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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 | [문화저널]
꽁트 착각
글·박만득 소설가 (2004-02-12 12:57:09)
‘착각이야말로 고독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을 윤희가 처음 귀담아 들은 것은 20년 전 첫 발령을 받았던 벽촌의 한 분교에서였다. 직원이래야 겨우 5명이 근무하는 오지 학교였는데 그 곳에서 만난 늙은 분교장 때문이었다. 호랑이 없는 고을에는 원숭이가 왕이라고, 그 분교장은 자신의 능력과 권한으로 못하는 일이 없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첫임지에 대한 윤희의 기대는 차를 내려서도 논두렁을 한시간씩이나 걸어가야 하는 오지(奧地)라는 것으로 와르르 무너졌던 차였다. 거기다가 막사를 방불케 하는 교사(교사)까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손잡이가 덜렁덜렁한 교무실 문을 열고 막 들어설 때였다. 윤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분교장이 인사도 건네기 전에 대뜸, 스커트가 너무 짧다고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농사짓는 사람이 인간 문화재로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라는 말로 시작된 그의 훈시인즉슨, 날만 새면 아무 옷이나 걸치고 땅을 파야 먹고사는 농촌인지라, 정강이가 허여멀쑥하게 드러나는 옷차림으로 위화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씀이야 백번 지당했지만 그 말투에서 윤희는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동료들 중에서 그를 지지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되려 속수무책으로 무안을 당하고 있는 윤희에게 더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윤희는 담박에 그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처음 상면하는 사람들 앞에서 지적 받은 것이 하필이면 짧은 스커트 길이였다는 것 때문에 창피하고 무렴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분교장의 다음 말은 더 걸작이었다. “신 선생님은 견물생심이라는 말을 알기고? 그 차림이 바로 범죄유발형이야요. 여긴 학교지 청량리 588이 아니란 말이외다.” 말은 표준어를 쓰고 있었지만 끝이 가파르게 꼬이는 이북식 사투리 때문인지, 아니면 청량리 588이란 말이 시사하는 의미 때문인지, 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옆자리에서 누군가 쿡, 웃으려다가 입술을 씰룩이며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음에 알고 보니 그녀는 한 선생이었는데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한 달 후면 정년이에요” 그러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위로였으리라 아니면 돌고 돌다 보면 어디서든 또 만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 막보기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인간관계인데 곧 퇴직할 사람이므로 벌벌 길 필요가 없는 종이 호랑이란 뜻인지도 몰랐다. 어찌 들으면, 정년이 임박한 어른이니 깍듯이 공경하라는 독려 같기도 했다. 무안함 때문에 억하심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윤희는, 마지못해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말하고 쓴웃음을 머금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람은 인격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차지하고 있는 자리 때문에 복종하는 척 해 보이는 거라면 얼마나 허망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장은 착각속에서 사는 나르시스트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교장이 나가고 난 뒤, 윤희보다 이십 년쯤은 연배로 보이던 한 선생은 이심전심으로 생각했는지 대뜸 말을 놓으며 이렇게 부연 설명을 했다.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사악하고 악랄한 사람은 바로 나르시스트야.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거든. 하지만 나르시스트는 달라. 온 세상을 다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왜곡한단 말이야. 교장이 그래. 저렇게 원칙주의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을 표리부동한 사람이야. 축첩에 공금 횡령 업무상 배임에... 신 선생 그거 알어? 결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흉을 더 많이 본다는거?” 윤희는 나르시시즘이야 말로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공부했던 심리학 시간을 떠올리며, 한 선생의 그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나이가 사십인데 말야.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어.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 나 자신도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사십 년이 걸리더라고. 신 선생도 사십이 되면 내 말을 이해할까? 아직 새파란 이십 대에 뭘 이해하겠어. 설령 이해한다 해도 공감하진 못할 거고, 착각이야말로 병인 것을......”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곧 다음 말을 이었다. “10대에 하는 착각은 미혹이지만 60대에 하는 착각은 망령이거든.” “착각도 급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착각도 나이를 먹어 간다는 말이지. 20대에 하는 착각은 교만이고 30대에 하는 착각은 만용이야. 그리고 40대에 하는 착각은 발악이고 50이 넘어서 하는 착각은 주책이지.” 윤희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착각이야말로 고독에 이르는 병’이라던 한 선생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교훈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을 분별하는 자(尺)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었다. 착각 속에 빠져 살았던 이십년 전의 분교장같은 사람들은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돈을 가지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된다고 착각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했다. 접대용으로 적당히 내뱉는 면찬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며 우월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착각 또한 달리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윤희도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순간 문득, 자신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생각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 생각은 때때로 의기소침한 두려움을 갖게도 했지만,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도록 종용했다.