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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문화비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저 하늘이 당신꺼라고? TV드라마 〈애인〉
문화저널(2004-02-12 12:55:53)
MBC-TV의 드라마 〈애인〉이 큰 화제가 됐었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애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애인! 그 얼마나 가슴 벅찬 단어인가! 나는 그 단어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그 드라마 덕분에 기억을 되살려 낸 것이다. 잠을 일찍 자는 내 아내는 그 드라마가 방영될 때 늘 자고 있었다. 아, 늘 잠을 사랑하는 내 아내여! 어디선가 그런 드라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법도한데 내 아내는 그 드라마에 대해 내내 무관심했다. 한두번인가 그 드라마가 시작될 때 같이 보기는 했는데 아니는 어느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그 드라마를 거의 다 보았는데 그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닌 시간을 절약한답시고 텔레비전 앞에서 신문과 잡지를 보는 버릇을 갖고 있어 웬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거의 다 ‘듣는’편이다. 그런데 그 드라마는 나를 몹시 웃겼다. 텔레비전에 몰입하지 않고, 보기보다는 듣는버릇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감정이 메말라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드라마가 내게는 고급 코미디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남의 아내를 넘보는 사내의대사가 왜 그렇게 웃기는지, 눈을 들어 화면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미친 놈’ 지 마누라한테는 쌀쌀맞게 대하면서 남의 마누라에겐왜 그렇게 싱겁다 못해 역겨운 수작을 해 대지? 뭐? 자 하늘이 당신거라고? 놀고 있네! 사내와 여자가 좀 심각한 분위기를 잡는다 하면 무슨 영어 노래가 튀어나온다. 한국 드라마는 참 이상하더라. 그거 문화사대주의 아냐? ‘사랑노래 하면’ 김수희도 있고 최진희도 있는데, 꼭 영어 노래를 틀어 대야 분귀기가 사냐? 그 일 저지르는 남녀가 노동계급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둘은 만나봐야 포장마차 아니면 호프집일 거 아냐? 좀 무리하면 카바레일 거고 거기서도 무언가 순수한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살아나겠느냐 이 말이야. 그러고 보니 갸네들 웃기데. 배부르고 너무 편해서 그런 거 아냐? 사내가 샐러리맨이었다면 그렇게 마음대로 자리 비울 수 있나? 돈 잘 벌어다 주는 유능한 남편이 일에 바뻐 같이 못 놀아준다고 여자가 그렇게 사고치면 어쩌자는 거야? 잠자고 있는 내 아내가나의 그런 생각을 알고 있었다면 ‘역시 내 남편이야!’ 라고 칭찬을 해 주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사고치는 남녀가 부럽다는 생각은 든다. 내 아내에게 ‘저 하늘은 당신 거야’ 라고 말한다면 아내는 눈을 흘기며 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그런데 나도 가끔은 그런 허튼 수작을 하고 싶다. 나도 애인을 만들면 그 따위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하나 만들어 볼까?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아내가 무섭다거나 아내도 나처럼 사고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서 그런 게 아니다. 아니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겠지만 그 것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애인을 만들고 애인을 관리하는 것도 ‘문화적 자본’이다. 그건 우선적으로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책 읽고 글쓰는 걸 빼놓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다. 운전면허도 없으니 어디 끌고 다닐 곳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애인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정신적’이라기 보다는 ‘육체적’애인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건 나의 편견일지 모른다. 어찌 정신과 육체를 구분 못하랴. 마음이 통하니 몸이 통하고 몸이 통하니 마음이 통할 것이다. 나는 솔직히 그들이 가끔은 부럽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짓을 위해 쏟아야하는 정신적 에너지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가? 그렇게 애인을 둔 사람이야말로 정말 인간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것이 또 다른 위선과 기만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이르러선 그들에게 좋은 점을 주기가 어렵다. 아니 안쓰럽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재미의 맛을 이야기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랑을 해야 하나? 그것도 버릇일텐데 말이다. 나도 한때는 열렬히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명을.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그랬던 건 아니니 행여 오해는 마시라.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보고 싶어서 그녀의 집 앞에까지 달려가 그녀를 무작정 기다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도 연애 편지는 얼마나 많이 썼던가! 책 분량으로 따지면 아마 큰 전집 분량이 나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내가 이제 겨우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인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신성한(?) 사랑을 믿지 않다니. 길을 가다 미녀 또는 얼굴은 시원치 않아도 늘씬한 다리를 드러낸 여자가 있으면 여전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줄만큼 여자는 여전히 밝히는 편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이 없다. 내 주변을 둘러봐도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다. 사랑이한 확실히 일상적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이란 때론 떠나고 싶은 굴레이기도 하다. 드라마〈애인〉이 시청자들의 그런 마음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자에게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해 놓고, 곧장 호텔로 끌고 가는 사내의 그 배짱(?)은 많은 남성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고도의 테크닉이 아닐까? 방에 들어가선 다시 뛰쳐나올 망정, 그렇게 호텔을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도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가을은 깊어 가고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엔 산에 올라 단풍구경하는게 제일 좋다고 나를 타일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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