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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 [문화저널]
1996년 10월호
문화저널(2004-02-12 12:36:37)
문화칼럼 새를 보다가 새가 되는 꿈 글■이강실 목사■고백교회 내가 장기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서준식 님을 통해서였다. 그는 재일교포로서 한국에서 서울 법대를 다니다가 8일간 북한 여행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 되어 17년간 감옥살이를 하신 분이다. 안보이데올로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일교포였기에 북한 방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지적이면서도 점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때는 장난기가 다분한 개구쟁이 소년같다. 그러나 17년간의 감옥살이에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과 악법인 사회보안법에 굴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향서를 쓰지 않았으며, 고문에 못이겨 전향서를 쓸까봐 자살까지 기도했던 강철같은 사람이다. 출감한 이후에도 사회안전법의 죄악성고 장기수의 실태를 폭로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일하다가 또 한 번의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인권사랑방’에서 인권의 최고 전문가로 앞장서서 일하고 있다. 귀여운 두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장기수를 위해 무엇인가 구체적인 실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내 남편 한상렬 목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다. 한 목사가 광주교도소에 있었을 때 장기수의 처우개선을 위한 단식농성이 전국의 교소소에서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장기수들은 가족 이외의 외부인 면회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단식 농성의 성과로 외부인 면회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는데 그때 내가 만난 분이 양희철 선생이었다. 그는 고대를 졸업한 후 체포되어 91년 당시 2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전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가끔 면회올 분, 외부인 면회라고는 처음이었다. 그는 57세라는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보였으며, 침착하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나는 ‘총각’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 분의 첫마디가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반열에 낀 것 같습니다.”였다. 그 한마디의 말에는 지금까지 그분이 겪었던 온갖 고통과 아픔이 절어 있었다. 그분의 시중에「새가 되어」라는 시가 있다. 옥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새처럼 높고 멀리 날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새를 본다/물찬 제비가 아니더라도 날을 수 있는 새를/십오척 담보다 높은/밀나무 꼭대기 위를 비상하는 새 날개짓따라/창공의 높이를 가늠해보기 위해/.../때깔 곱지 않아도 좋다/예쁜 목소리 아니어도 좋다/높이 날고 멀리 나는 대붕이고 싶다/대붕의 나래에 마음 실어/바깥 세상에 조감해보고 갇힌자 부도덕성을 날개짓에 풀어 헤치는/그런 새를 본다/새가 된다. 새를 보다가 새가 되는 꿈, 그 꿈이 어서 발리 이루어지기를 빈다. 지금 전주 교도소에는 12명의 장기수들이 있다. 장기수는 ‘형법 98조 간첩죄를 적용받거나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의해 7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를 뜻한다. 우리 고백교회가 제일 처음 정기적인 면회를 했던 부닝 지금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함주명 님이다. 그는 개성 출생으로 한국전쟁때 모두 가족이 월남하여 홀로 북한에 살다가 남한의 가족과 함께 살기위해 공작원으로 자원하여 남파되자 마자 자수하여 남한 에 정착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83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위장자수, 고정간첩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이 부인 이춘자 님을 만나본 적이 있다. 열아홉 살에 21살 연상인 얘가 둘인 함주명 님을 만나 살아온 기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막히다.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부인을 둔 함주명 님은 그래도 행복하시다. 작년에 만난 김성만 님이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어 장기수 대표로 일하고 계신다. 한 목사가 광주 교도소에 있었을 때 만나본 적이 있는 데 매우 쾌할하고 활동적이며 웃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미남 청년이다. 좋은 아가씨 있으면 소개시켜 주고 싶다. 이분의 주선으로 수십 년 동안 이빨로 고생한 장기 수 선생님들이 외부의사의 도움을 받아 틀니를 하고 이빨치료를 해서 매우 기뻐하신다. 김성만 님은 92년 미국유학 중 헝거리와 동독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일로 그 뒤에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지금 12년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 사형언도를 받고 3년 동안 사형수로서 하루에서 몇 번씩 죽는 경험을 한 이야기를 「양심수 작곡 사형수 작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의 어머니는 '내 아들 성만이를 살려달라‘고 외치며 구명운동을 하시다가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렸다.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는 91년 ’세계 30대 양심수‘ 중의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하였다. 선병선 님은 동쪽으로 난 창틀을 20여 개의 화분을 길러 교도소내에 꽃마음을 전하고 계신다. 그는 이곳 저곳에서 구한 과일씨앗이나 정원에서꺾은 나뭇가지를 요쿠르트 병이나 라면그릇에 심어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그는 어린 생명들이 햇빛이 충분하지 못한 교도소 창가에서 제대로 자라지도 또 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식물 기르는 일을 몹시 좋아했고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20여 년간 꽃을 길러서 먹고사는 농부였으며, 초대 한국화훼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민중당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내던 시절, 92년 대선을 앞두고 남조선노동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는 이번 사건의 와중에서 평생을 그의 동지이자 믿음직한 삶의 동반자로 함께 해온 부인을 병으로 잃었다. 그의 부인은 약 10개월 동안 병든 몸으로 수배 생활을 하다가 지병인 담도암에 황달이 겹쳐 악화되자 수배 생활을 포기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운명하였다. 그는 장례식 참석조차 허용되지 않아 0.75평 남짓의 어두운 독방에서 혼자 눈물로 부인을 떠나보내야 했다. 달 셋,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큰딸은 해직교사요, 셋째딸은 민가협 간사이며 둘째 딸은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중이다. 얼마전이 추석이었다. 둥근달처럼 화해와 통일의 추석이 되어야 할텐데 장기수 선생님들을 감옥에 두고 보내는 추석은 쓸쓸했다. 남과 부깅 고향을 오가 며 함게 송편을 만들고 차례를 지내며 성묘를 다닐 날이 언제일름지. 그해 추석의 보름달은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 정인승 선생, 10월의 문화인물로 한글 사랑의 외길 걸어온 건재 정인승 선생 전라북도 출신의 국어학자 건재 정인승(1897~1986)선생이 문화체육부가 정한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정인승선생의 본관은 동래, 호는 건재. 