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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작은 시작이 아름답다. 언제까지 예향으로 불리 울 수 있는가
문화저널(2004-02-12 12:47:48)
업무관계로 타 지역 출신 인사들과 만나 인사 할 때면 대개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전주입니다”하면 “아! 그러세요”하고 부러운 듯한 투로 답해 온다. 그러면서 전주의 음식 맛이 부럽고 판소리가 어떻고 하면서 서먹한 첫인사의 전반부를 일단은 밝게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 관계의 중요한 첫 대목에서 나의 인상이 질 높은 문화 예술의 향기가 베어 있는 부드러운 사람으로 보여진다는 것은 커다란 덤(프리미엄)일진대 그 고마움을 그저 그런 것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는 많은 것 같다. 대개 전주의 어느 고장을 가도 자기네 고장이 예향이라고 내세우고 예향의 고장ООО이라고 푯말로 세운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내세울 만한 역사적인 인물이 한 명이라도 태어났거나 묻혀있기만 해도 그것을 크게 자랑거리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본다.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자랑 할 수 있는 선배가 있다는 것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일이니까 말이다. 하기는 전국, 전 고을의 예향화가 알맹이 없는 문화의 세계화보다는 나을 것도 같고. 요즈음 이 고장에서도 문화 예술이 어떻고 전통 문화가 어떻고 하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다. 문화 예술이 자기의 고상한 취미나 고매한 인격을 조금 더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악세사리쯤의 용도로 문화예술이 얘기된다고 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관심으로 바뀌고 발전하여 각 가정마다 그림 한 점 이상은 걸어 놓자는 운동이 이루어 질 수도 있겠고, 수준 높은 공연이 좌석이 덜 차 공연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 할 일들이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분위기의 형성쯤으로 이해하여야 하리라고 본다. 의도야 어떻든 많은 관심이 이해로 바뀌고 사랑으로까지 발전한다면 그러한 힘들이 뭉쳐져 이 지역의 문화적인 토양을 기름지게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석 며칠 전에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였다는 모임의 행사에 가 보았다. 회원들이 매월 몇 만 원씩의 회비를 모아 다달이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강좌와 공연을 한다는데 어린아이부터 나이드신 분들까지 함께 어울려 치러내는 그 행사를 보고서 서양 문화의 거지꼴로 입혀진 예향의 옷이 다시 제대로 입혀질 가능성을 보았다면 무리 있는 표현일까? 우리 주변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찾아내어 전문가에게서 직접 강좌의 형식으로 듣는 전통문화강좌이며, 전통음악과 요즘 음악을 함께 공연하면서 어울리는 열려진 행사의 작은 힘들이 하나 둘씩 모여 큰 일을 이룰 수도 있다는 조그마한 문화 실천 운동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좀더 힘이 비축되는 내년부터는 이 고장의 맛을 그대로 내는 할머님들을 문화 강좌에 모셔내고 옛 보자기를 다시 만들어 실생활에 쓰이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엄청난 예산을 쓰고도 별 알맹이 없는 행사로 그치고 마는 관주도의 축제보다는 이런 작은 모임의 행사가 많아질수록 다시금 예향의 명예가 회복도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조그마한 문화 실천 운동이 하나의 작은 시작이지만 점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 간다면 그때서야 내 고향은 예향이라고 부끄럼 없이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상들로부터 엄청난 문화유산을 물려받아 누려 왔으면서도 후손들에게 곱게 전해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이 지역의 현실에서 외국 문화의 피해가 어떻고, 중앙 편중이 어떻고 등등 말로만 걱정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적든 크든 간에 가까이 있는데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변명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나서야 한다고 본다. 작은 힘이라도 뭉쳐서 커져가는 후손들에게 오랜 역사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 지혜로 배어 있는 자랑거리를 일깨워 주고 자기 것에 대한 자존심을 세우는 작업을 각 가정과 학교, 사회가 힘을 합쳐 지속적으로 꾸려 가는 강한 전통을 세워야 한다. 어려울지 쉬울지 모를 일이지만 몇 가지 예를 들어 얘기하자면 가정에서는 혼수품으로 비싼 외제 가구를 장만하기보다는 그 유명했던 전주 가구를 시집으로 훨씬 전부터 구입하여 사용하다가 엄마의 손때를 묻혀 보내면서 멋있는 전통 보자기 몇 장을 곁들여 보내는 것도 좋을 일이며, 판소리나 민요 한 대목쯤 흥얼거릴 줄 알게 하는 학교 교육도 고마운 일이며, 우리 고장의 택시를 탔을 때 시원한 이 고장 자연의 소리(새소리, 파도 소리, 솔바람 소리 등등)를 들을 수 있거나 판소리나 민요 한 대목이 울려 나온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지역에 뿌리를 둔 기업은 기업대로 이윤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장기적인 문화 사업을 연구하고 투자해야 할 것이다. 대형 종이 제조업체라면 영세한 이 지역 한지 업계의 활성화를 위해 자사 보유 산림 일부에 닥나무 단지를 조성하고 1차 가공된 한지 원료를 값싸게 공급해 주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전통 전주 한지의 명성을 되찾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대형 목재가공업체라면 전주의 전통 공예가구를 재현하고 공급하기 위해 장인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연구소를 운영해 본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현실성이 결여된 몽상가의 궤변이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어도 좋다. 예향의 전통을 이어 가려는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조금은 귀담아 들을 것 같으니까. 줏대 없고 빛바랜 예향이라는 불명예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글■이동엽 문화저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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