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0 | [문화저널]
꽁트
쑥대머리
글■유재호 소설가, 전북대 불문과 교수
(2004-02-12 12:39:08)
김씨는 해직 교사다. 지금은 허름한 아파트의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절름발이에 가벼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김씨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세계화’라는 구호의 거센 물결과 더불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씨 특유의 그 청개구리 심보가 작용해서였을 것이다. 김씨가 얼마 전부터 국악을 듣기 시작했다.
이젠 김씨가 북 장구 꽹가리 단소 대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등등의 소리에 제법 친숙해져 있다.「사철가」를 비롯한 단가(短歌) 대여섯과「춘향가」안의 몇몇 대목은, 마른 기침을 뱉어가며, 그럭저럭 따라 부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김씨가 이젠 국악을 단순히 ‘듣는’것이 아니라 썩 ‘즐길’정도가 된것이다.
국악을 가까이 하면서 김씨가 이따금 눈시울을 적셨다. 곡이 구슬프거나 가사가 애절해서만은 아니엇다. 남몰래 앓고 있는 그 가벼운 정신 질환 탓만은 아니였다.
때로는 국악이 자아내는 감흥에 겨워 김씨가 눈시울을 적셨다. 때로는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준 이들에 대한 고마운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다. 이미 사십대 후반에 들어선 김씨는 만성 천식을 앓고 있다.
국악을 들으며 요즈음도 이따금 김씨가 눈시울을 적신다. 그리고 이렇게 김씨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기로는, 아무래도,「춘향가」중에서도「쑥대머리」가 으뜸이다.
김씨가 갖고 있는「쑥대머리」테이프는 여자 명창이 부른 것 셋, 남자 명창이 부른 것 둘, 이렇게 다섯 개다. 명창들에 따라 음색이 다르고 가사도 다르고 맛도 좀 다르다.
김씨가 갖고 있는「쑥대머리」를 번갈아가며 듣는다. 그리고 찢다가 찌르고 가라앉았다가 솟아오르고 자지러졌다가 되살아나고 퍼졌다가 오므라지기를 반복하며 이어지는 소리에 취해 자기도 몰래 눈시울을 적신다. 그냥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아예 울먹이기도 한다.
춘향이 홀로 앉어 울음으로 세월을 보낼 적
춘향 형상 살펴보니 쑥대 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 찬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랴
이 대목에서 김씨는 어떤 이야기꾼을 본다. 그 이야기꾼이 엄혹한 사가(史家)의 모습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짖궂기 짝이없는 만담가의 모습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눈을 부라린 독립 투사들의 얼굴로 떠오르기도 하고, 최루탄 파편에 피범벅으로 죽은 제자의 얼굴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김씨의 기억을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에 히말려 어처구니 없이 죽은 사람들이 ‘귀신 형용’으로 클로즈-업 한다. ‘적막 옥방’에서 성고문 당하는 권양의 겁먹은 얼굴이 ‘쑥대 머리’로 클로즈-업 한다. 지금도 ‘적막 옥방의 찬자리’에서 시름하고 있을 수많은 양심수들의 초췌한 모습들이 클로즈-업 한다.
김씨의 머릿속 ‘적막 옥방’에 가득, ‘쑥대 머리’에 ‘귀신 형용’의 ‘울음’이 클로즈-업한다. 김씨가 눈시울을 적신다.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는데, 그들에게는 누가 ‘임’이었을까. 그들에게는 지금 누가 ‘임’일까..........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 후로 일장 수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 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 이러는가
여인신혼 금슬우저 나를 잊고 이러는가
슬며시 이야기꾼이 사라졌다. 그 대신 각양각색의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이 더욱 크게 클로즈-업 하여 그리움, 서러움, 배신감, 절망감을 한꺼번에 토해놓는다.
어디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골방에 틀이박혀 함께 시국 선언문을 작성했던 동료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 있는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6월 10일을 전후하여, 어깨 동무로 거리를 누비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돈 많이 벌어 ‘부모 봉양’하느라고. 배워서 남주냐며 ‘글 공부’하느라고, 아무 ‘겨를이 없이’이토록 감감 무소식인 걸까. ‘여인신혼(與人新婚)’으로 청춘 사업 하느라고. ‘금슬우지’(琴瑟友之)로 희희락락 하느라고, 그날을 ‘잊고’이토록 감감 무소식인 걸까.
김씨가 더욱 눈시울을 적신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김씨가 아예 울먹인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막왕막래 막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 잠 못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손가락에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하고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 볼까
‘적막 옥방’에 가득, ‘귀신 형용’에 ‘쑥때 머리들’의 원망, 탄식, 좌절, 체념이 어우러진다. 김씨가 원망과 탄식과 좌절과 체념으로 눈시울을 적신다.
요놈의 세상. ‘막왕막래’(莫往莫來)로 꽉 ‘막혀’있으니 어찌좋은 소식 있을가나. 요놈의 세상, ‘전전반측’(輾轉反側)으로 도무지 ‘잠’을 ‘못 이루’겠으니 어찌 꿈속에서라도 ‘임’을 볼 수 있을가나.
어디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녕 아무 ‘겨를이 없이 이러는가’. 정녕 그날을 ‘잊고 이러는가’.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이 애처롭게 ‘사정’한다. ‘간장의 썩은 눈물’로 처절하게 하소연한다.
김씨가 연방 마른 기침을 뱉으며 울먹인다. ‘임’이 오기만 한다면, ‘임’을 볼 수만 있다면, 절름발이 아니라 앉은뱅이가되어서라도 어서 빨리 달려 가련만.......