전라북도 장수에서 한학자 정상조 씨의 3남 2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고웁하다가 21세에 용담공립보통학교를 뒤늦게 졸업했다. 29세 때인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전북 고창고보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일제 당국의 감시와 방해로 한글교육을 못하게 되자 1935년 사직했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큰사전」편집주간을 맡았던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난 건재는「큰사전」편찬에 혼신의 힘을 쏟아 1957년 한글날에 완성시킴으로써 우리말 발전에 큰 족전을 남겼다. 광복후에는 전북대■중앙대■건국대 교수와 전북대 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말 교재 편찬과 교사 양성에 힘쓰며 줄곧 ‘한글 사랑’의 외길을 걸어왔다. 학술원회원■한글학회 명예이사 및 고문을 지냈으며,「큰사전」편찬 공로상, 국어운동특별공로상, 학술원상,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한글독본」,「한글문답」,「표준고등말본」,「의문해설한글강화」등이 있다. 정인승 선생을 기념하는 행사로 ■문집「건재 정인승 선생이 학문과 인간」발간(국립국어연구원)■한국어문화 학술강연회(10월 4일 오후 3시 중앙대 국제회의실)■한말연구학회 학술강연회(10월 18일 오후 2시 건국대 상허도서관)■연세대 국학연구원 학술강연회(10월 10일 오후 2시 40분 연세대 연구관)■한글학회 학술 강연회(29일 오후 7시 한글회관 강당)■정인승 관련자료 전시회정인(10월 1일~31일 국립중앙도서관 소전시장)등이 열린다. 그러나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정인승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지만, 정작 큰 인물을 배출한 전북지역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기념사업이 마련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문정근씨 <아버님 전상서>로 안무상 수상 문정근 씨가 <아버님 전상서>로 제 5회 전국무용제에서 안무상을 수상했다. 문정근 무용단은 9월 4일부터 12일까지 제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 5회 대회에 전북대표로 참가했었다. ‘섬, 바람, 파도, 타오르는 몸짓’을 주제로 열린 이번 무용제에는 14개 시도 무용단이 참가해 춤의 축제를 열었다. 이번 무용제에서는 최우수작품 수상이 없이 대구컨템포러리와 광주 현대무용단이 공동 우수상을 수상했다. 연기상과 함께 개인에게 주어지는 안무상을 수상한 문정근 씨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불교적인 색채가 관람객들에게 쉽게 전달된 것 같습니다”고 &#51099;게 소감을 밝혔다. 최우수상 작품이 없어 안무상을 수상한 것이 한편으로 무거운 마음이라고 털어놓은 그는 개인으로서는 영광인 안무상을 수상했지만 한여름내내 땀흘려 연습한 단원들의 열정이 더욱 값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님 전상서>는 전통적으로삶의 근간이 되어 왔던 효의 의미를 재조명한 작품으로 불교적인 소재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고 있다. 물질이 정신을 앞서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족이라는 끈끈한 구성체와 그 구성원간의 유대감을 무너뜨리는 일이 왕왕 벌어지고 잇는데 작품은 이런 사회현상에 주목, 아버지의 자리를 그려내고 있다. “사천왕사, 지옥도 등 불교적 소재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해, 우리의 전통의식으로부터 이어진 한국춤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고 싶었다”는 이 작품은 참가작품 중에서도 전통춤을 현대적 감각으로 살려낸 실험성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미술과 조명 등의 특수 효과를 살려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월 11일로 예정된 전주공연은 전북학생회관에서 펼쳐지며 작품에 앞서 화관무, 풍물놀이와 춤 등이 같이 모대에 오른다. 전주의 옛지명 되찾기 시민공청회 경원동의 옛이름은 동문네거리, 교동의 옛이름은 중바위, 금암동의 옛이름은 앞금다리, 남노송동은 참나무정, 다가동은 소금전다리, 주오하산동은 가마귀골, 인후동은 가재미골....... 전주의 마을 거리 그리고 학교를 우리 옛이름으로 되찾자는 시민단체들의 열기가 뜨겁다. 지난 9월 19일 황토현문화 연구회(회장 신정일)와 전북환경운동연합(상임의장 전봉호)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주의 마을, 거리 그리고 학교를 우리 옛이름으로’ 되찾기 위한 전주시민공청괴가 전주시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발제에서 최승범 교수(전북대 국어학과 명예교수)는 전통이란 입으로만 외쳐서 가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긴 역사와 찬란한 전통을 똑바로 알고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의 의식의 짜임새에 줏대가 있을 때 진정한 문화적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어진 두 번째 발제에서 신정일 회장은 전주의 옛지명을 되찾자는 운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전주의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라고 말하고 마을과 거리, 다리, 아파트 드으이 본래 이름을 되찾아 주었을 때, 사라져버린 전주 팔경과 전주 팔미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공청회에는 100여명의 관심있는 시민들과 시의원 및 전주시 공무원들이 참석했으며, 발제에 이어 김기천(전주시 도시계획국장), 이재천(전주시의원), 최형재(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류장우(풍남제전위원회 사무국장)씨 등이 토론에 나섰다. 한편 전주의 옛이름을 되찾자는 운동은 몇해전부터 각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지난 6월부터 황토현문화연구회와 전북환경운동연합, 그리고 몇몇 전주시의원들이 발의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날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은 전주의 옛지명을 되찾는 일이 전주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전주의 문화를 계승하는 일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동계U대회에 앞서 실행될 것을 전주시와 관련기관에 촉구했다. “96한국화-동질성의 회복전” 각 지역 화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편협한 예술 문화 활동에서 벗어나고자 뜻을 모은 제 8회 동질성-회복전이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전북예총이 주최하고, 96한국화-동질성 회복 추진위원회(송계일 위원장)가 주관한 이 전시에는 대구, 광주, 전주, 대전, 부산 등지에서 43명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동질성 회복전’은 91년 대전 전시회를 시작으로 올해 8회째를 맞이하였으며 전주는 94년부터 3회째 참가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전주■무주에서 열리는 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접목하여 지방화 시대를 열어 가는 하나의 계기로 삼고자 기획되었다. 송계일 위원장은 “중앙중심적 예술활동에서 벗어나 중부와 영,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화 작가들이 각 지역간의 특성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 연구하는 자리”라며,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 문화전통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기라고 밝혔다. 각 지역의 지역적 특성과 지방색을 극복하고, 일정한 주제없이 한국화와 서양화의 자유로운 형식이 다양하게 표현된 작품을 통해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한데 어울어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데 의미를 두고 있는 이 전시회는 서울과 일본 전시도 계획되고 있다. 대구의 권정찬■김동관■김미아■김봉천■박해동■신현대■장두일■정치환, 광주의 김대원■김동주■김재일■박행보■서남수■오견규■위성만■장현우■주재현■하철경 전주의 김경희■김백섭■남성희■송계일■송재명■윤명호■우상기■이상찬■이순구■이철규 대전의 강구철■김석기■상성규■이계길■이재호■이종필■정경철■정명희■정황래■허진권 부산의 김정숙■박충검■오낭자■전래식■최광규 씨 등이 참여했다. 