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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특집]
특집/음식문화3 위도 크내기 갈치 뱃대기 맛 못 잊는데
문화저널(2004-02-12 12:52:20)
그러니가 꼭 일 년만 인가 보다. 작년 이맘때부터 좋아하는 술을 끊고 한동네 사시는 형님의 외딴방 하나를 빌어서 음식에 얽힌 산문집「호박국에 밥 말아먹고...」를 쓰기 시작했었는데(내일을 여는 책 출판사 간)일 년만에 주변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다시 음식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젊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무슨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써야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린다는데 한참 먹고 사는 데 바쁠 삼사십대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도하고 있으니 누가 읽어 줄까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래도 책상에 다시 앉은 것은 아직도 내가 책 속에서 다 하지 못한 미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어서 일터이다. 이 이야기는「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의 남은 이야기 중 일부가 될 것 같다. 내소사 일주문 밖 바로 옆에는 순두부와 도토리 묵, 파전 등을 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막걸리와 밥을 파는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다. 이 가게이 아들은 무슨 사업차 우리 동네를 자주 내왕해서 나와는 안면 정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찮게 이 가게에서 막걸리를 먹게 되었다. 가게의 안주인네는 마침 남편은 어디가고 갓 얻었음직한 며느리만 데리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여그 막걸리 한 병 허고 도토리 묵 한 접시 주요.”했더니 말없이 내 위아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잠시후에 도토리묵 그득하게 한 접시 쟁반에 담고 며느리에게 술병들려서 가지고 나왔다. 이 때 내가 어디 가나 항상 하는 말이 있으니 어떤 음식이던지 몇 점 맛있게 먹고 나서 “앗따! 아주머니, 음식 솜씨 무지무지허게 존디 여그다 미원 쪼금만 들 넣었으면 더 맛있겠소.”이다.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빙긋이 웃기만 하더니 한참 후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 듯 헌디..”말꼬리를 흐렸다. “모항 삽니다.” “내 어쩐지! 우리 아들 땜시 몇 번 본 것 같아서..” “제가 여기도 자주 오는데요.” 내 장난기가 자연스럽게 거두어지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가 이어져서 나와 안면 있던 그 사람이 이 가게의 아들인 줄을 알게 된 것이다. 내소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던 저녁 무렵이어서 가게에도 손님이 없었는지라 이 아주머니는 내가 앉은 평상에 마주 앉아서 병에 남은 막걸리 한잔을 스스럼 없는 듯 내 잔에 부어 주었다. 우리 동네와 내소사 동네가 아무리 지척에 있다손 치더라도 아들이 뭔일 한답시고 자주 가는 동네이 사람을 말로나마도 홀대하긴 어려웠으리라마는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말뿐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사람에게 정성을 쏟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의 도토리묵 무친 솜씨는 일품이었다. 음식이라는 것이 한 점 집어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첫맛이 중요한 것인데 갖은 양념 다해서 무친 그 도토리묵은 인공 조미료 싫어하는 내 입맛으로도 넣은 것인지 넣지 않은 것인지 전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맛이 있었다. 그런 남다름이 있었으니 까탈스러운 내 말에도 빙긋이 웃었을 수밖에.... 내가 하도 맛있게 한 접시를 다 먹어치워 버리자 아까 무친 양푼에 좀 남았다며 며느리 시키지 않고 직접 반 접시나마 더 가져왔다. 사람의 술맛이라는 것도 참 이상스러운 것이다. 도토리 묵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을 혼자 먹고, 특히 나처럼 차를 몰고 와야 하는 사람에게는 양에 겨운 것인데 곁에서 따라주는 술 한 잔과 거져 더 내온 묵 반 접시는 출출했던 뱃속에 더 없는 따뜻한 안주가 되어서 술맛을 돋구어 버렸다. 해서 막걸리 한 병을 또 비우게 되었던 것이다.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길이보이고 구불구불 난 그 길을 따라서 또 조금 올라가면 노피지막한 곳에 자리잡은 절 집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내소사 지장암, 비구니들이 있는 곳이다. 내소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지장암에 들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이 암자에 자주 갈 일이 생겼다. 음식 잘하는 스님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금년 팔월 중순경「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의 출판 기념회를 해 준답시고 서울에서부터 내려온 출판사 사람들과 몇과 이박 삼일 동안 죽자고 술을 먹었는데 마지막 날 내소사를 가게 되었다. 내소사가 초행인 사람들이어서 내 짧은 식견을 보태 절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키고 지장암까지를 들르게 되었다. 원래 그곳엔 가지 않기로 하였으나 함께 간 이웃 동네의 술친구 하나가 지장암에 음식 잘하는 스님 한 분이 있으니 보러 가자고 해서 그가 없으면 절 집이라도 볼 생각으로 들른 것이다. 운 좋게 마침 스님이 계셨다. 