일을 해도 여성의 품삯이 싸고, 같은 농사일에서도 자질구레하고 무수히 손가는 일들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농사꾼의 아내라는 말은 듣지만 농민이라는 말은 평생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도 역시 농사를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림살이하면서, 여성농민들의 삶 속에 자리잡은 고유하고 특별한 어려움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그가 ‘이 봉건’이라고 부른다는 역시 농민운동가인 그의 남편과 싸워가면서 역시 농민운동가인 그의 남편과 싸워가면서 ‘아 선배들이 말하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를 깨닫게 되고 여성농민운동을 시작한 것은 88년의 일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순창군 여성 농민회였고, 이 조직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수정예로 버텨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쪼그만 사업이라도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해서 실천하고 평가해조는 훈련들”을 거듭하면서 여성들은 당당한 여성으로 자랑스런 농민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여성농민운동이 농민운동을 떠나서는 설 수 없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고통의 세월을 버텨내면서도 농민운동은 여전히 건강하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북한방송을 갖다 붙이고 잡자고 덤벼들어도 그들의 운동은 농민들의 애정어린 지지를 받는다.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농부들은 본능적으로 혁명적’이어서 누가 자기편이고 누가 자기들 적인가를 본능적으로 알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이제 틀렸다’는 패배감에 약해지고 있지만,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시인의 말처럼 역사는 잠시 저들을 속일 수 있지만 농민들은 잠시 속는 셈치고 속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농촌에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시위에 한번 모이는 숫자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지만, ‘농업의 위상 자체가 아직도 갈팡질팡 하지만 농업은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지켜가야 한다는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올해 쌀금이 좋아요.” 들녘에 서서 박찬숙씨가 내게 말해준다,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풍년은 아니지만 작년과 제작년에 비해서 볕이 좋았고, 그래서 농사가 이나마 되었고 또 다행히 쌀금도 괜찮단다. 내가 만난 사람은 여맹 조직위원장이라거나 부회장 같은 거한 직함을 가진 운동가가 아니었다. 지금 저 들판에 서 있는 그는 본능적으로 한 시대에 눈 떠가는 여성농민인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땅과 농사가 사람에게 주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청보리 사랑〉에서 시종 소리 높여 불러주는 이 군가풍의 노래들이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천둥같은 함성으로 빼앗긴 것 다시 찾는’ 통일농사꾼의 노래와 지금 저 들녘에 서 있는 한 여성농민의 삶은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본능적이고 자연스럽다. 세상살기가 여간 고단치 않았던 토요일 오후 나는 그를 찾아가면서 어쩌면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타율의 도시 속에서 지치고 힘들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뒤에 공장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생산의 기쁨을 그에게서 들으며 나는 가슴이 설레였다. 생산의 과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산업화된 도시의 사람들이 가져보지 못한 것을 이들은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그들은 경쟁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대적 완충의 역할을 다하고 있구나.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삼십대 중반은 넘어서면서 사람들이 이제 남들 앞에 어떻게 보이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더라구요. 예전엔 내가 자존심으로 살았는데 이제 남들이 내 자존심 지켜주는 것을 더 바라고... 그러지 않으려고 해요.” 이제는 떠날래야 어디 갈곳도 없다는 찬숙 언니의 가을이 그렇게 한창때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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