청소년을 위한 오페라 해설 음악회 생활과 함께 하는음악 뿌리 내리기 그 동안 도내에서 열리는 서양고전음악 연주회나 오페라공연에는 일부 전공인들이나 수련과정에 있는 학생 등 객석을 찾는 청중들이 일부에 국한되어 왔다. 전문연주회장으로서의 시설과 설비가 부족하고 이로인해 양질의 연주회가 유치되지 못해 온좀, 또한 이를 포함한 시■도 예술단의 행정적 지원 부족 등 많은 복합적 요인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을 직접 공급하고 있는 공급자들의 안이한 자세다. 일반인들에게 ‘어려운’장르로 인식되어 온 서양 고전음악의 울타리 안에 이들이 쉽게 들어설 수 있게 하고 즐길수 있도록 안내하는 적극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이 미흡했고 이런 교육적 연주회의 지속적인 개최라는 배려도 부족했다. 연주회 팸플릿이나 전단 제작에도 래퍼토리에 관해 쉽게 풀어쓴 해설과 안내가 아쉬운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다. 오히려 서양고전음악을 널리 대중화하는데 효과적인 미래의 수요자라 할 수 있는 학생들과 모처럼 큰맘(?)먹고 다가서는 청중들에게 무관심해왔고 손을 쓰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전북지역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서양 고전음악단체는 전주시립교향악단과 군산시립교향악단 등 시립교향악단 두 개와 정읍교향악단을 비롯해 많은 수의 중소규모 실내악단들이 정기 혹은 비정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각 시에서 운영하는 전주, 군산의 시향과 일부 실내악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연주발표를 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런 연주회 일정속에서는 청소년과 일반인을 위한 장기적인 교육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추진하기란 당초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각 시에서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시향의 경우에도 예산의 확보의 어려움과 적극적인 프로그램 기획력의 결여로 본격적인 교육프로그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지역 연주회의 현실에서 연주회가 열리는 공연장으 찾는 청중들 또한 고정적인 고전음악 팬은 일부이고 많은 수가 뜨내기라고 할 수 있는 동원성 청중들이다. 이런 모습은 지난 수원시향(지휘 금난새)과 같이 이름있는 외부 연주단체의 전주공연무대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지휘자는 무대에 등장해서 까지도 소란스러운 객석은 연주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을 제공하고 소수의 피해를 주어 지역적 이미지를 손상시키는데 충분하다. 적은 수의 청중들이 모인 가운데서도 진지한 연주회장 분위기가 이루어져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다. 이런 지역의 서양고전음악 연주회 풍토 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극적인 무대교육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청소년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장기간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장 교육은 일선 학교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서양 고전음악 감상법이라는 음악교육의 연장이며, 구체적인 생활교육이 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난 9월 7일(토요일)오후 7시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린「청소년을 위한 오페라 해설 음악회」는 실험적인 무대이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김선옥 교수(전북대학교)제자 음악회로 열린 이날 오페라 해설 음아고히는 청소년을 중심대상으로 오페라 곡의 해설과 감상안내로 연주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해설자로 무대에 오른 김선옥 교수는 이미 이러한 교육적 연주회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중앙연주무대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일선 학교에서는 클래식 음악감상법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회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곡이나 연주에 대해서 모르기도 하고 어렵기때문이다. 기악과 같이 가사 없이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더더욱 지루해지기 쉽다. 특히 대개의 경우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나 독일어로 이루어진 곡들이어서 더욱 듣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쉽게 기획했다”고 이번 연주회를 소개했다. 또한 이날 오페라 해설음악회에서 무대에 오른 대부분의 성악가들이 일선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사들로서 연주자와 청중간의 교육적 의미도 돋보였다. 두 번째「열린 문학 까페」-박남준 시인 편 작가와 독자의 친밀한 만남 전북청년문학회의「열린문학까페」그 두 번째 자리가 9월 19일 저녁 7시, 기린로에 있는 아사달 커피솝에서 열렸다. 열린 문학까페는 지난 7월에 시작해 격월로 진행, 셋째 주 목요일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이 지역 작가 1명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다. 이번에 초대된 작가는, 안으로몰입하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슬픔의 시어들을 간직하고 있는 박남준 시인(40). 박남준 시인은 1984년「시인」에 등단, 지금까지「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1990),「풀여치의 노래」(1992년),「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네」(1995년) 등 세 권의 시집과 산문집「쓸쓸한 낮의 여행」(1993)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날 문학까페에는 50여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참여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타지역 청년문학 단체들이 소극적 활동을 보이거나 문을 닫는 대외적 주변 상황과 기성 문학인들 중심으로 열리는 단합 모임과 같은 성격의 도내 문학회의 일반적인 흐름과 달리「열린문학까페」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탐구 자세를 견지하는 모임으로 참가자들 모두가 지역 문단을 포함해 한국문단의 다음 세대를 구성하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참가자들을 바라보고 연단에 앉은 작가가 작가 자신의 출생과 가족사를 비롯한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이어 질문지를 받아 작가와 참가자들의 답변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현을 조이고 푸는 듯한 문학과 삶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작가의 문학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참가자들은 감지하게 되고 작가와의 공감과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참가자들이 그리는 문학에 대한 이해의 장 또한 넓혀져갔다. 이러한 전북청년문학회의「열린문학까페」는,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문학적 호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기성작가와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열린문학까페」는 앞으로 11월과 내년 1월로 이어지면서, 작가의 작품 및 삶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솔솔한 재미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것으로 기대된다.「연어」의 작가인 시인 안도현 씨와 소설가 이병천 씨 등 익히 들어온 이 지역 유명(?)