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0 | [문화칼럼]
문화칼럼
새를 보다가 새가 되는 꿈
글■이강실 목사■고백교회
(2004-02-12 12:42:38)
내가 장기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서준식 님을 통해서였다. 그는 재일교포로서 한국에서 서울 법대를 다니다가 8일간 북한 여행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 되어 17년간 감옥살이를 하신 분이다. 안보이데올로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일교포였기에 북한 방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지적이면서도 점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때는 장난기가 다분한 개구쟁이 소년같다. 그러나 17년간의 감옥살이에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과 악법인 사회보안법에 굴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향서를 쓰지 않았으며, 고문에 못이겨 전향서를 쓸까봐 자살까지 기도했던 강철같은 사람이다. 출감한 이후에도 사회안전법의 죄악성고 장기수의 실태를 폭로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일하다가 또 한 번의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인권사랑방’에서 인권의 최고 전문가로 앞장서서 일하고 있다. 귀여운 두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장기수를 위해 무엇인가 구체적인 실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내 남편 한상렬 목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다. 한 목사가 광주교도소에 있었을 때 장기수의 처우개선을 위한 단식농성이 전국의 교소소에서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장기수들은 가족 이외의 외부인 면회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단식 농성의 성과로 외부인 면회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는데 그때 내가 만난 분이 양희철 선생이었다. 그는 고대를 졸업한 후 체포되어 91년 당시 2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전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가끔 면회올 분, 외부인 면회라고는 처음이었다. 그는 57세라는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보였으며, 침착하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나는 ‘총각’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 분의 첫마디가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반열에 낀 것 같습니다.”였다. 그 한마디의 말에는 지금까지 그분이 겪었던 온갖 고통과 아픔이 절어 있었다. 그분의 시중에「새가 되어」라는 시가 있다. 옥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새처럼 높고 멀리 날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새를 본다/물찬 제비가 아니더라도 날을 수 있는 새를/십오척 담보다 높은/밀나무 꼭대기 위를 비상하는 새 날개짓따라/창공의 높이를 가늠해보기 위해/.../때깔 곱지 않아도 좋다/예쁜 목소리 아니어도 좋다/높이 날고 멀리 나는 대붕이고 싶다/대붕의 나래에 마음 실어/바깥 세상에 조감해보고 갇힌자 부도덕성을 날개짓에 풀어 헤치는/그런 새를 본다/새가 된다.
새를 보다가 새가 되는 꿈, 그 꿈이 어서 발리 이루어지기를 빈다.
지금 전주 교도소에는 12명의 장기수들이 있다. 장기수는 ‘형법 98조 간첩죄를 적용받거나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의해 7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를 뜻한다. 우리 고백교회가 제일 처음 정기적인 면회를 했던 부닝 지금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함주명 님이다. 그는 개성 출생으로 한국전쟁때 모두 가족이 월남하여 홀로 북한에 살다가 남한의 가족과 함께 살기위해 공작원으로 자원하여 남파되자 마자 자수하여 남한 에 정착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83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위장자수, 고정간첩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이 부인 이춘자 님을 만나본 적이 있다. 열아홉 살에 21살 연상인 얘가 둘인 함주명 님을 만나 살아온 기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막히다.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부인을 둔 함주명 님은 그래도 행복하시다.
작년에 만난 김성만 님이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어 장기수 대표로 일하고 계신다. 한 목사가 광주 교도소에 있었을 때 만나본 적이 있는 데 매우 쾌할하고 활동적이며 웃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미남 청년이다. 좋은 아가씨 있으면 소개시켜 주고 싶다. 이분의 주선으로 수십 년 동안 이빨로 고생한 장기 수 선생님들이 외부의사의 도움을 받아 틀니를 하고 이빨치료를 해서 매우 기뻐하신다. 김성만 님은 92년 미국유학 중 헝거리와 동독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일로 그 뒤에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지금 12년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 사형언도를 받고 3년 동안 사형수로서 하루에서 몇 번씩 죽는 경험을 한 이야기를 「양심수 작곡 사형수 작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의 어머니는 '내 아들 성만이를 살려달라‘고 외치며 구명운동을 하시다가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렸다.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는 91년 ’세계 30대 양심수‘ 중의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하였다.
선병선 님은 동쪽으로 난 창틀을 20여 개의 화분을 길러 교도소내에 꽃마음을 전하고 계신다. 그는 이곳 저곳에서 구한 과일씨앗이나 정원에서꺾은 나뭇가지를 요쿠르트 병이나 라면그릇에 심어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그는 어린 생명들이 햇빛이 충분하지 못한 교도소 창가에서 제대로 자라지도 또 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식물 기르는 일을 몹시 좋아했고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20여 년간 꽃을 길러서 먹고사는 농부였으며, 초대 한국화훼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민중당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내던 시절, 92년 대선을 앞두고 남조선노동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는 이번 사건의 와중에서 평생을 그의 동지이자 믿음직한 삶의 동반자로 함께 해온 부인을 병으로 잃었다. 그의 부인은 약 10개월 동안 병든 몸으로 수배 생활을 하다가 지병인 담도암에 황달이 겹쳐 악화되자 수배 생활을 포기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운명하였다. 그는 장례식 참석조차 허용되지 않아 0.75평 남짓의 어두운 독방에서 혼자 눈물로 부인을 떠나보내야 했다. 달 셋,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큰딸은 해직교사요, 셋째딸은 민가협 간사이며 둘째 딸은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중이다.
얼마전이 추석이었다. 둥근달처럼 화해와 통일의 추석이 되어야 할텐데 장기수 선생님들을 감옥에 두고 보내는 추석은 쓸쓸했다. 남과 부깅 고향을 오가 며 함게 송편을 만들고 차례를 지내며 성묘를 다닐 날이 언제일름지. 그해 추석의 보름달은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