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문화저널]
문화시평
전통적인 주제 속의 호소력 넘치는 감동
문정근 안무 <아버님 전상서>
글‧하혜영 성심여고 교사‧무용과
(2004-02-12 12:42:06)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했지만 오늘날 물질 문명의 현대 사회에서는 기계화, 정보화 , 탈인간화를 통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끈끈한 정이 사려져 가고 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상이 팽배하여 윗 어른들에 대한 공경심마저 쇠퇴해 가는 가슴아픈 현실속에서, 문정근 무용단은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으로 제 5회 전국무용제에 출전했다. 전국 14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막이 오른 이번 무용제에서 전북을 대표한 문정근 무용단의 <아버님 전상서>는 스토리 전개 과정을 통해 고도의 테크닉한 춤 동작들과, 음악, 조명, 의상 등이 잘 어울려져 한바탕 신명나는 춤판을 벌였다. 종합예술로서 손색이 없는 무대 연출과 수준 높은 예술 작품으로서 우리 춤 무대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이 작품은 날로 위상이 약화되어 가는 우리들의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을 되찾게 하는 또 다른 상(象)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안무가이자 무용가인 문정근은 평소 삶 그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무한한 노력의 부대낌 속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이 열정과 춤의 끼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땀으로 뒤범벅되어 아버님께 바치는 혼신의 춤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두고 그는 "카톨릭의 신앙심이 밑받침이 되어 작품의 안무에 도움을 미쳤고, 이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표출시켜 정신과 육체가 혼연일체가 된 구도적인 독특한 춤 세계를 펼쳐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안장된 선산의 묘지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탈상을 하려는 계획으로 자신의 지난 날의 불효에 대한 고통과 번민으로 슬픔을 못 이기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이러한 애환의 슬픈 감정을 대변하는 애절한 음악이 흐르고, 돌아가신 아버님께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것으로 막은 올라간다. 하지만 써지지 않는 붓을 놓은 채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러한 애달픈 감정을 불사르는 춤을 춘다.
무대 중앙 뒤편에는 무덤이 있고 무덤에서는 검은 장삼을 걸친 잡귀들과 고통과 악몽에 시달리는 장면으로 네 명의사천왕이 등장하였는데, 특히 무대장치에 있어 소품으로 쓰인 스크린 밀러(Screen mirror)의 영상 효과가 인상적인 장면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스크린 밀러와 음향효과, 그리고 특수조명과 같은 보조장치를 통해보는 다섯 명의 잡귀와 사천왕들의 모습은 현실 그 이상으로 비추어져 몇 수십 명의 참 지옥의 모습을 연상시켜 현장감을 살려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관중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신비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무대장치는 공연을 위한 설치 공간으로 상정하여, 무용수들의 동작을 위한 단순한 공간화(setting)로 취급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무대장치와 춤이 이원화되기 쉽지만 이번 작품은 적절한 소품과 충분한 무대장치를 이용하여 관객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는 보조기호를 충분히 수행해 주는 무대기호들과 춤과의 완전한 결합을 통해 작품성을 한층 더 높게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왜냐하면 무대기호들은 단순히 무용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무용수에게는 순간 순간의 시공간적 이미지와 감정을 표출시키는데 있어서 보완적 요소로 작용하며 관객들의 입장에 있어서는 무대기호들의 종합화를 통해 작품의 이해에 더욱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아버님 전상서>는 평범하고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실제 춤의 수준에 있어서는 한국 춤을 대변할만큼 고도의 훈련으로 다져지는 테크니컬한 동작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한국춤의 동작에 있어서는 부드러운 선에서 표출되는 춤동작의 언어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의상에 있어서도 항상 버선을 신어야 된다는 전형적인 패턴이 존재하였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규범을 뛰어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맨발을 통해 표출되는 고도의 동작 동작을 통해 한층 춤의 표출 기법을 다양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ken)이 “무대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있을 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말했듯이, 이번 작품은 한국 춤이 갖고 있는 기본틀과 춤사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맨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뛰고 넘고 하는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동작들을 자연스럽게 기호화한 무한한 창조성을 과시했다.
지옥도(道) 장면을 표현한 장면에 있어서도 음악의 빠른 템포의 박진감 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동적인 동작들은 춤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어 관중들을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 바탕의 춤이 끝나면 음악은 다시 잔잔해지면서 아버지의 영혼세계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의 기억과 순간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춤으로 이어져, 그의 춤 내면에 흐르는 자신의 느낌과 호소력있는 감정을 쏟아 붓는 동작의 움직임은 아버지와 아들의 긴 끈으로 연결되어 춤의 표면과 깊이가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고뇌, 갈등, 슬픔과 기쁨은 관중들의 마음속에 희로애락의 응축된 정서를 심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마주보며 무릎을 꿇은 채 정을 나누는 장면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체감과 더불어 관객으로 하여금 애잔함과 가슴 뭉클한 정서로 이어지게 했으며, 유연성에서 표출되는 부드러움과 온화함은 정신 구도의 세계에서 연상되는 혼의 춤인 꽃춤으로 승화된다. 그러면서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함으로 거문고 가락을 품으면서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이 춤은 내재된 춤의 기량이 숭고함으로 돋보였다.
무용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조명과 음악 및 음악 효과는 흔히 무대-객석의 관계 d형을 설정하는 데 기여한다. 그것들은 두 진영을 절연시키거나, 아니면 때론 관객과 무용수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안무자의 의도를 적절히 표출해 주는 보조 기호들로 충분한 효과를 거두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아버지의 극락 영생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의 그리움은 꽃으로 승화되어, 아버지께 바치는 아름다운 꽃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꽃잎이 하염없이 아들의 모습(편지)에 날린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성스러운 인연의 뜻을 가슴 깊이 묻으며, 지팡이에 몸을 싣고 객석을 향해 걸어나가며, 서서히 내려오는 장면은 무용이 무대의 상연을 위한 무대 예술만으로서의 존재성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정서와 함께 호흡하며 관객을 작품의 빈 공간에 이입시키려는 열린 텍스트를 지향하는 새로운 기법이었다.
이번 작품이 멀리 육지가 아닌 제주도에서 열린 관계로 평소 그를 좋아하고 관심을 가졌던 많은 관객들이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음이 참으로 아쉽다.
하혜영/ 경희대학교 무용과와 같은 대학원을 나왔다. 88년부터 성심여고에서 무용을 가르쳤으며, 사랑이 없는 무용은 예술일 수 없다고 믿고 가르친다고 한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무용을 생활화 할 수 있도록 골고루 가르치고있고, 최근에는 남편에게 배운 마카레나도 학생들과 같이 추었다고. 두 아이의 엄마로 개인발표회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