작가를 비롯해 이 지역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무명 작가들을 초청해 자리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전통장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의 장으로 묻혀져가는 전통 시골장이 그나마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시골 전통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모든 정보와 이야기가 한데 모이는 접촉의 공간이자, 전통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되고 농촌이 무너지면서 전통 시골장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전북도가 발표한 정기시장현황에 의하면 도내의 시장수는 모두 81개로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전주의 중앙시장, 남부시장처럼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이 30개이며, 나머지 51개가 5일마다 열리는 전통 시골장인 셈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의 결과 51개의 전통시장 가운데 22개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으며, 나머지 29개 장 가운데서도 18개가 재개발이나 보소가 필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결국 1개의 전통장만이 시골장의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1902년 개설되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함열장이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태인, 무풍, 동계 등 전통있는 시골장들도 기능상실로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장은 한때 물산이 풍부한 농업생산의 중심이자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전통농도의 가장 활기찬 시장으로 한국 근대사의 애환을 격렬하게 겪었던 지역들이지만, 지금은 완연히 쇠퇴한 곳들이다. 무엇보다도 근대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인구감소를 겪었고 현대적인 유통시설들에 밀린 까닭이다. 지금의 전통장은 대부분 일선 자치단체의 소유이지만 제기능을 잃어버린 시골장을 되살리려는 자치단체는 없다.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일부 전통장터들은 이미 시장의 패홰되어 다른용도로 사용되거나 보수가 긴요한 실정으로, 전통장의 정취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전북도에서는 재래시장들의 현대화를 위해 중소유통업 구조개선자금을 융자지원한다는 방침이지만 이것이 곧 전통장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전통장은 윗세대들의 추억 속에서만 자리잡아 있는 것이다. 농촌에서도 24시간 편의점이 곳곳에 들어서고 시장의 용도와 기능이 제한적으로 활용되면서 전통장은 이제 그 의미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꾼다면 우리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는 이때 전통시장의 정취를 기억하고 그 본래 모습과 기능을 되살리는 것도 의미있는 문화적 이벤트가 될 것이다. 특집/음식문화 입맛이 변했나 음식이 변했나 글■김태호 문화저널 기자 사회생활의 중심 영역이 이미 집안에서 집 밖으로 옮겨간 오늘날의 사회 구조 속에서도 음식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고있는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식탁에서는 흔히 ‘음식이 변했는지, 입맛이 변했는지’ 하는 말이 나오기 예사다. 월등히 풍성한 식탁임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그 맛깔지게 개운했던 ‘그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조미료를 더하고 보기좋은 덕을 놓고 도 막상 입맛에 썩 당기는음식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꼭 꼬집어 ‘이건 이렇다’말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화학조미료를 탓하기도 하고, 대량생산과 모양새를 따지는 농산물의 개량된 종자 탓을 하기도 한다. 생산과 소비의 차원에서 본다면, 가장 기초적 소비활동인 식생활이 생산활동 못지 않게 중요시되고있음을 나타낸다. 그만큼 맛을 찾게 되고 입맛도 까탈스러워졌다는 얘기다. 우리의 맛을 잃어가고있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종속시키는 식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맛에 대한 정체성 또한 희석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소비 활동의 질적 증가와 편중된 영양섭취 그리고 각종 스트레스 등이 가져온 지나친 다이어트나 음식거부 또는 병적인 과식 등 식습관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현상들, 수입농산물이 재래시장에서까지 대량유통되면서 비롯된 보이지 않는 위기의식, 서구식 패스트푸드의 급속한 확대에 이어 서구식품 유통업체의 직접진출 등이 두드러지면서부터이다. 건가오가 직결된 음식문화가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고 잇는 중요성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 영역으로 인식되어왔던 먹을 것에 관한 문화가 우리 고유의 맛과 정체성의 문제로 대두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먼저, 범람하는 서구식 식문화에 대한 부적합성이 지적된다. 서구화된 식습관이 우리 몸 속에서 감지할 수 없는 전통적 미감까지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햄버거와 프라이드 치킨, 피자 등을 일상적으로 먹고 거리에는 웬디스, 맥도널드, 아메리카나. 피자 인, 피자 헛 등 국적을 잃어가는 낮선 식문화가 성황중이다. 아이들은 김치나 된장보다도 피자를 좋아하고 햄버거를 선호한다. 이런 패스트푸드가 정작 본고장인 미국에서 괄시받고 있는 것은 웃지 못할 일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시작된 서구식 식생활은 1945년 해방부터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각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해방기엔 낮은 생활 수준으로 식문화 자체가 발달하지 못했다. 질적인 변화의 시작은 전쟁중에 미국의 원조물자가 이땅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일부 상류층의 기호품에 불과했던 분유가 일반에게도 원조물자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빵, 과자가 보편화 되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 옥수수와 함께 초컬릿, 젤리, 비스킷, 킨디, 껌 등을 쉽게 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쌀부족 현상으로 분식과 보리혼식이 장려된다. 이와함께 식생활 개선이라는 명목아래 전통식단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서구식 식생활습관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또한 주부의 가사 노동 시간을 절약시키는 이로하능로 가공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보리, 콩, 밀 등 곡물 소비가 감소하고 과일류와 서구식 가공식품의 소비가 증가하고 종류가 다양해 진다. 이런 서구 식문화의 일반화는 80년대에 오면서 서구식 패스트푸드의 급속한 확대를 가져온다. 또 9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로바다야끼, 투다리 등의 이본식 식문화와 서구 식품유통업체의 직접 진출은 전통 식문화를 점검 궁지로 몰았다. 서구식 외식산업의 발달은 음식문화가 주로 집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득증대와 생활 수준의 향상, 소비성향의 간편■다양성, 여성의 적극적 사회참여, 주부의 여가 활용도 상승, 레저문화의 발달, 식품 및 식생활 관련 산업의 기술발달, 도시화, 국제화, 세계화의 추세, 주거양식 구조의 단순화, 생산과 유통 및 소비의 분명한 구분 등의 생활 전반의 변화에서 전통 식생활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요인들은 찾아 볼 수 없게 된것이다. 실제로 한 통계에 다르면 86~90년 도시가계의 연평균 외식비 증가율은 39.1%로 같은 기간 일본의 3.5%보다 11배나 높았다. 또 92년 가계의 식료품비 지출중 외식비는 21.5%로 주식비가 차지하는 16.9%를 큰 폭으로 앞지르고 잇다. 