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6.10 | [특집]
특별기고 꿈속에서도 반대하련다 고난의 9박 10일, 절규의 300km
글■임병술 전국 농민회 총연맹 전북도연맹 부의장 (2004-02-12 12:50:54)
봄부터 시작된 들녘은 마지막 더위에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10일이 넘는 외유는 농사꾼으로서 짧지 않은 기간, 마음만 서둘러진다. ‘고추를 따야 할까, 참깨를 베어야지. 짓거리도 몇 포기 심어야 할텐데, 생강밭 농약은 어쩐다?........’ 마누라 눈치를 뒤로 하고, 101보충대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나주길은 착잡함이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국방의무가 아닌 농민의 생존권 투쟁이라는 것과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발길이라는 것뿐. 새벽부터 숨가쁘게 내달려온 도보행진 단원들은 광주 공원에 던져졌다. 무척 빠른 걸음으로 대회가 준비되고 있었고, 9.10 전국 농민회 준비 일정때문인지 황영 나온 주민들은 공원 상주 인원과 경찰 병력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한 발대식후 방송 차량과 깃발을 앞세우며 첫발을 딛는다. 발님이 잘 견뎌주실지 믿어 보면서 말이다. 한 시간이나 넘게 걸었을까? 신한국당 당사에 도착하여 천리 한양길 절절한 농민의 심정을 봉투에 담아 건네지만 이를 아는 그네들이 지금까지 귀먹고 살았겠나 하는 생각에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비공식 구호를 유 총무의 선창으로 야멸차게 내뱉으며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이미 발바닥에서는 물집이 자리잡는 통증이 시작되고 잇었다. 걱정이다. 첫날 반나절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왈칵 전율을 느끼게 했다. 모두가 자신의 발바닥을 하느님처럼 바라보며 걱정하는 눈길이다. “발님이여 정녕 날 버리시려 하나이까?” ‘믿는건 당신 밖에 없나이다.’ 예술회관의 조형물을 의지하고 통제된 잔디밭에 누워 두 다리를 하늘 높이 선보이며 하소연 할 여유도 없이 급하게 발님을 챙기고 도시의 소음과 매연을 뒤로 뒤로하며 비아 I.C고개를 힘들여 옮기고 있었다. 방송 차량의 테이프는 몇 차례나 다뇌었다. 장성 특작인 양잠과 면화를 소멸시키고 논밭의 안방을 차지한 장성 포도가 새참이라니 달갑지 &#50527;다. 목화송이 훔쳐 따먹던 아주 먼 어린시절, 입술 단자잉 무색하던 뽕나무밭 새큼한 오디가 그립다. 텁텁한 막걸리에 된장 고추 안주가 그립다. 장성 고갯마루를 올라서며 시원스러운 촌 내음이 착잡한 마음을 감싸 주었다. 전북 김 처장보다 훨씬 잘생겼다고 자부하는 유 총무의 신병 재교육을 가볍게 입소하여 악에 바친 함성과 군가 아닌 농민가를 힘차게 부르며 장성 경찰의 환영에 답한다. 장성 터미널에서의 선전전을 마치고 뉘엿뉘엿 천주 교회에 도착했을 때, 강 단장과 많은 동지들이 발바닥이 농민 약사에게 이미 노출된 한참 뒤인 것 같았다. ‘아침 7시 이전 기상은 절대 불가한다’는 약속을 깨고 훨씬 이전부터 단원들을 못자게 궁시렁거린다. 지금까지 살아온 부지런한 농부의 못된 버릇일지라.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새벽 일을 다 마치고 온 셈이다. 새로 보강된 북, 머리띠를 챙기며 유 총무의 싱그러우 S아치 A조회와 함께 2일째를 맞이한다. 군청 앞 약식 집회를 마치고 담양을 향한 고갯길을 낙오자를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아카시아 잎다기 놀이를 하며 걸었다. 책가방 허리에 둘러메고 삐비(‘삘기’ 사투리)뽑아 먹으며 아카시아 꽃잎 한웅쿰 입에 넣고 배가 아팠던 어린 시절. 걷는 발길을 잊으면서 가위 바위 보 “너는 무엇을 내놓겠니?” 하면 “가위”라는 말에 가위를 쥐어 보이면 주먹을 예상하여 보를 펴 보인 꼬마는 언제나 지곤 했던 가위 바위 보, 대치 농협에서의 점심 식사 후 오침은 지친 피로를 멀어줌직도 한데 무거운 발걸음은 동지들의 뒷덜미를 잡는다. 충절의 고장, 대나무의 고장, 담양읍에 지친 몸을 끌고 도찻한 것은 오후 5시. 벌써 50km를 넘어선 지 오래다. 피로가 발끝에서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매달려 있다. 담양 군민회관에 몸을 가누고, 흡사 치열한 전투 후 바상병이 치료를 기다리는 모습은 가슴을 슬프게 한다. 3일째, 담양 의보조합 앞 집회를 마치고 굽이굽이 가로수를 비켜가며 지루한 고통의 3시간, 전북 순창이라는 푯말에 환호를 보낸다.(내 고향 전북이어서 였을까....)북소리도 힘차게 산골골이 울려 퍼졌다. 이제 겨우 전남을 벗어났지만 할 수 있다는 오기가 생기고 동지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환갑에 가까운 부의장님의 걸음걸이를 뒤질세라 한점 부끄럼 없이 몸을 가누라 애를 썼다. 점점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 같았다. 방송 차량에서 지겹도록 되뇌이는 노래 소리에 손뼉을 쳤다. 테이프의 많은 노래는 저절로 익혀졌다. 길거리의 코스모스도 이제 눈앞에 다가와 앉는 것 같았다. 예상보다 빨리 순창에 도착하여 화문산 굽이굽이 옷자락을 감돌아 숙소에 도착하였다. 가랑비 흩뿌리는 회문산에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감듯 우리 젊은 행군단은 축구시합으로 그들의 청춘을 불태우며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6시 언제나처럼 규율부장의 지겨운 호각 소리와 함께 기상의 시작되었다. 오후 5시까지 할 오늘의 일정은 어제의 나태함이 용납되지 않으리라. 34km의 강행군이다. 시속 6km로 걷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촉박했다. 