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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34 이 지역 미술인들이 최초로 벌인 미술운동 신상 미술협회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미술교육학과 (2004-02-12 12:43:12)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동란의 혼란스럽고 암울했던 시대의 터널을 지나면서 전북 화단은 성숙한 정착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것은 50년대 들어와 개인전이 활발해지고 또한 그룹전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일제를 통해서나마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던 신미술 작가들과 진보적인 전통화가들을 전쟁을 치르면서 많이 잃어버리기도 했다. 어떤 작가들은 좌우익의 정치적 갈림길에서 월북하기도 했고 또한 전란 속에서 세상을 등진 작가들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붓을 던져 버린 유능한 인재들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실제 많은 인물들을 시대적 아픔 속에 묻어야 했지만 남은 작가들은 그 손실을 충분히 보상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북 화단에서 최초로 그룹 활동을 벌린 것은 록광회였다. 록강회가 1950년 창립된 이후 50년대는 지역 화단에 그룹 활동이 뿌리내리는 시대였다. 록광회 이후 1954년에 창립된 신상미술렵회와 1958년에 창립전을 개최한 녹묵회 등의 그룹들이 줄줄이 이어지며 화단의 활동이 윤택해졌다. 록광회와 신상미술협회는 전통 화가들이 모임이었다. 이들은 당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대표적인 작가들이 집합체였다. 물론 이들의 본격적인 그룳은 아니었으나 작가들의 합동 전시는 몇 차례 있었다. 1947년에 열렸던 미술 작가전이나 전북 미술전람회전, 그리고 1952년에 열렸던 합동수채화전이 있었고, 또한 1953년에 열렸던 3.1절 기념 유화합동전시회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작가들의 자발적 모임체로서 이념을 함께 하고 있다는 특성을 들 수 있다. 지역화단에서 본격적인 그룹 활동을 벌인 그룹은 역시 신상미술협회였다. 이보다 앞선 록광회는 어쩐일인지 50년 1회의 전시를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록광회는 회장에 김영창과 김용봉, 문윤모, 허병, 허은, 박승근, 최칠우, 이병하, 서정주, 윤세용, 이의주 등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전쟁의 와중에서 흩어져 갔고 몇 사람은 후일 신상미술회에 참여하게 된다. 신상미술회는 54년 6 월 3일에 창립전을 열었다. 6월 3일부터 7일까지 열렸던 창립전 취지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전략)... 그린다는 것은 비단 화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국통일의 성업을 위하여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인가 합니다....(하략)”라고 밝힌데서 미술인들이 시대적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탑을 쌓아 올리고 개미와 같은 부지런함으로 한걸음도 멈추지말고 정진하자’는 의지를 천명하고 전시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때 회장은 이경훈이 맡았고 회원으로 김용구, 김용봉, 김현철, 권영술, 문윤모, 이병헌, 이복수, 천칠봉, 한소희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록광회 회원이었던 김윤봉과 문윤모가 참여하고 있었음이 눈길을 끈다. 작가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술계가 성장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작가들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나아가 그들의 공동의 삶과 목표에 대해 토론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모습은 곧바로 그들이 당시 작가들에 주어지는 시대적 요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상미술협회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었던 훤로 화가 이복수 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신상미술협회의 창립에 대한 발의자는 이격훈 선생이었습니다. 어느 때인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선생과 셋이서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경훈 선생이 ‘우리도 무엇인가 모임을 결성해서 활동을 해야겠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 제안에 뜻을 같이 하고 후일 모든 일은 이경훈 선생이 맡아 하기로 합의를 보았지요” 당시 그 수가 부쩍 줄어들었던 지역의 작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야외 사생을 하기도 하고 혹은 막걸리 잔을 함께 나누어 어울렸으며, 그러는 가운데 세 사람은 당시 전시장이 없어서 전시장으로 쓰기도 했던 1번지 다방에 모여 이러한 구상을 하게 되었다. 후일 모임 구성을 일임받은 이경훈은 54년 5월 5일에 열렸던 통킹만의 수채화 개인전 때 모임을 본격적으로 발의하고 그룹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통킹만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현재 알려진 바로는 이 지역에서 열린 초초의 외국인 전시였다. 통킹만 전시는 통킹만의 아들이 6.25때 참전군인으로 한국에 왔던 것이 인연이 되어, 아들이 부친의 작품을 가져와 전주 미국공보원에서 전시를 꾸민 것이었다. 이때 이를 환영하기 위해서 지역 작가들이 함께 참조 출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함께 자리를 옮겨 회식을 하던 자리에서 모임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구체적인 결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출품했던 작가들이 후일 신상회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헥 하여 54년 6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첫 창립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신상미술협회전이 열렸던 곳은 미국공보언의 콘서트 막사였다. 전시장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미국공보원이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콘서트 막사는 전쟁때 쓰던 낡고 둥근 건물이었다. 그림을 걸 수 있는 벽이 없던 막사에 간이벽을 만들고 광목으로 둘러 전시를 꾸몄다. 그리고 이때 출품된 작품은 모두 유화로 작게는 4호에서부터 크게는 18호까지 출품되었었다. 이때 전시회를 위해 여러 곳에서 후원을 하였는데 양지다방과 문화연필 주식회사, 그리고 제일제빵소, 대동운수사와 호남 운수사 등이었다. 이들은 약간의 경비를 보태었다고 전한다. 신상미술협회는 일 년에 두 차례씩 합동전을 개최하는 의욕을 보이면서 12회까지 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회원들의 일신상의 변화 등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모임을 주도하고 조직했던 이경훈은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이렇게 중단된 신상회는 79년에 창립 25주년 기념전을 개최하게 된다. 3월 1일부터 7일까지 비사벌 화랑에서 열렸던 전시에는 신입 외원으로 김춘식, 박민평, 배형식, 이동조, 추광신, 하반영, 홍승표가 참여했다.그리고 회장으로 김용봉이 일을 맡았다. 그러나 이렇게 신진 세대들까지 합류하여 재기를 위해 노력했던 신상회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주변 여건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창리보히원들은 이미 생활인으로서, 젊었을 때의 열기를 볻돋우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한 신■구회원들의 세대간의 부조화도 한몫을 했었을 것이다. 어떻든 신상미술협회는 이렇게 해체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남긴 적적은 작지 않았다. 신상회에 참여한 초기의 회원들은 지금 세상을 떠났다. 이경훈과 천칠봉은 일찍 이 지역을 떠나갔으나 다른 사람들은 줄곧 지역 화단을 지키며 붓을 놓지 않았다. 이복수와 천칠봉을 제외하면 주로 교단을 지키며 후진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렸다. 이들 대부분은 주로 구상계열의 인상파 화풍을 남긴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향은 이 지역에 구상회화가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토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화풍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웠던 후진들이 지역 미술을 지켜가고 있다는 데서도 그 공적은 적지 않다. 또한 이들은 전라북도 도전을 개설했고 예술회관 설립을 주도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만들어내면서 전북의 신미술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상미술회의 창립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이 지역 미술인들이 벌인 최초의 본격적인 집단 운동이라는 점이었다. 그러한 출발은 곧이어 58년에 결성된 전토오하가들의 녹묵회 결성에 작극을 주게 되었고,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폭을 한층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본격적인 이념을 앞세운 미술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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