식생활 문화의 서구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와 옥수수를 먹게 되면서부터 서구화되기 시작한 우리의 음식문화가 건강하고 풍부한 음식문화의 토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내세우고 잇는 요즘 무분별한 외국 음식 문화를 선호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르과이 라운드의 장벽, 수입 농수산물의 대량유통, 주식용 쌀 수입 등은 고유상품 개발, 신토불이, 식량안보 등으로 이어지는 자구적 외침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외국식품 및 식문화의 유입이라느 전반적인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서구식 식생활은 김치, 밥 등에 많은 섬유소가 부족하여 우리 체질에 맞지도 않지만 편의주의 식생활을 요구하는 사회나 가정구조의 변화된 환경을 고려하면 일방적으로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양념이나 재료를 예전보다 더 잘 쓰는 데도 사람들이 옛날 맛이 안난다고들 한다. 음식이 풍성해지면서 고급화된 입맛 때문이다. 예전의 어려웠을 때, 먹을 것이 귀했을 때는 무엇을 먹어도 다 맛이 있었다.”완산구 고사동에서 50년 넘게 콩나물 국밥집을 하고 있는 삼백집 주인의 말이다. 20년 넘게 꽃게탕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곰집의 입담 걸쭉한 욕쟁이 아주머니는 서양식 식문화에 고급화된 우리의 입맛을 이렇게 얘기한다. “배가 고파야 맛있는 것이지. 배가 고팠던 때를 생각해봐. 소다를 잔뜩 넣어 만들었던 풀빵도 맛있었는데 캐찹이니, 마요네즈, 피자. 이런 것들에 입맛 들여온 입들이 그 맛을 다시 느낄 수 없지 입맛이 변했어, 자식들 먹는 음식을 따라서 먹다보니 조금씩 입맛이 변한것이지.” 시장이 반찬이라는 시대는 지났고 달짝지근하고 먹기좋은 음식에 현대인들이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간편한 식생활을 따르면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시간에 쫓겨 아침먹고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회사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우유 하나, 햄버거 하나 손에 들고 먹으면서 출근해. 주식이 바뀐거야. 나이든 우리들에게는 맞지 않지만 요즘 애들은 그렇게 된거야, 밥을 지어서 먹고 밖에 나가서 빵이니 피자를 사먹던 것이 이제는 집에서 햄버거니 피자를 먹고 밥은 나가서 사먹게 되는 것이지. 거꾸로 됐어.” 시간을 다투며 편의 위주로 산업화 된 도시에서 간장이나 된장을 담아 먹는 집은 별로 없다. ‘깔끔떠는’도시인들 중에는 시골 부모님이 정성스레 담아온 간장이나 된장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자식들도 많다. 전통 식품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구입해서 금방 조리할 수 있는 가공 간장이나 된장에 비해 까고 냄새가 나 보관이나 처리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편의점이나 백화점에 가면 소량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 갖은 양념을 곁들인 김치나 나물도 정작 식탁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 한두 번 손이 가는 정도다. 아이들은 씻어 먹는게 고작이다. 풍성한 찬거리는 식탁에서 낭비를 낳기도 한다. 양념을 많이 하게 되고, 음식은 짜고 매워지기 십상이다. 우리의 담백한 음식에서 볼 수 있었던 단순 소박하고 검소한 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땅에서 나오는 먹거리들이 예전과 같은 생산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도 맛의 변화나 입맛의 변화에 일조한다. 직접 먹을 먹거리를 얻기 위해 소량 생산하던 것에서 먹거리 아닌 재화를 얻기 위해 대량 생산되는 점이다. “똥거름을 줘서 키우던 채소거리들이 비료와 농약들을 사용하면서 채소거리 자체가 맛이 변하기도 했지. 더러 옛맛을 잃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화학 비료나 소독약들로 키워진 것들이 대부분 시장에 나오게 돼.” 남부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이다. 조선 시대의 먹거리가 오늘날 그대로 전통 음식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때 그때 우리의 몸과 입맛에 걸맞는 음식들은 개발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적을 잃어가는 음식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 고유의 식문화를 재조명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맛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 식생활에 익숙해져 온 그 동안의 식문화가 우리 고유의 맛을, 변화된 상황에 맞게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절감케한다. 일본이 우리 전통 음식인 김치를 ‘기무치’라는 그들의 이름으로 개발해서 세계 시장에 내놓은 것은 우리를 자성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맛과 향토음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90년대 후반기의 이미 서구화된 음식문화 속에서 우리 고유의 맛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감지할 수 있다. 전주 비빔밥, 목포 갈낙탕, 마산 아구찜, 제주도 옥돔구이 등 향토음식에 대한 각광은 그것이다. 이러한 향토음식들은 대체로 적은 돈으로 맛과 양을 즐길 수 잇는 서민의 음식문화에서부터 자리잡아 온 것들인데 지역을 대표하는음식이 되면서 관광객들과 지역의 상류층까지 소비자층으로 흡수하게 된 것이다. 편의 주의 식생활을 요구하는 사회나 가정구조의 변화는, 간편하고 효율적인 영양섭취의 강점을 가지고 있는 서구식 식문화를 우리에게 부적합하다고 해서 막무가내 몰아세울 수 없게 한다. 이런 점에서 가공된 빈대떡, 만두, 김치볶음밥 등 전통음식의 패스트푸드화도 요구되며, 최근 한 식품업체에서 개발한 냄새없는 된장과 같은 전통 먹거리의 개량도 필요한 일이다. 음식문화도 ‘소비미덕’이라는 시대착오적 성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절약과 검소정신 위에 우리식 식문화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음식문화에 있어서의 주체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정과 학교에서 국적있는 음식문화 교육이 선행되고 있는지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우리의 맛을 찾아 직접 만들어 먹지 않는다면 우리의 음식들은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집/음식문화2 조화로운 삶과 음식 글■김두경 서예가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요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리에 대한 전문지식은 당연히 없고 미식가도 아니며 요리를 잘 하거나 요리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는가? 그것은 어려서부터 여자를 좋아하여 할머니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51922;아다니다 보니 상식이 되어버린 것들이 요즈음 나의 삶에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본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강요한다고 해서 쓸 말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뭔가 할 말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음식에 대한 나의 개인적이고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물론 비슷하거나 거의 똑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지역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민족이라면 지역간의 격차를 극복하고 삶의 모습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의 모습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 민족은 물론 가정이나 개인조차도 역사와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어떤 흐름을 무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단순한 단절이 아니고 삶 자체가 무너져 없어져 버리거나 다른 삶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에는 반드시 생각이 전제되듯이 음식문화 또한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 사고에 근거한다. 