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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 | [문화저널]
우리 화가들에 의해 교육 이루어진 산실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12 12:23:21)
동광미술연구소는 전북에서 최초로 사설 미술교육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때가 1945년 해방되던 해였다. 이러한 서건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도 우리 작가에의 해 후진들이 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전북 지역의 신미술 교육은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 유형은 두가지로 직접 일본에 건너가 신미술을 공부하거나 혹은 1925년부터 이 고장에 세워지기 시작했던 정규교육기관에서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다. 직접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던 인물들이 이순재。김영창。진환。박병수。김해。이경훈。권영술。문윤모 등이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화가가 되겠다는 젊은 꿈을 이국땅에 건너가 불태웠다. 그리고 전북화단의 명맥을 대부분 이들이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이 개인적으로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을 무렵 이땅에 새로운 미술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규학교교육이 일제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정규교육기관이었던 신흥학교에선 어떤 미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00년에 학당(學堂)으로 문을 연 신흥학교는 각종 과목을 교육했는데 그 중에 도화(圖畵)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도화 시간에 이루어졌던 교육 내용은 알려져있지 않다. 당시 선교사들이 세웠던 교육기관이었음을 상기하면 일정한 정보를 통해 신미술도 공부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미술교육은 1925년 전주고보가 창설되면서 일본인 미술교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때의 교사는 일본인 모리였다. 그리고 1927년엔 전주여고보의 창설과 함께 오오쓰가 또한 1937년엔 전주사범이 창설되고 우라사와 와 이또오가 교수로 부임해 신미술을 담당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신미술 교육은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때까지의 우리 미술교육은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만나서 이루어지는 도제식 교육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스승의 그림이나 혹은 과거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하고 또는 실물을 직접 사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의 필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조선 시대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개자원화보”와 “십죽제화보”등이 전해지면서 교본을 연습하는 풍조가 유행히가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 미술교육이라기 보다는 서화교육이었다. 어떻든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방식이나 내용이 일제에 의해 시작된 학교교육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그림을 공부했던 분들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 당시 가장 많이 공부했던 것이 석고소묘였다고 한다. 특히 목탄을 주로 다루었고 연필소묘는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고 수채화를 많이 공부했으며 기타 공작 등을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 우리의 중고등학교 미술수업과 비슷했다. 그리고 유화는 거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값도 매우 비싸 일반적으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다. 당시 학교를 다니며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분들도 학교 수업에서나 혹은 선생들로부터 유화를 본 기억은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신미술교육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답습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미술교육은 결국 우리 미술의 황폐화를 가져온 결정적 역할을 하고 말았다. 스며드는 우리의 한지 대신 켄트지라는 양지를 사용했고 부드럽고 기다란 모필 대신 짧고 뭉퉁한 붓으로 대신했다. 또한 살아 있는 대상을 대신하여 석고라는 딱딱한 물질을 묘사했고, 운동감 보다는 명암에 의한 입체 표현에 주력하는 완전히 서양식 교육을 하고 말았다. 우리 감성에 의한 우리식 표현이 사실상 말살되었다. 어떻든 초창기 이렇게 하여 일본인들에 의한 학교교육을 통해 미술교육이 이어지다가 해방되던 해에 동광미술연구소가 개설되면서 어설프게나마 우리 화가들에 의해 후진들이 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다. 물론 어떻해 보면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과로 바라볼 수도 있으나 동광미술연구소의 개설은 몇몇 작가들의 개인적이면서 자발적인 시대적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 큰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동광미술연구소는 박병수의 개인 아틸리에에서 문을열엇다. 그리고 교수진은 김영창。박병수。정용식。이경훈 등이 주로 맡았고 이순재가 자주 들렀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 유화를 뿌리내린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 건너가 유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사실상 유화를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동광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시중에서 유화도구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마키무라”라는 문방구상이 지금의 청석동 파출소 옆 중국집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분포도’와 ‘구사카베’라는 유화물감을 가끔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키무라는 오늘날 화구상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유일한 화구상이었던 이곳에서도 유화물감은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이순재나 박병수 등과 같은 화가들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구해 온 화구들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무렵 동광미술연구소에서 공부하던 인물들로는 이의주(李義柱), 천칠봉(千七峯), 배형식(裵亨埴), 이준성(李俊成), 허은(許垠), 하반영(河畔影), 소병호(蘇秉鎬)등이 있다. 이들 중 허은이 해방 이후 좌익에 몸담아 한국동란에 휩쓸려 일찍 세상을 떠났고 다른 분들은 대부분 현대에까지 활동했던 지역 미술의 중추적인 인물들이었다. 초기에 동광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후에 조각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배형식 교수는 이 무렵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는 대부분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정은 있었지만 시대적 상황이 너무 어려웠다. 동광미술연구소는 그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였다. 기억으로는 그만한 규모는 서울에도 두 개밖에 없었다. 당시 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할 때는 일정한 돈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업시간을 정하고 하는 것보다 틈나는 대로 와서 그리고 또 지도를 받는 형식이었다. 수업내용은 주로 석고소묘를 했으나 수채화와 유화등을 그렸다”. 당시엔 함께 야외에 나가 사생을 하는 일이 많았고 경기전이 가장 많이 찾아다닌 곳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동광미술연구소는 체계적인 교육내용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함께 그림을 그린다는 동료애로서 가르치고 배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더래도 동광미술연구소는 최초로 우리 화가들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던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동광미술연구소는 1919년에 설립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였던 경성서화미술원보다는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경성서화미술원은 조식진과 안중식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이상범과 변관식 등이었다. 경성서화미술원이 “서화”와 “미술”이라는 동일 개념의 용어를 함께 쓰고 있는 점에서 당대의 사회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서화”는 조선조 때까지 사용했던 용어였고 “미술”은 외래용어였다. 동광미술연구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경성서화미술원은 전통화가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동광미술연구소는 서양화가들에 의해 개설되었던 차이도 있었다. 그러나 동광미술연구소는 지역화단에서는매우 발빠른 움직임이었고 그만큼 전북미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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