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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 | [문화시평]
기획전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져야 전북청년작가 위상전을 보고
글·김선태 미술평론가 (2004-02-12 12:59:03)
초가을 문턱에 들어선 전주 미술계가 예전과 같은 활기를 못 찾고 있다. 그 동안 미술의 해니, 광주비엔날레니 하는 여파로 덩달아 기대에 부풀었던 이것 미술판은 한산하기만 하다. 그나마 전북예술회관에서 간혹 보여지는 개인전과 친목 위주의 그룹전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경쟁하다시피 전시를 열던 풍조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요즘 간간이 전시를 여는 대관 화랑들이 생기는 걸 보면 전주 미술계의 현주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몇 명의 화가들의 개인전이 예약되어 있긴 하지만 작년에 비해 전시회를 취소하는 화가들이 많고, 화랑 역시 빈약한 재정 때문에 기획전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 열심히 작품에만 전념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자 지원해 주는 그 나름대로의 성격을 지닌 소수의 기획전 및 수상작가전(얼화랑: 전북청년작가 수상전, 반영비술상 수상작가전, 우진문화 공간: 신인작가 초대전, 전북청년작가 위상전)은 이 지역 미술 발전을 위해서 도내기업체들도 하기 어려운 그 많은 비용을 부담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해 볼 때, 대단히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그러나 이처럼 귀중한 후원전에 투자된 경비만큼 소득이 없었다. 이번「청년작가 위상전」은 수동적인 전시기획보다는 좀더 치밀하고 뚜렷한 목표 설정과 홍보 전략을 세워 이 후원전이 갖는 취지를 분명히 살렸더라면, 단지 전시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전북 미술계 발전에 조금이나마 견인차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몇 가지 아쉬움을 남겨 놓고 있다. 물론, 여기에 초대된 12명의 작가들은 단연 작업의 성격이나 작가마다 취하는 예술적 특징이 뚜렷하고 그 비젼을 주목할 수 있는 작가들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요즘같이 고가의 카달로그 비용과 전시가 갖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초대된 작가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보수적인 성향과 진취적인 성향, 입체와 평면, 실용과 순수 회화를 추구하는 다양한 작가들이 한데 어우러져 위상전에 걸맞는 작가 선정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기존의 전시와 별반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백화점에서 이것 저것 쇼핑하듯 보여지는 전시와 마찬가지로 선정된 작가들은 두어 점 정도의 작품을 내다 걸어 두는 대가로 카탈로그 몇 권과 경력 한 줄 기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결국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참여작가들의 잔칫상으로 막을 내렸다. 사실, 현대를 중심상실의 다원화시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양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는 동문전 및 친목 도모 위주의 전시만으로도 족하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성격을 지닌 후원 전시회가 되려면, 골고루 혜택이 분배되는 맛보기 식의 기획 초대전보다는, 정말 한 번,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집중 조명할 수 있도록 평론 및 치밀한 홍보 전략과 전폭적인 후원으로 작가는 그림만 그리면 되게 해주고 요즘 유행하는 시쳇말로 ‘떳다’라는 식의 작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춰졌으면 한다. 그 결과 미술 문화의 상품을 만들어 그 활성화를 위한 파급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작가는 작품의 양과 질이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첨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나 장치가 그 작가의 예술적 창작 의욕을 고취시켜 주는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이들 후원전 성격을 지닌 초대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들 후원전이 주는 파급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이 지역 미술인들의 무명화에 대한 좌절과 소외감도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며, 그리고 그런 자신의 자각은 튼튼한 조형성과 자신 있는 개성적 표현을 북돋을 것이며, 왕성한 창작 의욕을 고취시킬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미술이 가고자 하는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아닌가. 도한 전북 미술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되기 위한 주변이 너무나 협소하다. 특히 시민들의 무관심이 현재의 전북 미술의 열악성을 형성하고 있다는데 대하여 대부분 인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들의 미술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참여 부족도 결국 미술 관계자들의 책임이다. 미술 문화에 대한 활성화는 작가의 특성을 고려한 다양한 미술 문화의 상품을 만들어 그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단지, 작가들의 이상적인 기질만 가지고서는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관계 없는 전시는 분명 소모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강조할 것은 지역 미술의 활성화이다. 지역 미술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자주적 미술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적 모체로서의 미술문화 터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문화를 통하여 자국의 미술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오늘날 우리 미술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미술의 정의와 정체성이 대두될 때 비로소 지역미술은 한국 미술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와 전환의 시점으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작가로서의 성장이나 평가는 작품 발표 외에는 없다. 그 발표의 기회가 오직 작가의 개인 역량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기성 화단의 책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문제이다. 발표된 작품에 의해서 작가가 되고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앞으로 후원전을 주최하는 측에서는, 그만큼 능력있는 작가에게 그간의 작품과 포토폴리오 심사와 작품 계획서를 분명히 제출토록 요구하고 이에 걸맞게 추천된 작가에게는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계획과 진행, 홍보로 커다란 성과를 얻어내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후원전을 모색하는 것이 참여작가의 창작 의욕을 고무시키는 행사진행 방식이 아닐까 여겨진다. 비단 많은 작가들이 참여해야만 좋은 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능하면「청년작가 위상전」이 명실공히 미래의 전북 미술계,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 미술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공동체적 정체감을 확인하는 자리로 지역 정체성과 지역 축제 글·이성호 전북대 강사·사회학과 이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전라도”에 대해 ‘소외된 지역’, ‘차별당한 지역’, ‘낙후된 지역’ 이라는 이미지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역에 대해 지니게 된 데는 오랜 기간동안 자역주민이 겪어온 역사적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 지역의 구성원들은 비교적 동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제 따라 지역의 경제나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대응하는 방식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즉 지역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지역문화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내의 각 지역에 대해 지니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지난 수십년간의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의 경험으로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수도권은 달리 언급할 필요도 없고, 영남지역은 공업화의 상징 또는 정치권력의 산실로 인식되고 있는 반면 호남지역은 소외된 지역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비교적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지역 내에서도 지역주민의 지역적 정체성은 내용상의 차이 뿐 아니라 강도의 차이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영남권내에서 경남·북이 지니는 정체성이 다르고 호남권 내에서 전남·북이 지니는 정체성은 내용과 결정 정도가 다르다. 