지금 우리의 음식문화는 어떠한가? 학문적으로는 계승 발전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는 계승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니 우리의 음식문화에 있어서 사상은 없고 음식만 있는 것으로 알거나 서양의 영양학을 기초로 우리를 분석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양의 칼로리 영양학이나 미네랄 영양학이 완전히 지배할 뿐 우리의 음식에 대한 사상이나 우리식의 영양학은 거의 무시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식의 사상이나 영양학은 어떤 것인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거다’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랬던 것 같다’라고는 말하고 싶다. 현대 영양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서양 영양학에서는 육신을 기르기 위한 수단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육신을 구성한 성분을 분석하여 그 구성 물질을 보충해 주는 데 주력한다. 또한 먹기에 편하고 맛있고 보기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등의 생각에 근거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단백질 성분이면 돼지고기의 단백질과 쇠고기의 단백질은 같은 역할로 보는 것이 당연하나 다만 맛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원소의 구성비가 다르고 미량원소들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같은 단백질이나 지방성분일지라도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그것들을 차이를 둔다. 아니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쇠고기는 양을 보해주고 돼지고기는 음을 보해주는 식의 한의학적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보다 더 쉽게 생각해보자. 자동차에 있어서 기름이 들어가는 곳은 여러 곳이며 휘발유, 엔진오일, 구리스 등 각종의 기름이 들어가야 할곳이 따로 있다. 이렇게 성질이 다른 기름을 역할에 맞게 넣어주는 것은 사람이 한다. 그리고 각각의 기름은 역할을 바꿀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자동차처럼 필요한 곳에 적당한 기름을 적당히 넣어 줄 수가 없고 골고루 음식을 섭취하면 소화해서 스스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배분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인체는 한 가지 기름성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구성되어 있는가? 내가 알기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때 인체가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게 단순한 원리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했는가? 일단 모든음식은 청과 탁으로 구분했다. 다시 말해서 맑은 기운이 나오느냐 탁한 기운이 나오느냐하는 것이다. 서양의 그것처럼 얼마만큼의 열량이 나오느냐 어떤 구성원소로 되어 있는가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또한 본성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하는 한과 열로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보음하는가 보양하는가로도 나누었고 구체적으로 어느곳을 보해주는가 까지도 분류했다. 그렇지만 일반인은 그렇게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 이 정도는 상식화되어 잇었다. 비록 무지한 서민일지라도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식의 삶을 사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청탁의 조화도 한 열의 조화도, 음양의 조화도 생각지 않는다. 서양의 영양학이 상식이 되어 거기에 따라 살아간다. 때문에 우리의 정신의 틀도 무너지고 우리의 삶도 건강도 무너져 가고 있다. 우리가 돼지고기나 닭고기보다는 쇠고기를 선호하는 이유를 쇠고기가 돼지고기나 닭고기보다 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겠지만 어느면에서는 청탁의 이유로도 볼 수 있겠다. 우리 인체에서는 복잡한 만큼 맑은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쇠고기를 좋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이 맑고 담백함을 좋아한 까닭에 탁한 기운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힘이 넘치더라도 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환경이 좋지 않아도 필요성을 느끼면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볼 때 우리 선조가 채식을 위주로 한 맑은 식생활에 불만이 있었다면 그렇게 안주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맑고 담백함을 추구했는가? 그것은 인간 위주의 현실적 삶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자연을 조화롭게 할 것을 생각했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이용하는 삶과 자연과 조화하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자연을 이용하는 삶은 현실적 육체적 삶의 발자취 이욍에는 의미가 별로 없다. 때문에 육체적 삶을 완성시키려 하고 끊임없는 만족을 추구한다. 따라서 물질문명이 발달된다. 반면 자연과 조화하는 사람의 삶은 현실적 삶의 의미를 넘어 초현실적 삶을 느끼거나 막연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의미를 둔다. 따라서 삶이 추상적일 수 있고 정신적이고 신비스러울 수 잇으며, 물질문명에느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옛 우리의 선조는 막연하지만 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택했다. 당연히 물질의 풍요에 있어서는 후진국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지만 나는 이러한 우리의 삶이 웬지 좋아 보인다. 그리고 바른 삶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식주를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로 돌리고자 한다. 몸도 마음도 자연에 순응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주의 순응이 기본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은 최대한 가공을 피한다. 다만 맛을 내기 위해서 자연의 힘을 빌려 변화를 주기도한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버린다. 예를 들어 김치에는 어떤 양념을 듬뿍 넣어야 맛있다 하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가능하면(역겹지만 않으면)양념을 하지 않고 그 자체의 맛을 즐기려 한다. 배추는 배추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오이는 오이대로 솔잎은 솔잎대로.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체를 즐길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관념에 젖어 있기 때문에. 관념에 젖어 있을 때 도저히 못먹겠던 음식이 관념을 벗어 던지면 맛있어진다. 이것은 음식을 통한 수행이다. 