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돌고 돌 듯이 바야흐로 윤희 나이도 이제 사십이 넘은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의견이 다르며 자기와 다른 의견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으로 서로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공통점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라 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심정은, 착각에도 순서가 있고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착각에도 최소한의 명분이나 기분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윤희의 의견이었다. 윤희가 그런 의견을 갖게 된 데에는 ‘착각’ 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두 인물 때문이었다. 윤희가 새로 부임한 학교에는, 그녀와 십년 차이도 넘는 선배 동료 두 사람이 쌍두마차처럼 교무실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점심 후 가끔 모여서 담소하는 시간에도 항상 끼리끼리만 어울렸으므로, 이편으로 갔다 저편으로 갔다 할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혼자 있는게 속이 편했는데, 그 소외감이 주는 외로움 또한 만만칠 않았다. 윤희도 그 어느 한편에 가담해야만 될 것 같은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자신이 연장자가 되어 선봉에 섰을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선우 선생의 경우다. 젊은 시절의 한 때는 꽤 날리는 미모와 재기까지를 겸비한 인텔리였는데 정년을 앞둔 지금은 아집만 덕지덕지 남은 노인에 불과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꼭지점이라고 착각하고 있음인지 발랄한 후배들을 보면 건방지다고 후려치듯 면박을 주었고, 히히덕거리는 자기를 따라 낄낄거리며 웃지 않는다고 미워하기도 했다. 입만 열면 비수(匕首)처럼 쏟아지는 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모습은 결코 존경스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롱불을 껐던 경험으로 전깃불까지 끄겠다고 나서는 데야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나이를 먹어 오면서 ‘경험’을 얻기 위해 치렀던 대가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 비싼 경험을 ‘이해와 용서’ 의 지침으로 쓰지 않고, ‘채찍’으로 휘두르고 있는 선우 선생은, 자기 좋은대로 착각하기 시작하면 눈감고 천리를갔다. 그런 인격 파괴조차도 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하지 않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은 결국 고독이라는 감옥에 갇힐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남궁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선우 선생이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곤 하던 남궁 선생도, 객관성이 없기는 한수 위였다. 선우 선생의 이런 저런 행동이 되지 못한 행동이니 어떠니 하면서 사사건건 선동하여 시비를 가렸지만,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몰아세우는 것도 선우 선생보다 한 술 더 떴다. 맞춤법 한두개가 틀려있는 편지에 빨간 줄을 죽죽 그어 되돌려 보낸다거나, 면전에서 말 할 때와 돌아서서 말 할 때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로는 감히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서로를 향한 비판의 기준이자 공격하는 언어가 식자우환(識字憂患) 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는 것을 힘으로 쓰지 못하고 병으로 쓰는 행위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는 말은 바로 그들 자신이 즐겨 쓰는 말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윤희가 남궁 선생에 대해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은 정작 따로 있었다. 선우 선생을 그렇게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남궁 선생은, 서너살 위인 선우 선생 앞에만 서면 고분고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하는 접대였을 것이다. 무서워서 피한다 푼수로, 맞싸울 가치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것은 ‘댁들의 사정’이었지 윤희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은, 아무 흥미도 이해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윤희 입장까지 황당하게 하는 데야 끝내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다가도 어떤 때는 또, 내가 너를 언제 보았더냐는 표정으로 돌아설때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해도, 면전에서 찬바람을 일으키며 훽 돌아서는 뒤통수를 바라보는 심정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누가 말을 잘못 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이유를 찾아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오해할라면 오해하라지 뭐.’ 포기하고 이쪽에서도 데면데면 대하다 보면 또 언제 그랬더냐 싶게 반가워하면, 도대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선우 선생과 남궁 선생을 향해 ‘당신은 지금 착각하고 있습니다.’는 말을 본인에게 직접 알려줘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고양이의 목에 직접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해 보았자, 편견과 아집이 나이테로 굳어 버려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괜히 잘못 말했다간 말해주는 사람만 할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윤희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착각에도 순서와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오만했던 사람이 깨달으면 겸손해지듯이, 무엇이 착각임을 깨달으면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착각이야말로 고독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스스로 대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비난과 힐책을 면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인생을 어떻게 살든 언젠가는 마무리를 해야 하는 고즈넉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위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치 천년이나 사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 윤희가 자신의 노년을 위해 준비한 결심이었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오는 법이라지 않던가! 박만득 / 원광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소설을 전공했다. 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49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아직도 남아있는 6.25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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