출가승의 나이를 짐작해 보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겠는데 얼른 대충 보기에 나이 한 쉰댓 됐을까? 눈가의 주름살에 맺힌 웃음이 벌써 많은 세월을 짐작케 함과 동시에 사람을 편하게 하는, 이무러움이 없었다. 술친구가 가운데 들어서서로 인사를 붙였다. 나는 음식 이야기랍시고 책을 낸 직후였고, 그 스님은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문이 난 터여서 우리는 대번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라고 하지만 나야 솔직히 음식을 말로만 줒어댈 뿐, 그 스님이야 어디 그렇겠는가? 잘하면 무시라도 여스님들의 세계에 들어와서 그들이 만든 공양을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얌체 같은 마음이 더 앞서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날은 마침 칠석이었는데 몇 마디 수작이 있은 후 이제 그 스님이 우리에게 내놓은 음식을 보자. 누뭇잎 모양의 대로 만든 접시를 뜰 안에 있는 무화과 나무 이파리 하나를 따서 깔고, 동글동글 하게 빚고 손가락으로 눌러 부드러운 각이 지게 만든 송편과 개떡 두 족 분이었는데 이 개떡이 그냥 동글납작한 보통의 개떡이 아니라 꼭 나뭇잎 모양으로 얄프닥하게 만든 개떡이더란 것이다. 나뭇잎 모양의 접시가 그렇고 무화과 잎을 깐 것이 그렇고 거기에 또한 나뭇잎 모양의 파랗게 윤이 나는 개떡과 함께 조화를 이룬 송편이라니! 맛은 하여간에 그 정성이 대번 눈에 어려서 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여기서 부처님을 느꼈다면 과장일까?)사진부터몇 장찍고서야 먹을 수가 잇었다. 음식이 지나치게 보기 좋고 고급스러워도 구미가 당기기 어려운 것인데 그것은 고도로 세련되고 감가적이었어도 그 내용이 소박한 개떡이었으므로 해서 우리는 맘놓고, 맛있고 허물없이 먹을 수가 있었다. 거짓말보태지 않고 내가 철 들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떡을 그렇게 감사하며 먹지 않았나 싶다.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장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생 제도가 별것이겠는가? 정성스럽게 만든 개떡 한가지 바로 그것이다. 요 앞 일 주문 밖의 도토리묵과 따러 주는 막걸리도 그렇더라....’결국 그날도 서울 사람들은 술에 취해 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달 여, 이러저러 추석이 지나고 요즈음은 멸치가 잡힐 철인데도 어촌인 이곳엔 멸치가 잡히지 않아서 그물질하는 사람들 어깨엔 힘이없다. 다른 때 같으면 추석 전전사리, 그러니까 추석 한달 전부터 멸치가 뒤집어져서 추석 명절도 멸치에 묻혀 쇠어야 했을 것이지마는 금년에는 어인판 속인지 멸치는커녕 멸치 새끼 실치도 보이지 않는다 한다. 농사도 그렇고 어업도 마찬가지여서 가격은 고하간에 풍년이 들고 많이 잡혀야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파는 법인데 멸치야, 무정한 멸치야, 옛날 칠산 바닥의 그 많던 고기들이 다 어디 가고 때가 되어도 올줄을 모르는가.. 멸치떼가 들어와야 가을의 바다는 비로소 풍성해진다. 멸치를 뒤쫓아오는데 이런 놈들은 후리 그물이나 전어 그물로 한 번 둘러쌌다 하면 지게 바작에 가마니를 들이대고 퍼 날라도 남을 정도로 엄청났다. 이맘때 잡히는 이 놈들은 우선 꼬랑지가 가을 독사 꼬랑지 노랗게 약차서 사람보고는 도망가지 않고 바르르 떠는 것처럼 노랗게 기름이 올라 있는데 이걸 그냥 비늘도 긁지 않고 굵은 소금 뿌려 한 시간 정도 놔뒀다가 저녁 아궁이 불에 석쇠 얹고 구워 놓으면 기름이 벅적거리면서 고소한 냄새가 울안에 진동한다. 전어는 이렇게 통째로 구워서 저녁밥과 함께 손에 들고 김치 싸서 대가리부터 창자 고랑지 할 것 없이 모조리 뼈째 씹어 먹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얌전을 내느라고 그러는지 여기는귀한 고기가 거기는 흔해서 그러는지 대가리 창자 꼬랑지다 떼어 내고 후라이팬 기름에 구워서 기껏 살코기만 저분으로 깔짝거린다. 그것도 또 반절 내버리면서. 아느느 이들은 지금 잡히는 가을 전어 한 마리를 여름지난 농어보다도 차라리 더 대접해 준다. 멸치 뒤를 쫓아오는 것 중에 특히 갈치는 뺄 수가 없다. 애들 손바닥 같은 풀치야 갈치라고 할 수 없으나 그도 많이 잡히면 풀치젓을 몇 동이씩 담그던지(이 풀치젓은 한 일년 삼삼하게 익혀서, 먹으려고 꺼내 놓으면 방안에 고릿한 냄새가 꽉 차버려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쳐줬다)엮거리를 엮지만 배에서 평생 그물을 당기는 뱃사람들의 그 두툼한 손바닥같은 갈치는(갈치의 크기는 어른들 손가락 세 개 넓이냐 네 개 넓이냐로 따졌다.)하앟게 번뜩이는 비닐을 대충 긁어 버리고 밭에서 막 따온 서리 호박과 함께 얼큰하게 지져 놓으면 그 쌈박한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이러지 않으면 토막쳐서 소금 뿌려 한 삼십분 간이 배이게 했다가 석쇠에 구워 먹는다. 갈치의 살은 무르고 빨리 익어서 한참 때의 장정 겨드랑이에 넣었다가도 먹는다 하였는데 이중에서도 칠산 바닥에서 잡히는 손바닥 같은 갈치 뱃대기 살은 특히 기름지고 연해서 오죽 맛있었으면 위도 크내기 갈치 뱃대기 맛 못 잊어서 뭍으로 시집을 못간다 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그도 저도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 버리고 멸치조차 잡히지 않으니 자꾸만 깊어 가는 가을 바다를 바라보는 어부들의 눈에 시름이 더해 간다. 음식이라는 것이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또한 제 때 제 고장에서 나는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해 묵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다가 흉년든 바다를 보면서 다 사치한 생각 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젖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바닷가 이 모양인 것도 다 사람들 때문이었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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