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0 | [문화저널]
이 사람의 세상살이
멋들어지고 애잔한 날라리 소리
풍물연구가 권희덕
글■김성식 전북도립국악원 연구원
(2004-02-12 12:47:22)
권희덕 선생은 말이 많은 분이다. 누구라도 그와 대화의 물줄기를 타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진술은 인상에 불과하다. 수정하면 이렇다. 권희덕 선생은 할말이 많은 분이다. 누구라도 그와 대화의 물줄기를 타고 보면 어느 새 바다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할말이 많다는 것은 하는 일이 많다는 말의 동어반복이다. 적어도 전문분야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항상 듣기만 할 따름이다.
유홍준 교수 정도나 돼야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이 가능함을 나는 직업적으로 절감한다. 향토 민속예술 발굴 및 조사를 주요 일거리로 삼고 사는 필자로서는 마땅한 제보자를 만났다 싶으면 목적 달성을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졸라도 보고 아양도 떨어보고 우회도 해보고 직진도 해보고 심지어 협박도 한다. 그러나 실패하기 일쑤다. 첫째는 내가 그가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는 만큼만 물어보기 대문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만 조사할 따름이고, 일껏 조사한 것이 나중에는 참으로 볼품 없음에 부끄럽기 짝이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사랑하면 알게 되는’ 그 ‘사랑’도 사람 나름이라는 푼수 정도는 알기에 그저 속절없이 듣기만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연휴의 마지막날, 대부분이 노곤함을 달래고있을 무렵에 권 선생님을 만났다. 연휴 끝인지라 집으로 찾아 뵙기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어느 벤취에 한가롭게 자리를 틀었다. 예의 장발머리도 여전하시고, 정열적인 사설과 발림도 여전하시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안녕이고 뭣이고 큰일났어.”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왜(倭)고, 양(洋)이고 간에 이러다간 우리는 다 뺏기겄어. 내가 말여, 지난 달에 대전광역시 학생 국악대회에 심사하러 갔거든, 근데 거그서 심사를 보는데 어떻게 마음이 아픈가 말여, 큰일났다, 국악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진 전주가 대전을 따라 갈라면 앞으로 이십년은 걸리겠다, 뭐냐하면 우리는 그런 팀이 하나도 없는 형편인데 대전은 초등학교 관현악만도 수가 없고, 거그다가 양악하고 섞은 것도 있고, 어떤 학교는 국악관현악에 합창을 하는디 발성도 어찌 그리도 깨끗하고 화음도 좋은지 탄복을 혀버렸지. 대금만 해도 어떤 학교는 육십명이 부는디 혼자 부는 것 같드라고. 여기는 끄떡하면 국악의 뭣이네 허면서 오만헌 얘기들을 잘허는디, 그런 학교가 하나나 있냐 이말여. 있다면 혼자 해서 대회나가는 판소리나 있지. 아 그런말이 있잖아요, 민족의 과거를 볼려면 박물관에 가보고 지금을 볼라면 시장에 가보고 앞으로를 볼라면 학교를 가보라고. 여그는 학교에 가보세요, 관현악단이 하나가 없어요, 너무나 여기 사람들의 오만해요, 대책없이 자신에만 넘치고 말여.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핍박 받아 오면서 지켜서 겨우 남겼는디 타도에서 다 가져가고 있잖아요. 이제 경쟁도 아니고 스스로가 잘하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모든 혁명은 교육혁명이어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갈쳐도 창의적으로 갈쳐야지, 창의적인 것이 발전을 하거든요. 김덕수가 저러헥 했냐 안했냐가 뭣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나는 사물놀이에 국악기만이 아니라 양악기도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선생님은 창의적인 교육을 어떤 식으로 하십니까.”
