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 | [문화저널]
상업주의의날쌘 깃발을 경계하라
글/ 김정수 전북일보 광고국 차장 「문화저널」편집위원
(2004-02-12 12:22:42)
최근 들어 공연예술이 대규모화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고속화, 대형화 추세 속에서 상대적 빈곰감을 느끼는 상당수 예술인들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의 저변 확대와 함께 사회적 관심이나 반응도 사회 전반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일이다. 풍요로운 성장의 결과가 예술에 반영된다는 점은 일단 환영할 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들의 의도나 배경, 직간접적인 영향들마저 웃어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워낙 다양한 장르의 공연 예술들이 복합적인형태로 전달되기에,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비판의 대상에 올린다는 일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그 안에 깔린 자본 중심의 논리, 상업주의의 날샌 깃발 등은 분명 지적되어야 할 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대형이벤트성 공연들이 남기는 크고 작은상처들도 모아 보면 제법 무시 못할 양이 된다.
근래 지자제가 본격화되면서 자치단체장들 사이에 유행처럼 사용되는 ‘문화상품’이라는용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불안해 보이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소담스러운 애정과 선진국적 세련된분위기를 고루 섞은 듯한 이 용어가 웬지 잘못 흘러가 버릴 것만 같은 방정맞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 지역의 예술 수준, 조금 넓게 잡아 그 문화 수준을 계량한다는 것처럼 힘들면서 어이없는 작업은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준이란 시간적, 공간적 변수들만 가득 차 있다. 곧 절대치가 없다. 그러나 변할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스스로 문화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건강히 발전시킬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전북에서의 공연들을 바라보면 몇 가지 안타까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서울지역 공연예술단의 바람몰이식 순회공연을 논의에 올려 볼 필요가 있다. 몇 년전 서울 소재 극단들이 지방 공연에 대하여 부산연극협회의 반발이 연극계에 파문일 일으킨 사건도 이 문제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당초 유명 탤런트를 앞세운 상업성이 농후한 지방 순회공연에 지방연극이 위축되는 양상이 발단이 되었던 이일은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공연예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사안이었다. 물론 뛰어난 서울의 공연이 유치되는 것을 반대하자는 것은 아니다. 수준이 형편없는데도 우리 지역 예술단체의 공연이니 조건 없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우물안 개구리식 사고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분명 모두는 아니지만 흥정을 앞세운 쇼화된 무대공연으로 지방의 순수한 마당을 망치는 일은 분명 경계되어야 한다.
해외공연단의 무분별한 유치도 큰 문제로 남아 있다. 몇 년전 모 신문사에서 어느 러시아 공연단을 고가로 초청하여 전북지역에 유래없는 입장료로 공연을 가졌으나 막상 그 단체가 국내 써커스단 수준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세인의 입줄을 오른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또 그 같은 일이 한 번에 그쳤으리라고는 믿어지지않는다. 이벤트 사업이라는고상한 이름아래 문화적 안목도 갖추지 못한 흥행업자들이 펼치는 무분별한 행사 기획에 대한 대응은 언론에서 먼저 바른 방향을 잡아 주어야 했을 것이다. 역시 여기서도 전제되어야 할 일은 이같은 문제제기가 외국의 뛰어난 공연 자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국내의 여러 언론사가 앞장서서 펼치고있는 이벤트성 사업들도 문제는 마찬가지도 도내 신문사들이 공익사업, 문화사업이라는 허울로 벌이고 있는 각종 행사들을 살펴보면 자사의 홍보와 돈벌이 외에는 아무런 의의도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오히려 상식을 깨는 불건전함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송국도 예외는 아니다. 일 예로 KBS와 MBC가 경쟁적으로 그 규모를 키우고 있는 음악회 프로도 곰곰이 생각할 여지가 있다. TV화면을 벗어나 열린공간에서 이웃과 마음을 열고 모여 앉아 즐기는 건전한 음악회라는 장점에는 얼마든지 찬사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외형적 과시에 신경을 쓰는 듯한 형태에 후원측과 연계가 갈수록 노골화되는 제작방식은 분명 비판받아야 할 문제이다. 주최측의 홍보를 담보로 제작비의 대부분을 후원 받고 막상 음악회는 철저히 녹화를 위한 장소로 전락시키며 수만명의 관중들에게 편안한 음악, 열린음악이 아닌 불편한 관람을 감수케하는 관행은 누구를 위한 문화예술행사인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럴 경우 행사 유치측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행사 유치를 위해 행사비용을 분담하고 반대급부로 자기 단체의 홍보가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단 하루 밤의 행사를 위해 관립단체의 일년 예산 정도를 선뜻 내놓는 일 등은 스스로 그런 일들이 지역예술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요즘의 대규모 이벤트성 공연들은 그 성격과 형식이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그러한 공연 문화를 공연의 모든 것으로 보고 배울 미래의 관중들이염려스럽기 짝이 없다. ‘보여주기’중심의 공연 양식이 ‘생각하게 하기’를 억누르지 않을까도 우려되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투자에 의해 양성되고 형성되어야 할 이 지역의 문화예술인, 문화풍토가 그 화려함에 가려 무시당하게 되는 일은 것도 심히 우려된다. 또한 이 지역의 기업, 단체들의 뒤틀린 문화의식도 더욱 뒤틀려 부러질까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