또한 서로 섞는 음식이라도 음양의 조화를 살펴 우리 몸 속에서 화평함을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모든 영양학이 신진대사에 있어 일정한 호흡으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선조들은 모든 유형적 먹거리를 기본으로 하고 호흡의 변화에 따라 에너지 효율을 다르게 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같은 휘발유라도 산소 공급량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달라지듯이 같은 먹거리라도 신체의 호흡능력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달라짐을 생각하여 올바른 호흡으로 완전 연소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불완전 연소에 의한 불순물 축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장이 많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음식에는 주식과 부식이 있어야 하며, 정식과 간식의 한계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히 육신적 삶, 즉 육체를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차원에서 말하거나 삶을 영위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인간의 작은 노력이며 만물과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인간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특집/음식문화3 위도 크내기 갈치 뱃대기 맛 못 잊는데 그러니가 꼭 일 년만 인가 보다. 작년 이맘때부터 좋아하는 술을 끊고 한동네 사시는 형님의 외딴방 하나를 빌어서 음식에 얽힌 산문집「호박국에 밥 말아먹고...」를 쓰기 시작했었는데(내일을 여는 책 출판사 간)일 년만에 주변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다시 음식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젊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무슨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써야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린다는데 한참 먹고 사는 데 바쁠 삼사십대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도하고 있으니 누가 읽어 줄까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래도 책상에 다시 앉은 것은 아직도 내가 책 속에서 다 하지 못한 미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어서 일터이다. 이 이야기는「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의 남은 이야기 중 일부가 될 것 같다. 내소사 일주문 밖 바로 옆에는 순두부와 도토리 묵, 파전 등을 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막걸리와 밥을 파는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다. 이 가게이 아들은 무슨 사업차 우리 동네를 자주 내왕해서 나와는 안면 정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찮게 이 가게에서 막걸리를 먹게 되었다. 가게의 안주인네는 마침 남편은 어디가고 갓 얻었음직한 며느리만 데리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여그 막걸리 한 병 허고 도토리 묵 한 접시 주요.”했더니 말없이 내 위아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잠시후에 도토리묵 그득하게 한 접시 쟁반에 담고 며느리에게 술병들려서 가지고 나왔다. 이 때 내가 어디 가나 항상 하는 말이 있으니 어떤 음식이던지 몇 점 맛있게 먹고 나서 “앗따! 아주머니, 음식 솜씨 무지무지허게 존디 여그다 미원 쪼금만 들 넣었으면 더 맛있겠소.”이다.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빙긋이 웃기만 하더니 한참 후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 듯 헌디..”말꼬리를 흐렸다. “모항 삽니다.” “내 어쩐지! 우리 아들 땜시 몇 번 본 것 같아서..” “제가 여기도 자주 오는데요.” 내 장난기가 자연스럽게 거두어지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가 이어져서 나와 안면 있던 그 사람이 이 가게의 아들인 줄을 알게 된 것이다. 내소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던 저녁 무렵이어서 가게에도 손님이 없었는지라 이 아주머니는 내가 앉은 평상에 마주 앉아서 병에 남은 막걸리 한잔을 스스럼 없는 듯 내 잔에 부어 주었다. 우리 동네와 내소사 동네가 아무리 지척에 있다손 치더라도 아들이 뭔일 한답시고 자주 가는 동네이 사람을 말로나마도 홀대하긴 어려웠으리라마는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말뿐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사람에게 정성을 쏟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의 도토리묵 무친 솜씨는 일품이었다. 음식이라는 것이 한 점 집어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첫맛이 중요한 것인데 갖은 양념 다해서 무친 그 도토리묵은 인공 조미료 싫어하는 내 입맛으로도 넣은 것인지 넣지 않은 것인지 전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맛이 있었다. 그런 남다름이 있었으니 까탈스러운 내 말에도 빙긋이 웃었을 수밖에.... 내가 하도 맛있게 한 접시를 다 먹어치워 버리자 아까 무친 양푼에 좀 남았다며 며느리 시키지 않고 직접 반 접시나마 더 가져왔다. 사람의 술맛이라는 것도 참 이상스러운 것이다. 도토리 묵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을 혼자 먹고, 특히 나처럼 차를 몰고 와야 하는 사람에게는 양에 겨운 것인데 곁에서 따라주는 술 한 잔과 거져 더 내온 묵 반 접시는 출출했던 뱃속에 더 없는 따뜻한 안주가 되어서 술맛을 돋구어 버렸다. 해서 막걸리 한 병을 또 비우게 되었던 것이다.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길이보이고 구불구불 난 그 길을 따라서 또 조금 올라가면 노피지막한 곳에 자리잡은 절 집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내소사 지장암, 비구니들이 있는 곳이다. 내소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지장암에 들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이 암자에 자주 갈 일이 생겼다. 음식 잘하는 스님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금년 팔월 중순경「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의 출판 기념회를 해 준답시고 서울에서부터 내려온 출판사 사람들과 몇과 이박 삼일 동안 죽자고 술을 먹었는데 마지막 날 내소사를 가게 되었다. 내소사가 초행인 사람들이어서 내 짧은 식견을 보태 절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키고 지장암까지를 들르게 되었다. 원래 그곳엔 가지 않기로 하였으나 함께 간 이웃 동네의 술친구 하나가 지장암에 음식 잘하는 스님 한 분이 있으니 보러 가자고 해서 그가 없으면 절 집이라도 볼 생각으로 들른 것이다. 운 좋게 마침 스님이 계셨다. 출가승의 나이를 짐작해 보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겠는데 얼른 대충 보기에 나이 한 쉰댓 됐을까? 눈가의 주름살에 맺힌 웃음이 벌써 많은 세월을 짐작케 함과 동시에 사람을 편하게 하는, 이무러움이 없었다. 술친구가 가운데 들어서서로 인사를 붙였다. 나는 음식 이야기랍시고 책을 낸 직후였고, 그 스님은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문이 난 터여서 우리는 대번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라고 하지만 나야 솔직히 음식을 말로만 &#51474;어댈 뿐, 그 스님이야 어디 그렇겠는가? 잘하면 무시라도 여스님들의 세계에 들어와서 그들이 만든 공양을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얌체 같은 마음이 더 앞서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날은 마침 칠석이었는데 몇 마디 수작이 있은 후 이제 그 스님이 우리에게 내놓은 음식을 보자. 누뭇잎 모양의 대로 만든 접시를 뜰 안에 있는 무화과 나무 이파리 하나를 따서 깔고, 동글동글 하게 빚고 손가락으로 눌러 부드러운 각이 지게 만든 송편과 개떡 두 족 분이었는데 이 개떡이 그냥 동글납작한 보통의 개떡이 아니라 꼭 나뭇잎 모양으로 얄프닥하게 만든 개떡이더란 것이다. 나뭇잎 모양의 접시가 그렇고 무화과 잎을 깐 것이 그렇고 거기에 또한 나뭇잎 모양의 파랗게 윤이 나는 개떡과 함께 조화를 이룬 송편이라니! 맛은 하여간에 그 정성이 대번 눈에 어려서 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여기서 부처님을 느꼈다면 과장일까?)사진부터몇 장찍고서야 먹을 수가 잇었다. 음식이 지나치게 보기 좋고 고급스러워도 구미가 당기기 어려운 것인데 그것은 고도로 세련되고 감가적이었어도 그 내용이 소박한 개떡이었으므로 해서 우리는 맘놓고, 맛있고 허물없이 먹을 수가 있었다. 거짓말보태지 않고 내가 철 들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떡을 그렇게 감사하며 먹지 않았나 싶다.