“지금 시급헌 것은 전혀 안돌아가고 있어요. 장고허고 꽹맥이만 지멋대로 허고 나머지는 전부 허수아비처럼 그냥 따라 다니니 말여, 소고가 들어가서 착착 추어줘야거든. 그래서 농악의 시간파괴, 가격파괴를 위해서 네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농악을 만들고 있지요. 왜냐하면 오케스트라를 가겨■ㅛㄱ파괴, 시간파괴헌 것이 노래방 아녀, 노래방에 가면은 내가 가수가되듯이, 극장문화, 극장에 가면 구경꾼 밖에 더 되냐 이말여. 김덕수가 좋고 잘허는 줄은 누구나 알어. 하지만 박수만 쳐주고 그사람 스타 만드는 것에서 끝나지. 아 저 잘난 맛에 노래방 가잖어. 농악도 그러자 이거여. 모두가 할 수 있는 농악, 그것이 저변확대 아니겄어. 나는 그것을 파괴시키겄다 이거여. 나아가서 이걸 가지고 외국 방방곡곡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 한테 가르치자이거야, 이것만한 상품이 어디 있겠어요, 앞으로는 경제가 아니라 문화싸움이잖아요. 그래서 악보교재를 만들어서 인터넷에 쏘아서 한국에올 관광객들한테 사전교육을 시키자 이거요, 한국에 와서는 네시간만 교육받으면 끝나요”
“푸-하하하하하”
“지금 웃는디, 어이가 없는 모양인데 들어봐, 나는 뭣을 착안했는고니, 영어하고 한글하고발음이 같은 단어를 뽑았어. 그리서 내가 한글로 가르치면 그걸 쪼금 발음만 교정해서 적용하면 그냥 배울 수 있게 만든다 이거여. 예를들면 ‘슬로우 슬로우’를 ‘슬슬슬슬’로 또는 ‘점점빠르게(Sccelerrando)’가 ‘아체르란토’아녀, 이것을 ‘차-쳐라-난타’로 가르치는 거여. 또 삼삼칠(VICTORY)박자, 징글벨 박자를 이용허고, 제일 쉬우면서 재미있는 장단을 뽑아서 농악을 만드는 거여. 그렇게 허면 구경만 허는 농악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배워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런게 필요한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물놀이도 노래를 선택해서 추가했는데요, 노래도 배울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이미 다 아는 노래 즉, ‘갑돌이와 갑순이’ ‘밀양아리랑’ ‘신고산 타령’ ‘회망의 나라로’를 농악 장단으로 부르고 난 다음에 지지고 볶구고 딱 끝내버립니다. 일단은 쉬워야 하니까요. 그것이 농악의 시간파괴입니다”
그는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만든 사물놀이에는 멜로디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아코디온이 들어가고 노래를 삽입시키기 위해서 양악기가 들어 가는데, 예능경연대회에 학생들을 출전시키면 심사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은 이단이야’라며 맨날 꼴등만 준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앞을 내다보며 창작을 해야한다고 강변한다. 자기가 만든 농악 얘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의 농악이라면 배타적으로 받아 들여서 안배울라고 해요. 그래서 각지역 농악의 특징을 뽑아서, 예를 들면 내 농악은 소고가 많은게 특징인데 강원도 소고는 쉽고 운동량도 많아요. 백명도 좋고 이백명도 좋고 앞잽이 하나만 리듬과 진법을 익히면 끝내버려요. 오방진 가세진 을자진 동살풀이 가지고, 여기다 소고북채 끝에 백지를 달면 상모효과까지 납니다. 그리고 중부지방 농악은 매도지어 흥이 나잖아, 그래서 매도지는 웃다리 것, 그 안에 노는 것은 전라도 것, 이렇게, 쉽지만 흥겨운 것 그 이상 심장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더라고. 약이 쓰면 당의정을 맨들어서 얘들한테 먹어야지. 쓴약을 그대로 억지로 멕이면 부작용만 생겨.”
그는 현재 삼례여중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얼핏 농악과 무관해 보이는 과목 같지만 그의 이력을 들춰보면 그다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정읍 옹동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부터 동네의 마을굿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마을에는 부포놀음이 뛰어났던, 일명 사위이다-옹동농악단 상쇠로 박판쇠, 문기수 등이 있어 이들을 통해서 견문수습을 하게 된다. 나중에는 태어난 마을인 산성 농악단, 정읍 농악단을 거치면서 정읍농고 입학후 학교농악단을 창단하기에 이르른다.
당시 정읍에는 ‘예기원’이라는 국악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가야금을 비롯한 국악기를 통해서 민속악과 정악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은방초, 김병섭, 오갑순 등이 이곳을 거쳐간 명인들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만화는 애물단지와 함께 최고 인기인 모양이다. 특히 그에게 만화는 절대적이었나 보다. 만화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이윽고 ‘백설공주’라는 만화영화를 계기로 ‘한국적인 연극형태인 농악을 그림(그는 이대목을 애니매이션이라고 부른다)을 통해서 영화로 제작해보겠다’는 당시로써는 다소황당한 꿈을 안고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굳이 서라벌예대를 선택한 것도 다른 대학과 달리 그 학교만은 무용,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고루 청강할 수 있어서 였다고 한다. 비록 청강은 했다고 하지만 지독한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한 셈이다. 작고한 신동우 화백이 그의 스승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교직생활을 시작한 그날부터 농악 보급이 화신이 된다. 전근되는 대부분의 학교에 농악대를 창설하여 여섯학교에 이르고, 지난 구십오년도에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농악 순회교사로 임명되어 전라북도의 중심학교 이십개 학교에서 사물놀이를 지도한 바 있다.
