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 | [문화저널]
백제의 불탑 ①
한국석탑의 시원, 백제탑의 소멸과 부활
백제양식탑의 의미
글·천득염 전남대 교수·건축학과
(2004-02-12 13:01:02)
한국 고대사에서 백제는 극적인 흥망성쇠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라는 말에서 비운의 운명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 백제의 문화는 오늘날 가장 한국적이라는 함축으로 남겨져 있다. 백제의 불탑은 백제 문화사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 백제의 불탑을 이번호부터 전남대 천득염 교수가 하나씩 연재한다. 불탑을 통해서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기대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꾸밀 때에는 반드시 그 안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즉 일차적으로 기능이 충족되면, 이차적으로는 아름다운 꾸밈이 뒤따르며 기능과 아름다움 안에는 무슨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흔적이나 신앙, 삶의 염원 등을 나타내 주는 조형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 조형물에는 그들의 사상과 감정과 애환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담겨져 있다. 특히 정확성, 안전성, 쾌적성을 요구하는 건축적 조형물의 조영에 있어서는 막연한 감각이나 경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고 특별한 조형 기법이나 의장적 작업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上代)건축은 고유의 원시문화(原始文化)와 중국대륙에서 전래된 외래문화를 자연환경과 인문적 여건에 알맞게 융합·동화시켜 특성있는 한국 건축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한국 상대건축의 유구는 대다수가 목조였으리라 생각되며 이러한 목조의 취약성 때문에 수많은 병란(兵亂)과 화재로 인하여 수백 년을 지켜오기가 어려웠던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다행히 현존하는 목조건축에 비하여 더욱 오래되고 많이 남아 있는 건축구조물로서 석탑이 있으니 이는 한국 상대건축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유구로서 가치가높다.
흔히 중구은 전탑의 나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로 특징 지어지듯이 한국은 확실히 석탑이 많으며 그 모양도 다양하고 수법도 다채롭다. 이는 양질의 화강암이 다량으로 채취(採取)될 수 있는 여건 때문에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까지 조사된 탑파는 전국에 1천여 개가 넘으며 그 중 거의 대부분은 석탑이다.
한국의 탑파건축도 초기에는 고층누각식목조건축(高層樓閣式木造建築)이었으나 삼국시대 말인 7세기 초경부터는 풍부한 양질의 화강암을 조탑소재(造塔素材)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 후 한국의 탑파건축은 석탑이 주류를 이루어 가며 ‘석탑의 나라’로 특징지어지듯이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석탑 축의조형이 뛰어나고 현재까지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탑파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인하는 예배 대상물이기 때문에 가람(伽藍)의 중심적 조형물이었고 대부분 가람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한다. 창사(創寺)와 더불어 건립안치(建立安置)된 석탑 건축은 가람 전체가 재해(災害)로 소멸되더라도 최초의 위치에 원래대로 보전되어 있어 상대건축의 조형성을 고찰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가되며 연구가치가 높은 유구라 하겠다.
물론 석탑건축이 불교적 의미로 세워졌고 일반 건축과는 달리 내부에 기능공간이 없다고 하여도 외부로 향하여서 경험되고 인식되는 기념적 조형성과 외부 공간의 구성 요소로서의 존재성은 가장 뚜렷한 한국적 풍토색(風土色-Endermic color)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건축적 조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되고 역사적으로 시대를 달리하면서 변화된 체계를 이루고 있는 탑파건축을 통하여 과거의 실존재(實存在)로서 소멸된 상대 건축문화를 유추하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조형의지와 의장성 및 법칙성을 추구하여 이를 기초로 건축사(建築史)와 미술사(美術史)의 기초적 연구로 삼고 더 나아가 현대적 조형(造形)으로 연맥(連脈)시켜 보려는데 탑파 관련 연구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석탑은 7세기 초 무왕대(武王代)에 백제(百濟)에서 시원적(始原的)으로 발생하였다. 그러나 백제기에 이루어져 현존하는 석탑으로서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정림사지(定林寺址)5층석탑 2기뿐이다. 그 후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 후 통일신라기에는 현재 건립 연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왕궁리 5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을 제외하고는 단 l기의 백제 석탑도 건립되지 않았으며 백제의 옛 영토에서의 신라계탑(新羅系塔) 의 건립도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
그러나 후삼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거쳐 고려가 다시 통일을 이루자 백제의 고토(故土)에서는 정림사지 5층석탑을 기본형으로 하여 이를 충실히 모방한 석탑들이 나타났다, 이는 300년 가까이 백제의 조영의지(造營意志)나 건립욕구(建立欲求)가 잠재 위축되었다. 새로운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계기에 의해 재생 부활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퍽이나 흥미롭고 주목되는 사항들로 본고의 착안 사항이다. 한국 석탑에서 백제 양식의 석탑의 존재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통일신라기에는 석탑조영이 단절되었다가 백제의 舊領土 에서만 그것도 300년이 지난 후에야 백제 양식 석탑이 다시 나타나는가?
어떠한 원인이나 계기가 그들의 동기가 되었을까?
백제 양식 석탑의 조형 기법이나 양식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백제 양식 석탑의 건립 주체는 누구였고 언제쯤 건립되었을까? 흔히 신라양식 석탑이라 지칭되는 탑들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당연히 제기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들이다.
한국의 탑에 의해서 일제이래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나 한국석탑의 시원(始原)을 이루고 전개되어 그 조형 양식면에서 백제식(百濟式)이라는 뚜렷한 맥을 이루고 있는 석탑들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통일신라 이후 건립된 다수의 신라 양식 석탑들을 한국의 전형탑으로 의미를 설정하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백제 양식 석탑들을 간과한 것이라 지적할 수 있겠다.
이 연재글에서는 한국 석탑의 연구를 위한 일환으로 석탑의 시원(始原)을 이루면서도 발전 과정에서만 단절되었다가 후기에야 다소 변모된 모습으로 재생된 백제 양식 석탑을 연구하여 백제 양식 석탑들의 실존재로서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는 한국 석탑에 있어서 백제 양식 석탑의 의미를 밝히는 것 외에도 석탑 전반에 관한 원론적 고찰과 실증적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한국 석탑 연구의 기초가 될 것이다.
천득염 / 53년 진도 출생. 전남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사를 전공했고「백제계 석탑의 조형특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저널과는 94년 한국미술사 강좌에 강사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인연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