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장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생 제도가 별것이겠는가? 정성스럽게 만든 개떡 한가지 바로 그것이다. 요 앞 일 주문 밖의 도토리묵과 따러 주는 막걸리도 그렇더라....’결국 그날도 서울 사람들은 술에 취해 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달 여, 이러저러 추석이 지나고 요즈음은 멸치가 잡힐 철인데도 어촌인 이곳엔 멸치가 잡히지 않아서 그물질하는 사람들 어깨엔 힘이없다. 다른 때 같으면 추석 전전사리, 그러니까 추석 한달 전부터 멸치가 뒤집어져서 추석 명절도 멸치에 묻혀 쇠어야 했을 것이지마는 금년에는 어인판 속인지 멸치는커녕 멸치 새끼 실치도 보이지 않는다 한다. 농사도 그렇고 어업도 마찬가지여서 가격은 고하간에 풍년이 들고 많이 잡혀야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파는 법인데 멸치야, 무정한 멸치야, 옛날 칠산 바닥의 그 많던 고기들이 다 어디 가고 때가 되어도 올줄을 모르는가.. 멸치떼가 들어와야 가을의 바다는 비로소 풍성해진다. 멸치를 뒤쫓아오는데 이런 놈들은 후리 그물이나 전어 그물로 한 번 둘러쌌다 하면 지게 바작에 가마니를 들이대고 퍼 날라도 남을 정도로 엄청났다. 이맘때 잡히는 이 놈들은 우선 꼬랑지가 가을 독사 꼬랑지 노랗게 약차서 사람보고는 도망가지 않고 바르르 떠는 것처럼 노랗게 기름이 올라 있는데 이걸 그냥 비늘도 긁지 않고 굵은 소금 뿌려 한 시간 정도 놔뒀다가 저녁 아궁이 불에 석쇠 얹고 구워 놓으면 기름이 벅적거리면서 고소한 냄새가 울안에 진동한다. 전어는 이렇게 통째로 구워서 저녁밥과 함께 손에 들고 김치 싸서 대가리부터 창자 고랑지 할 것 없이 모조리 뼈째 씹어 먹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얌전을 내느라고 그러는지 여기는귀한 고기가 거기는 흔해서 그러는지 대가리 창자 꼬랑지다 떼어 내고 후라이팬 기름에 구워서 기껏 살코기만 저분으로 깔짝거린다. 그것도 또 반절 내버리면서. 아느느 이들은 지금 잡히는 가을 전어 한 마리를 여름지난 농어보다도 차라리 더 대접해 준다. 멸치 뒤를 쫓아오는 것 중에 특히 갈치는 뺄 수가 없다. 애들 손바닥 같은 풀치야 갈치라고 할 수 없으나 그도 많이 잡히면 풀치젓을 몇 동이씩 담그던지(이 풀치젓은 한 일년 삼삼하게 익혀서, 먹으려고 꺼내 놓으면 방안에 고릿한 냄새가 꽉 차버려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쳐줬다)엮거리를 엮지만 배에서 평생 그물을 당기는 뱃사람들의 그 두툼한 손바닥같은 갈치는(갈치의 크기는 어른들 손가락 세 개 넓이냐 네 개 넓이냐로 따졌다.)하&#50527;게 번뜩이는 비닐을 대충 긁어 버리고 밭에서 막 따온 서리 호박과 함께 얼큰하게 지져 놓으면 그 쌈박한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이러지 않으면 토막쳐서 소금 뿌려 한 삼십분 간이 배이게 했다가 석쇠에 구워 먹는다. 갈치의 살은 무르고 빨리 익어서 한참 때의 장정 겨드랑이에 넣었다가도 먹는다 하였는데 이중에서도 칠산 바닥에서 잡히는 손바닥 같은 갈치 뱃대기 살은 특히 기름지고 연해서 오죽 맛있었으면 위도 크내기 갈치 뱃대기 맛 못 잊어서 뭍으로 시집을 못간다 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그도 저도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 버리고 멸치조차 잡히지 않으니 자꾸만 깊어 가는 가을 바다를 바라보는 어부들의 눈에 시름이 더해 간다. 음식이라는 것이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또한 제 때 제 고장에서 나는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해 묵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다가 흉년든 바다를 보면서 다 사치한 생각 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젖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바닷가 이 모양인 것도 다 사람들 때문이었음에야......... 특집/음식문화4 우리밀을 살립시다 글■정기환 우리밀 살리기 운동 전북 본부 사무국장 우리 당에서난 쌀■보리■콩■감자■된장■김치로 차려진 구수하고 건강했던 우리 밥상, 틈틈이 우리밀 수제비와 칼국수를 만들어 주시던 정겨운 어머님의 손길..... 어느결엔가 우리 밥상은 온갖 수입 농산물, 가공식품, 공해 식품으로 바뀌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맛조차도 여러 가지 공해 식품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알고보면 우리의 조상들은 음식의 맛을 내는데도 고추나 마늘, 파 같은 천연 재료만을 이용해 왔는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겪으면서 산업화한 일본의 화학 조미료 시장에 휩쓸리게 되면서 어느새 그 맛에 길들여지게 된 것이다. 또한, 지난 30여 년간 성장위주의 경제정책과 산업화 우선 논리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를 즉석■가공식품 중심의 간편식을 유도해 오며 먹을 거리에 대한 개념조차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원래 우리 문화는 ‘밥’을 ‘진리’라하여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밥상을 통하여 나눔과 섬김, 가르침의 교훈을 얻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밥먹는 행위가 단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식의 에너지 충당 정도로만 여기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급격한 식생활의 변화는 입맛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까지도 변하게 한 것이다. 지난 91년부터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전개해 오며 많은 소비자운동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맛과 먹을거리의 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밀이요, 그거 맛있어요?” “맛이 있어야 먹을 것 아니예요.” “좀더 부드러울 수는 없나요?”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정한 맛은 무엇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볼일이다. 단지위에서 언급한대로 수입 농산물, 화학조미료 등에 길들여진 혀의 감각에만 만족을 주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바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켜가는 안전하고 건강에 충실한 먹을거리가 좋은 것인가, 어떤 것이 제맛이며 본래의 맛인지 따져 볼 일인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수입 식품에 함유된 농약과 방부제 등의 화학 물질이 주는 피해에 대한 소비자 단체들의 고발과 언론 보도의 영향으로 먹을거리의 안전성 등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보신 관광(?)이 물의를 빚은 것처럼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찾는 식의 건강에 대한 욕구또한 올바른 식품 선택과 식생활 문화 개선을 통하여 변화시켜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여름에는 대표적인겨울 작물인 보리와밀을 많이 먹고 겨울에는 여름 작물의 대표적인 쌀을 비롯하여 코오가 잡곡을 상식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겨레가 우리의 기후와 풍토에 자신을 적응시켜 음의 계절에는 음의 먹거리를 조화롭게 맞추어 온 지혜로운 먹거리 문화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먹거리 구조는 쌀-밀 중심으로 바뀌었다.(91년 국민 1인당 년간 식량 총소비량 66.1kg = 쌀 116.3kg, 보리쌀 1.6kg, alf 30.7kg, 기타 17.5kg) 아침 식사를 빵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12.8%나 되고 라면, 빵, 국수, 햄버거 등 밀가루를 원료로 한 식품들이 우리의 식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4년 정부의 밀 수매 정책 중단 이후 우리밀의 국내 자급도는 89년 0.03%에 불과하여 100% 전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91년 밀 수입량 445만톤)이렇게 엄청나게 들어오는 시입밀은 장기간 수송, 보관 과정에서 변질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확후 20여 종류가 넘는 농약처리를 하고 있어 국민 건강에 심각한 폐해를 주고 있다. 이제 우리밀 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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