한편 농악에 대한 그이 열정은 민족음악으로 지평이 넓혀지면서 「농악■선예굿■악기놀이」(81년),「이리랑 민족 예술사」(90년)「농악교본」(95년)등의 저서로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쑥스럽습니다. 하지만 농악은 누가 뭐래도 연극, 음악, 무용, 미술, 종교 등을 모두 망라한 수천년의 전통, 즉 세계제일의 종합예술이요 고등예술 아닙니까. 그래서 전통농악의 역사적인 연구를 하다 보니까 문헌을 두지게 되고, 옛 명인들의 고증을 듣게 되고, 더구나 내가 실기인 출신이라 내 나름대로 독자적인 해석을 하게 되고, 또 남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를
치밀하게 추적할 수가 있어서 책으로 엮어지게 된겁니다. 미술작품은 남아라도 있지요, 미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시급한 것은 사라져 가는 농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독특한 해석으로 인해서 때로는 ‘이단’이나 ‘기인’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손을 거치면 이른바 ‘권희덕식’이 된다. 일테면 모든걸 녹여서 화학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용광로인 셈이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아리랑>의 어원을 ‘우리의 조상신단군 울루’에서 찾는다. 따라서 ‘어럴럴 상사디어’ ‘어야디야’ ‘어기야’등은 모두 울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또는 구한말에 독일의 음악가인 에케르트(Eekert)가 민요 <보렴>을 채보하여 <애국가>를 작곡하였다거나, <방아타령>의 ‘쿵덕’ 소리를 일본인 고가마사오가 기타로 연주하고 본 노래는 <농부가>의 멜로디를 모방하여 만든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라는 노래가 일본 ‘엔카’의 시초가되었다거나, <도라지타령>은 ‘Do you love 조선?’의 한국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는 등 그의 ‘주장’은 다방면에 걸쳐 끝없이 풍부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견강부회로 들리기도 하지만 어쩌랴, ‘우리문화의 수수께끼’가 너무도 많을 진대.
“선생님, 요즘은 주로 무슨 일을 하시나요”
“내가 만든 농악 악보 정리하는 일하고, 전라도가 어떤 땅입니까. 백제가 동아시아를 장악했잖아요, 과연 그러냐, 실증적인, 정신적인 발자취 찾다보니까. 그것이 증명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찾게 되었는데, 칠보에서 아주 선명하게 ‘學堂’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수집했습니다. 그래서 이지역의 역사를 탐구해 보니까, 고려 몽고항쟁기 때 원나라와 화친정책 이후에 대학제도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 대학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칠보에 세워진 유니버시티,즉 ‘학당’입니다. 여기에서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삼국지’를 비롯한 병서들이 많이 읽혔지요. 백제 부흥운동을 했던 주류성전투나 고려 재건운동을 펼치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성계에게 일망타진된 ‘왕익부 사건’ 동학농민운동, 최근의 나뭅군까지 반란의 고장 아닙니까. ‘삼국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교육과 풍요로움이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지금에야 정치적인 인맥은 잘 안나와도 예술적인 인맥은 아직도 강한디가 여그 아닙니까. 그래서 전라도 정신, 즉 노령산맥의 의미를 문화적■역사적으로 알아야 되겠다 싶어서 ‘學堂’의 실증적인 규명을 할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고장의 아름다운 전설, 설화를 수집하고 직접 삽화를 그려서 애니매이션으로 책을 낼까 합니다. 우리도 ‘이솝’이랄지 ‘단테’랄지 허는 외국작가에 대응해야지 않겠어요. ‘소나기’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이 서정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우리 고장의 설화를 수집할려고 합니다.”
해질녘이 되자 을씨년스러워 진다. 절기라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다. 추석을 정점으로 알아보게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아침 저녁으로는 알싸 해진다. 예인가 싶으면 저만치 가있는 듯한 분과 막걸리 한잔이 간절하지만 원고나 마치면 연락 드려야겠다. 시월에는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전북대표로 ‘까치마당’농악패를 이끌고 출전하신단다. 진멋지면서도 애잔한 그의 날라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