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0 | [문화저널]
영화감상
10년을 넘어서 만나는 영국 사회의 풍경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글■김병직 온고을 영화터 대표
(2004-02-12 12:45:16)
씨네마떼끄라는 것이 있다. ‘씨네마떼끄 프랑세즈’라는 프랑스 말에서 비롯된 영화 용어다. 더불어 영화도 보고 토론도 나누고 비평도 하는, 그리고 이런저런 주제의 영화제나 영화강좌도 진행하는 단체 또는 운동을 뜻하는 말이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씨네마떼끄는 그 나라의 영화문화를 살찌우고 활짝 꽃피웠다. 영화예술의 수준을 한차원 끌어올려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은 프랑스의 누벨 바그는 그들의 씨네마떼끄 운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85년에 발표된 영국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문화학교 서울’이나 부산의 ‘씨네마떼끄 1/24’같은 영화 공간을 이용해야 했다. 이들이 마련하는 영화제에서 이 여오하가 단골로 상영되곤 했는데, 80년대 중반의 영국 사회와 영화를, 나아가 서유럽 자본주의의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이해하고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는 ‘쇳덩이 여자’로 불린 대처가 이끌던 시절의 영국 사회가 담겨 있다. 푸르고 어두운 색조의 화면에는 런던 근교의 암울한 살풍경만이 드러날 뿐 대영제국의 찬란했던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 또는 인종간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파키스탄 이민자들과 영국인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동성애도 주된 내용이다. 영화가 발표되었을 때 주류 영화권에서 처음으로 동성애를 본격적이고 긍정적으로 다루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감독은 젊은 남자 사잉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사랑의 한 형태이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인종간에 또는 계급간에 빚어지는 모순을 치유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돈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지는 문제들과 이민자들의 자기 문화나 정신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 등도 이 영화의 내용을 이루고 잇다.
영화의 무대는 런던의 변두리. 이민자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다. 갈색 피부의 청년 오마르는 파키스탄에서 건너온 이민 2세다. 대학에 두 번 실패한 그는 철길 옆 허름한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
눈빛이 매력적인 그의 아버지는 술에절은 채 영국 정부가 주는 실업 수당에 의지해 연명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한 인생인 것이다. 이민 오기 전의 아버지를 빛나게 하던 것들 - 떵떵거리는 가문, 기자 직업과 여러 권의 저술, 사회주의 사상과 정계 실력자와의 교분-은 이제 자취가 없다. 아내마저 기차에 뛰어들어 세상을 더났고, 이제 그에게는 아들이 대학에 진학해 지식을 쌓게 해야 한다는 것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만이 빛바랜 꿈으로 남아 있다.
오마르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숙부의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다. 숙부인 나세르는 돈이 되는 일에 집착이 남다른 성공한 사업가이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동족 시인을 사정없이 길거리로 내치고 함부로 책을 집어 던지는 따위의 일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향에 비하면 영국은 그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아내와 세 달이 있는 집안에서 그는 전제 군주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만, 미모의 백인 정부만은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한다. 나중에 아내의 저주로 정부가 떠나가자 그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오마르는 아버지의 바램을 저버리고 숙부의 현실적인 삶을 선택한다. 장사가 되지 않는 숙부의 세탁소를 영국인 친구 조니와 함게 새롭게단장해 문을 연다. 둘은 다섯 살 때부터 친구였다. <나의 왼발>이나 <라스트 모히칸>같은 영화로 국내에도 상당한 팬이 있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존재는 특별히 매력적이다. 그는 빈둥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펑크족 부랑아들과 한패이다. 어렸을 때 오마르 부자의 따뜻한 선행을, 이민자를 몰아내자는 시위에 동참하고 오마르를 경멸하고 구박하는 것으로 갚았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오마르에게 고용되어 일을 시작한 조니는 오마르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둘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미묘하고 우호적이어서 둘이 물장난하며 긑나는 영화의 마지막이 사뭇 유쾌하고 희망차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조니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인 과거의 펑크족 동료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낟. 그러나 조니는 세탁소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낟. 깨끗하게 탈바꿈한 세탁소는 오마르와 조니가 사랑을 나누는, 곧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공간이고, 갈등을 넘어선 사랑의 공간이면서, 미래로 열린 희망의 공간이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은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이 ‘대처주의’로 요약되는 보수 물결의 영국 현실에서 비켜나 헐리우드와 손잡고 영호를 만들때 자신이 몸담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따뜻한 희망을 제시한다. 실험성의 추구나 특수한 기법과 효과 대신 당대의 모순들을 잘짜인 이야기 구조와 사실주의 극영화의 틀에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얼핏 무거울 수 있는 각각의 주제들은 감독의 솜씨 덕분에 선명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게 전달된다.
TV용으로 만든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가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스티븐 프리어즈는 스타 감독이 된다. 뒤이어 만든 <귀를 쫑긋하게 세워라>, <새미와 로이즈 그걸 하다>에서도 감독은 80년대 영국사회의 민감한 이슈들을 이주민과 하층 계급 의 시각으로 진지하게 조망한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의 하나는 독특한 효과를 거두는 사운드의 활용이다. 타이틀 자막과 함께 들리는 물소리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는 영화 중간중간에 주로 희망적인 장면에서 변주되어 반복 사용한다.
좋은 영화는 사람을 성찰하게 만든다. 이방인 이민족이 온전한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로 피해자의 위치였지만 일손이 필요해 불러들인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의 양심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우리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