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저널]
문화시평
향토적 주제와 그 기법의 정착 가능성
제 3회 전북화랑 미술제
글■최병길 원광대 교수■철학박사
(2004-02-12 12:41:15)
제3회 전북화랑미술제가 1996년 9월 10일 삼양문화공간에서의 개막식을 시작으로 16일까지 7일동안 전주의 다섯 개 화랑에서 일제히 열렸다.
이 행사에 참여한 작가를 보면 갤러리 고을에 김치현(서양화)과 김한창(서양화), 아트센터민촌에 오우석(서양화)과 구재산(조각), 얼화랑에 조영철(서양화)과 박천복(서양화), 예루 갤러리에 김충선(서양화)과 홍찬석(서양화), 그리고 정 개러리에 나종희(서양화)와 조의현(조각)이었다. 이들 작가를 전공별로 보면 서양화가가 8명, 조각가가 2명이었다. 따라서 한구고하 전공이 제외되어 있고, 서양화와 조각의 비율도 편차가 심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전공간의 심한 편차는 다양한 장르의 우수한 작품들을 예술애호인들에게 골고루 선보이고자 하는 화랑미술제 본래의 취지에는 크게 모자라는 결과인 것이다.
그 원인은 우선 작가들의 선전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올해까지의 선정과정상 문제점은 언론계의 문화 담당 기자나 미술협회 임원진이나 각 대학의 평론가와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 화랑 단독으로 행해졌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폐습을 고치지 않고서는 전북화랑미술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킬 수 없고 객관성을 띠었다고 인정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도내의 화랑들이 전주에 밀집해 있는데 재력이 영소한 관계로 자연히 화랑 각자에게 도움을 주었던 작가들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그것은 작가의 창작욕구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고 자칫 상업주의적 작품과 예술적인 작품을 예술애호인들에게 혼동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간 3회에 걸쳐 이 행사를 치루어 오는데 있어서 전시공간을 화랑 각자가 선정한 작가별로 나누어 동시적이라고는 하지만 5개 화랑의 전시공간에서 별도로 전시함으로써 화랑미술제의 전체적인 흐름과 특성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내년부터는 예를 들어 전북예술회관의 대 전시실이라든지, 아니면 별도의 큰 전시공간에서 동시에 공동으로 전시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번 미술제에 소개된 작품들이 이 전시회를 위하여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작년에 어느 전시장에서 보았음직한 작품들도 있거나 아니면 막 개인전을 끝내고 마지 못해 다시 한번 전시한 작품들도 있다. 이점은 화랑이나 작가 양측에서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 물론 작가 선정에 있어서 적어도 1년 전에 이루어져야 충분한 제작기관과 홍보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전시 한달 전쯤에 선정통보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졸속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을 열거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주제의 다양성, 둘째, 마티에르 효과의 부각, 셋째, 특징적인 운필법이다.
첫째, 주제의 다양성이 돋보인다. 그 중 하나는 동심적이고 과거 추억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풍광의 충실한 리얼리즘이거나 아니면 약간 변형시킨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이며, 셋째, 특정 종교, 즉 불교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들이고, 마지막은 현실의 이슈를 조형화시킨 작품들이다. 서양화의 경우 동심을 표현한 작가들은 특히 김치현과 홍찬석이 있고, 조각의 경우에는 조의현이 있다. 서양화의 경우 자연 풍광의 충실한 리얼리즘이거나 아니면 약간 변형된 유형의 작가로는 나종희, 조영철, 박천복, 우우석과 김치현이 있으며, 조각의경우에는 구재산이 있다. 불교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가로는 회화작품과 조각작품을 선보여준 김한창을 들 수 있고, 오우석에게서도 간헐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현실의 이슈를 조형화시킨 대표적인 작가로서 김충순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여성 일반의 정체성 혹은 현실적인 여성의 모습 등을 표출했다.
둘째, 화면의 마티에르 효과에 상당히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화가 오우석, 김치현, 박천복, 나종희 등에게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수성페인트나 황토 흙을 접착제로 캔버스에 부착시키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한다든지 아니면 나이프로 긁어낸다든지 하는 방식이 보여지지만, 크게 독창적이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다만 작가가 물감으로써만 자신의 내면의식을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음이 감지되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은 하나의 방법론적인 정당성을 찾을 수는 있지 않나 생각된다. 조각의 경우에 조의현의 브론즈 조각은 인체 표현에 있어서 각 부분의 형태 표현에 있어 그방식을 달리 하고 있는 점도 독특하지만, 특히 패티너 처리에 잇어서 예를 들어 매끄럽게 다듬어진인물의 얼굴과 발은 유화가리로 패티너 처리를 함으로써 광택이 나 있는 반면에, 터치가 보이게끔 마무리한 동체는 묽은 검정색이발색되는 요산으로 패티너 처리를 함으로써 인체 형태가 전체적으로 동적이지 않은 반면에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는 특징이 엿보인다.
셋째, 운필법에 있어서 특징적인 점은 세필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양화가 김한창, 김치현이나 오우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서양화가들이 세필을 즐겨사용한 점인데 전체적인 통일감은 상실하고 있지 않아 미적 호소력이 있어 보였다. 특히 근대미술의 여파로 용인할 수 있는 자연의색체 우선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다양한 색상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점은 모든 작가들이 시대적 감각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색채의 결정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아니면 모방적으로 행해진 일면이 다소 있으므로 예술가 각자의 재고가 요청된다 하겠다.
이제는 미술문화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과 한국, 서울과 지역 사이의 문화적인 수직관곈는 이제 수평관계로 바뀌어가고 있다. 따라서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그 고유한 향토색을 다양한 기법으로 소화시킨 작품이야말로 공감대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북화랑미술제가 그러한 방햐응로 전개되어 나가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