이화일지 춘대우 내 눈물을 뿌렸으면
야우문령 단장성에 임도 나를 생각헐까
추우오동 엽락시에 잎만 떨어져도 임의 생각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이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키우고 있다. 김씨가 애써 울음을 삼킨다.
봄이면 봄마다 그토록 ‘눈물’ ‘뿌’리고 피땀 흘렸으니. 어찌 세상인들 무심할 수 있으랴. 할복으로 분신으로 투신으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이화(梨花)처럼 제물로 스러져갔으니, 어찌 ’임‘인들 끝까지 무심할 수 있으랴.
김씨가 다시 울먹이는 가운데 불끈 주먹을 쥐어본다. 그래, 요놈의 세상 비록 ‘막왕막래’(莫往莫來)로 꽉 ‘막혔으’되 여기서 꺽일 수는 없다.
배내리는 밤 ‘단장성’(短腸聲)에, ‘임’이 어찌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지 않으랴. ‘적막 옥방’늦가을에 낙엽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은 ‘임’을 ‘생각’하거늘....
녹수부용 채련녀와 제룡망채엽이 정부들도
낭군 생각은일반이나 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것나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이 다시 원망, 탄식, 좌절, 체념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김씨가 다시 원망과 탄식과 좌절과 체념으로 눈시울을 적신다.
옛적에 ‘연따는 여인네들’ ‘뽕따는 여인네들’이 전장에 나간 남편을 그리느라 ‘연’따고 ‘뽕’따는 것을 잊은채. 멍하니 먼 하늘만 쳐다보았대나 어쨌대나.
하지만 ‘연못’과 ‘뽕밭’이 어떻게 저 ‘적막 옥방’과 같을 수 있으랴. ‘연’따고 ‘뽕’따던 그 ‘여인네들’이 어떻게 저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과 같을 수 있으랴
‘임’이 오지 않으니 찾아나서기라도 해야 되련만, ‘적막 옥방’에 갇혀 있으니 어찌 ‘임’을 찾아나설 수 있겠는가. ‘임’을 기르며 하늘이라도 쳐다보고 싶으련만 ‘적막 옥방’에 갇혀 있으니 어찌 하늘인들 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에 임을 못보고 옥중 원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는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오
무덤 앞에 섰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인즉
생전 사후 이 원한을 알어줄 이 뉘 있드란 말이냐
판소리 가수가 찢는 듯 찌르는 듯 가라앉는 듯 자지러지는 듯 울부짖는다. 김씨가 끼억 끼억 울먹이기 시작한다. ‘귀신 형용’에 ‘쑥대 머리들’이 애처롭게 처절하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적막 옥중’에서 죽어도 좋소, 하지만 죽어서도 ‘원혼’으로 떠돌며 끝까지 ‘임’을 기다릴 것이오. ‘상사목’되고 ‘망부석’되어 긑까지 ‘임’이 오는 것을 지켜볼 것이오
어디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잇는가. 정녕 그날을 잊었는가. 그날의 약속을 정녕 잊었는가. ‘이 원한을 알아줄 이’, ‘임’이 아니면 그 아무도 없거늘...........
퍼버리고 앉어 설리 울음을 운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이번에도 역시, 그 이야기꾼이 엄혹한 사가(史家)의 모습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짖궂기 짝이 없는 만담가의 모습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눈을 부라린 독립 투사들의 얼굴로 떠오르기도 하고, 최루탄 파편에 피범벅으로 죽은 제자의 얼굴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번에도 이야기꾼의 말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김씨의 기억을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에 휘말려 어처구니 없이 죽은 사람들이 ‘귀신 형용’으로 클로즈-업 한다. ‘적막 옥방’에서 성고문 당하는 권양의 겁먹은 얼굴이 ‘쑥대 머리’로 클로즈-업 한다. 지금도 ‘적막 옥방의 찬자리’에서 시름하고 있을 수많은 양심수들의 초췌한 모습들이 클로즈-업 한다.
이번에도 김씨의 머릿속 ‘적막 옥방’에 가득, ‘쑥대 머리’에 ‘귀신 형용’의 ‘울음’이 클로즈-업한다. 김씨가 눈시울을 적신다.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는데, 그들에게는 누가 ‘임’이었을까. 그들에게는 지금 누가 ‘임’일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가. 김씨의「춘향가」에는 ‘춘향이’가 없다. 김씨의「쑥대머리」에는 이렇게 ‘춘향이’도 없고 ‘이도령’도 없다.
지난 추석 전야에도 김씨가「쑥대머리」를 들었다. 다섯 가지「쑥대머리」를 번갈아가며 연거푸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눈시울을 적시고 아예 끄억끄억 울먹이기도 했다.
그날 낮에 김씨가 단골 약국에 약을 사러 갔었다. 약국 벽에 ‘지명 수배자’명단이 붙어 있었다. 주로 얼마 전에 ‘통일대축전’을 주관한 한총련 대학생들이었다. 적어도 사진으로 보아서는, 다들 활기차고 구김살없이 잘생긴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진과 더불어 죄명이 명기되어 있고 300~500만원의 현상금마저 걸려 있었다.
지난 추석 전야에는, 바로 그 얼굴들이 김씨의 ‘쑥대 머리들’이었다. 김씨의 머릿속 ‘적막 옥방’에 가득, 바로 그 얼굴들이 ‘귀신 형용’으로 처절하게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김씨는 정말 가벼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김씨의 부인이 애교와 핀잔을 섞어 거기에 붙인 병명이 ‘어사 출두병’이다
유재호 / 서울대 불문과와 같은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언어학을 전공했으며, 남다른 감성으로 대학민주화운동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해왔다. 몇 년전「지극히 작은자 하나」라는 소설을 유서로라는 필명으로 냈다. 얼마전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