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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문화저널]
창작극회 중국 강소성 방문공연기 중국의 친절과 관심, 공감의 무대를 만들다.
글 / 곽병창 연극연출가 (2004-02-12 12:31:14)
한 차례 연기되었던 공연이어서인지, 낯선 곳에 대한 설렘도 공연일정에 대한 부담도 모두 두루뭉실해진 채로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약 1시간 30분 남짓의 비행 끝에 상해공항에 닿았다. 마침 전북대 중문과를 나오고 소주대 대학원에서 중국근대소설을 공부한다는 정현선 군이 통역으로 마중 나와 있어서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그로부터 체류 기간동안 도움될 만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8박 9일 동안 소주(蘇州), 무석(無,錫), 남경(南京) 세 군데를 돌며 공연했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시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동하는데 꼬박 한나절씩을 들여야했다. 무대를 준비하는 일은 주로 이동후 당일 밤 이루어졌으며 공연은 그 다음날 밤 일곱시 반 무렵에 한 차례씩 했다. 극장 설비는 대체로 낡은 편이었지만 무석시의 신세기전영성(新世紀電影城)만은 지은지 두 달밖에 안된 새 건물이었다. 시설이 퇴락한 소주나 남경의 인민극장 같은 경우 그 규모는 대략 1500~2000석정도 규모로 비교적 큰 편이었고 제법 웅장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5~60년대쯤에 지어졌으리라 짐작이 가는데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달된 형태의 가무극 악극 오페라 등도 충분히 공연 가능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소주시의 무대감독은 그 극장에서 러시아의 발레단이나 오페라단 등의 성공적으로 공연했던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짐작컨대 북한의 예술단들도 다녀갔을 것 같았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무대의 깊이나 높이 그리고 승강버튼(작은 널빤지)등도 낡긴 했지만 공연을 위한 배려로는 충분할 뜻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명 시설이었다. 이 역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듯 먼지가 켜켜이 앉은 기자재들을 내 온 것들이었는데 그 성능만큼은 손색이 없었다. 기본 조명을 담당하는 서스펜션 라이트들의 용량이 2kw여서 크고 투박했다. 역시 조도는 뛰어났다. 새로 지었다는 무석시의 공연장을 포함해서 세 곳 모두가 조명 컨트롤 박스를 무대 상층의 측면에 설치해 둔 탓에, 조명을 맡아 일하던 류경호 연출은 아주 애를 먹곤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시나 성의 문화청 사람들도 모두 나름대로의 예술적 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식사 자리에서건 흥이 나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심지어 책임 수행 과장인 평진웬같은 이는 관광지에서 파는 조잡한 얼후(二胡, 우리의 해금과 흡사한 두줄 현악기)로도 제법 능란한 연주 솜씨를 보였다. 공연을 뒷바라지하는 극장의 기술자들 또한 자기 분야에 관한 한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관리들과의 관계도 그다지 딱딱해 보이지 않았으며 항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남경 인민극장공연 때는 남경 경극단의 배우들이 함께 밤을 새다시피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주었다. (이들은 10월의 내도(來道)공연에도 참여할 배우들이다.) 관객들은 대체로 중 상류이상의 생활 수준을 지닌 듯했다. 아주 저렴한 가격(우리돈 2,000원)에 입장권을 공급했다는데 그 대상은 주로 공무원이나 언론사 사원들 및 그 가족들이라 했다. 중국어 자막을 만들어서 공연 내용을 상세하게 해설해준 덕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관객들의 이해가 깊어 보였다. 무석 시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앙지에라는 기자는 극중극으로 처리하는 형식이나 사실적 연기술, 공동의 역사적 경험과 숙원 등을 다룬 우리 작품의 특색이 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great!'를 연발해서 나를 계면쩍게 하기도했다. 남경에서 만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항일 투쟁을 형상화한 노래와 춤이 진행될 때 자막과 무대를 번갈아 보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나는 그들이 공연을 하고 있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생생한 경험을 반추하는 것만 같아서 숙연해졌다. 특히나 남경은 대학살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의 뿌리가 남다른 것 같았다. 안내하던 통역도 ‘일본놈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 자신들의 반일 감정을 우리에게 자꾸 확인시켜 주려 하곤했다. 현지의 언론은 우리의 공연에 대해 매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수주시에서의 공연내용을 다룬 신문의 보도는 곧 우리에게 복사되어 전해 졌으며 수주와 남경에서는 TV카메라 기자와 아나운서가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고 공연 뒤에는 연출 및 주연 배우들과 직접 인터뷰까지 하며 자세하게 취재했다. 아마 전라북도와의 자매결연이 이미 다른 분야에서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놓은 뒤라 관심이 더욱 높은 게 아닌가 싶다. 중국 사람들은 의외로 경극 등의 전통 연희에 대한 관심이 낮은 듯 싶었다. 무석시 문화청 외사과에 근무하는 링펭은 젊은이들은 자기네 전통 연희보다는 외국의 그룹이나 뮤지컬 등에 더 경도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는데 우리 쪽 사정과 매우 흡사해서 다소 착잡한 심경이 되기도했다. 또 현대적인 연기술이나 대사에 많이 의존하는 연극들마저 노래 춤 무예 위주의 전통 연희처럼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을 들으며, 현지 관객들이 우리 공연에 대해 보이는 놀람과 김기함 등이 오히려 더 이해되었다. 사람들의 인상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를 줄곧 안내하며 공연을 뒷바라지하던 핑과장은 물론이거니와 김일성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통역 순지안 그리고 각 지역마다 우리 공연을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무대관계자들 -백발이 성성한 소주시의 무대감독부터 남경의 경극단원들까지, 소주시를 떠나올때 점심만찬장에서 경극에서의 노래를 들려주던 고운 소리와 얼굴의 남자배우며, 류장영 선생의 사랑가에 맞춰 젓가락을 두드리며 온몸으로 춤을 추던 배우 출신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친절했고 헌신적이었으며 우리 공연에 깊이 공감해 주었다. 전주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될일을 생각하면 벌써 흐뭇해진다. 춤과 노래, 전통적 기예로 채워진 공연물이 문화교류에 적합하리라는 생각은 역시 맞다. 하지만 성의 있는 해설과 안내, 그리고 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주제라면 실험성이 강한 현대극도 능히 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도 충분히 느끼게 해 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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