휴식시간 10분 전쯤 해서 구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연실색하면서도 우리는 뛰었다. 의보통합과 쌀자급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면 서울 아니, 평양까지라도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행군단과 함께 자고 먹고 걸으며 아픔을 함께하던 농민 약사도, 행군단을 밀&#52271; 취재하기 위해 임실에서 합류한 <말>지 기자도 함께 뛰고 있었고, 유인물 배포조는 질세라 동구밖 50m 멀리 발머리까지 유인물을 건네주고 끄덕이는 농민을 급하게 뒤로한 채 절룩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게 진 할아버지도, 고추 따는 할머니도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어제의 피로가 다시 엄습해 오고 약사의 발걸음을 여기저기서 재촉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하는 동지를 차에 태우려 권유했지만 말미를 뿌리치고 북채를 움켜쥐며 “북소리에 신경을 쓰며 걸으면 덜 아프지 않겠냐”며 휴식이 끝나기도 전에 아까워하며 끝까지 걷겠다는 의지가 고마웠다. 모두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가 느끼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전북동지들이 합류했다. 북소리와 호각 소리에 맞춰 힘찬 구호들이 다가산에서, 오목대에서 메아리 치고 있었다. 100년 전 동학 농민의 합성이 완산벌의 타는 저녁노을에 실려 어우러지듯 전주 입성을 수많은 전주 시민과 동지들이 환영하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이&#45790; 알지 못했다. 단지 오늘 하루도 걷기에 넉넉한 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충남에 도착한다는 것 외에는 서둘러 전주를 출발, 익산으로 발길을 내딛는 순간 군산 입항 식용쌀이 함열읍 개인 창고에 일부가 도착했고 계속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 왔다. 행군을 때려 치우고 결사적인 항거의 대열 속에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행군 또한 너무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속이 두엄자리 같았다. 여산을 지나면서 전화받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오르는 가 싶더니 심상치 않은 소식이 행군 단원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함열로 들어오는 수입 쌀 운반 차량을 막다가 전북도연맹 의장을 비롯 익산 농민 6명이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농민에게 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반 조성은 게을리한 채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부의 망국적 식용 쌀 수입을 다시 검토하고 있음을 꿈속에서라도 반대하련다. 농업을 붕괴시키고 민족을 팔아먹는 정책을 무덤에서라도 항거하련다. 오후 늦게 대전을 거쳐 공주에 도착했다. 유적지도 관광지도 아닌 벼이삭이 고개 숙인 이부형 씨 논에 들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씨앗에서 수확까지 여든 여덟 번 손이 간다는, 자식만큼이나 애지중지 키워 온 잘 여문 벼이삭을 갈아엎는 농민의 심정은 어떠하였으랴? 뒤척이는 잠자리에 땅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이른 새벽에 트럭을 이용하여 큰길가 3km까지 차량 이동을 결정하고 코스모스 가을 길을 서둘렀다. 문금리 큰길가에서 경찰의 아침인사가 시작되었다. 3km만 이동하면 걷지 말라 해도 걸을 테니 차량을 막지 말 것을 요구했다. 옥신각신 몸싸움이 벌어지고, 그 순간 총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농민의 손이 올라갔다. 몇분 후 우리는 걷고 있었고 점심시간에 용서를 비는 경찰과 쌍방 없던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도 수원을 향해 평택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200여 명의 전경들이 길을 막아서며 선두에서 4명을 연행해 갔다. 농민에게 총을 쐈다는 사실이 보도될까봐 약속을 파기하고 물증도 없이 선두에 4명, 무작위 연행을 자행한 것이다. 행군하는 농민의 길을 막고, 몸싸움 중 뒤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총을 소는 공권력 남용은 죄가 안되고 공무 집행 방해죄라니, 농민의 행군을 방해한 죄는 농무 집행 방해가 아닌가? 지금도 대전 교도소에서 차가운 가을을 보내고 있으리라. 의료보험 통합과 통일농업 쌀 자급 실현의 그날을 기다리며. 고난의 9박 10일, 절규의 300km 도보행진이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땅의 농업을, 민족의 먹거리를 지켜내기 위한 우리 농민들의 행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임병술/올해 나이 마흔넷, 전북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88년부터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고 익산군 농민회장을 거쳐 지금은 전북도연맹 부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도보대행진을 통해서 뜨거운 동지애에 감격했지만,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감동보다는 철저한 농촌의 현실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