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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문화저널]
특집/음식문화2 조화로운 삶과 음식
글■김두경 서예가 (2004-02-12 12:51:54)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요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리에 대한 전문지식은 당연히 없고 미식가도 아니며 요리를 잘 하거나 요리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는가? 그것은 어려서부터 여자를 좋아하여 할머니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쫒아다니다 보니 상식이 되어버린 것들이 요즈음 나의 삶에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본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강요한다고 해서 쓸 말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뭔가 할 말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음식에 대한 나의 개인적이고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물론 비슷하거나 거의 똑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지역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민족이라면 지역간의 격차를 극복하고 삶의 모습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의 모습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 민족은 물론 가정이나 개인조차도 역사와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어떤 흐름을 무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단순한 단절이 아니고 삶 자체가 무너져 없어져 버리거나 다른 삶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에는 반드시 생각이 전제되듯이 음식문화 또한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 사고에 근거한다. 지금 우리의 음식문화는 어떠한가? 학문적으로는 계승 발전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는 계승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니 우리의 음식문화에 있어서 사상은 없고 음식만 있는 것으로 알거나 서양의 영양학을 기초로 우리를 분석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양의 칼로리 영양학이나 미네랄 영양학이 완전히 지배할 뿐 우리의 음식에 대한 사상이나 우리식의 영양학은 거의 무시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식의 사상이나 영양학은 어떤 것인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거다’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랬던 것 같다’라고는 말하고 싶다. 현대 영양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서양 영양학에서는 육신을 기르기 위한 수단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육신을 구성한 성분을 분석하여 그 구성 물질을 보충해 주는 데 주력한다. 또한 먹기에 편하고 맛있고 보기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등의 생각에 근거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단백질 성분이면 돼지고기의 단백질과 쇠고기의 단백질은 같은 역할로 보는 것이 당연하나 다만 맛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원소의 구성비가 다르고 미량원소들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같은 단백질이나 지방성분일지라도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그것들을 차이를 둔다. 아니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쇠고기는 양을 보해주고 돼지고기는 음을 보해주는 식의 한의학적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보다 더 쉽게 생각해보자. 자동차에 있어서 기름이 들어가는 곳은 여러 곳이며 휘발유, 엔진오일, 구리스 등 각종의 기름이 들어가야 할곳이 따로 있다. 이렇게 성질이 다른 기름을 역할에 맞게 넣어주는 것은 사람이 한다. 그리고 각각의 기름은 역할을 바꿀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자동차처럼 필요한 곳에 적당한 기름을 적당히 넣어 줄 수가 없고 골고루 음식을 섭취하면 소화해서 스스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배분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인체는 한 가지 기름성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구성되어 있는가? 내가 알기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때 인체가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게 단순한 원리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했는가? 일단 모든음식은 청과 탁으로 구분했다. 다시 말해서 맑은 기운이 나오느냐 탁한 기운이 나오느냐하는 것이다. 서양의 그것처럼 얼마만큼의 열량이 나오느냐 어떤 구성원소로 되어 있는가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또한 본성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하는 한과 열로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보음하는가 보양하는가로도 나누었고 구체적으로 어느곳을 보해주는가 까지도 분류했다. 그렇지만 일반인은 그렇게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 이 정도는 상식화되어 잇었다. 비록 무지한 서민일지라도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식의 삶을 사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청탁의 조화도 한 열의 조화도, 음양의 조화도 생각지 않는다. 서양의 영양학이 상식이 되어 거기에 따라 살아간다. 때문에 우리의 정신의 틀도 무너지고 우리의 삶도 건강도 무너져 가고 있다. 우리가 돼지고기나 닭고기보다는 쇠고기를 선호하는 이유를 쇠고기가 돼지고기나 닭고기보다 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겠지만 어느면에서는 청탁의 이유로도 볼 수 있겠다. 우리 인체에서는 복잡한 만큼 맑은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쇠고기를 좋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이 맑고 담백함을 좋아한 까닭에 탁한 기운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힘이 넘치더라도 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환경이 좋지 않아도 필요성을 느끼면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볼 때 우리 선조가 채식을 위주로 한 맑은 식생활에 불만이 있었다면 그렇게 안주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맑고 담백함을 추구했는가? 그것은 인간 위주의 현실적 삶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자연을 조화롭게 할 것을 생각했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이용하는 삶과 자연과 조화하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자연을 이용하는 삶은 현실적 육체적 삶의 발자취 이욍에는 의미가 별로 없다. 때문에 육체적 삶을 완성시키려 하고 끊임없는 만족을 추구한다. 따라서 물질문명이 발달된다. 반면 자연과 조화하는 사람의 삶은 현실적 삶의 의미를 넘어 초현실적 삶을 느끼거나 막연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의미를 둔다. 따라서 삶이 추상적일 수 있고 정신적이고 신비스러울 수 잇으며, 물질문명에느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옛 우리의 선조는 막연하지만 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택했다. 당연히 물질의 풍요에 있어서는 후진국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지만 나는 이러한 우리의 삶이 웬지 좋아 보인다. 그리고 바른 삶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식주를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로 돌리고자 한다. 몸도 마음도 자연에 순응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주의 순응이 기본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은 최대한 가공을 피한다. 다만 맛을 내기 위해서 자연의 힘을 빌려 변화를 주기도한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버린다. 예를 들어 김치에는 어떤 양념을 듬뿍 넣어야 맛있다 하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가능하면(역겹지만 않으면)양념을 하지 않고 그 자체의 맛을 즐기려 한다. 배추는 배추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오이는 오이대로 솔잎은 솔잎대로.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체를 즐길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관념에 젖어 있기 때문에. 관념에 젖어 있을 때 도저히 못먹겠던 음식이 관념을 벗어 던지면 맛있어진다. 이것은 음식을 통한 수행이다. 또한 서로 섞는 음식이라도 음양의 조화를 살펴 우리 몸 속에서 화평함을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모든 영양학이 신진대사에 있어 일정한 호흡으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선조들은 모든 유형적 먹거리를 기본으로 하고 호흡의 변화에 따라 에너지 효율을 다르게 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같은 휘발유라도 산소 공급량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달라지듯이 같은 먹거리라도 신체의 호흡능력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달라짐을 생각하여 올바른 호흡으로 완전 연소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불완전 연소에 의한 불순물 축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장이 많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음식에는 주식과 부식이 있어야 하며, 정식과 간식의 한계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히 육신적 삶, 즉 육체를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차원에서 말하거나 삶을 영위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인간의 작은 노력이며 만물과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인간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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