호남지역의 경우, 지역 정체성은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어온 정치적, 경제적 좌절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라도는 강한 한(恨)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도 전남·북의 지역 정체성은 구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80년 광주의 경험을 계기로 하여 전라남도는 강한 저항 이미지를 구축해 간 반면, 전라북도는 상대적으로 선명한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전라북도의 지역주민은 지역적 자긍심의 수립에 실패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전라북도 21세기 발전기획단」과 「전북대학교 사회과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도민의식조사 자료에 의하면 전라북도 도민은 스스로를 “진취적이지 못하고 보수적” 이라고 평가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국민경제 내에서의 지역간 경제적 통합을 넘어 지역과 세계경제와의 직접적 교통이 진전되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 차원에서 독자적 이미지나 상징의 개발을 통하여 지역 정체성을 확립해야할 필요는 점차 증대되고 있다. 왜냐하면 지역 정체성은 지역주민의 자긍심 회복이라는 문화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지역 자원의 상품화라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요긴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는 그 동안 지역경제의 낙후성이 산업화(특히 공업화)에서 소외된 때문으로 이해하고 대기업 유치전략을 수립, 도모해왔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의 지역 내 투자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지역간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된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최근에는 기업의 투자입지결정에 비경제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으며, 이는 점차 지역의 문화적 자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역사적 경험이 항상 지역 정체성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역이미지를 확대하거나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각 지역에서는 기념행사나 지역 축제를 준비한다. 다시 말하면 지역 축제는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고 확인하는 기제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지역 축제는 관주도적, 엘리트 중심적인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은 지역주민을 계몽과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지방자치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의미에서 지역 축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지역 축제가 위로부터의 동원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자발적 참여로 형성되는 경우, 그것이 지니는 효과가 한층 커진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라북도다 자치정부의 출범 직후「자랑스런 전북 만들기」를 도정의 기본방향으로 정한 것은 지역주민의 자긍심 회복과 자치력의 향상이 효율적인 지방정치를 위한 긴요한 요건임을 인식한 결과라 여겨진다. 이것은 지방자치의 진전이 독자적인 지역 이미지 형성(또는 전환)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한 자치정부 출범 1년을 넘기면서 맞이하게 된 「도민의 날 도제(道制) 100주년 기념사업」(이하 「사업」으로 칭함)은 올해가 도제 100 주년을 맞이하는 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자치정부가 실질적으로 치루어 내는 최초의 범도적 축제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사뭇 크다 할 수 있다. 그러나「사업」이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걸맞는 지역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 여겨진다. 요컨대 「사업」이 과거 관선 지방정부 시절의 엘리트 중심적 행사와는 구분되는 주민 축제로서의 요소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본격적 평가작업은 「사업」이 마무리된 후로 미루어 둘 수 밖에 없지만, 「사업계획」을 살펴보면 그 화려함에 비해 변화를 실감할 수없어 아쉽다. 「사업」이 전라북도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 같지도,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높여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번 「사업」의 형식이 지역주민의 주체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은 여전히 관객이며 구경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지역이나 지역적 정체성은 이중적으로 형성된다. 즉 지역은 그곳을 삶의 공간으로 삼아 온 대중의 이미지와 통치와 동원의 대상으로 삼아 온 지배세력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흔히 그 이미지는 저항의 이미지와 순응의 이미지로 대립된다. 과거 관선정부 시절의 지역행사는 주로 대중동원을 통하여 지역내에 순응의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치시대의 지역 행사가 축제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역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고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고유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계기여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축제는 주민의 자발적, 주체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지역의 집단정체성의 매개자로서의 지방정부는 니역 축제를 통하여 주민의 억압된 정서를 분출하고 공동체적 정체감을 확립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위축된 주민의 자치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회복하여 자랑스런 전북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찬 목표를 세운 자치시대의 지방정부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어떤 행사를 두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관하는 측에서나 이야기거리로 삼는 측에서나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그것이 이제 갓 1년을 넘긴 자치정부의 최초의 사업인 바에야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자치정부의 등장 자체가 수십년간 지체되어 온 전라북도의 변화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치시대는 그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치정부는 이제 1년을 넘겼으며 앞으로 겨우 2년의 기간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이 기간동안 주민소득의 급격한 향상이나 산업구조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주민에게나 정부에게나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어쩌면 초대 자치정부가 전라북도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은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변화는 주민 자치능력의 신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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