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 | [문화저널]
문화저널이 지향했던 그 ‘따뜻한 사랑과 의식’
글/편집부
(2004-02-12 12:20:49)
100호에 되돌아보는 「문화저널」
‘이 아이의 성년식을 보고싶다.’
문화저널 창간 5주년 기념호에 당시 전북일보 문치상 국장은 이렇게 썼다. 아직 성년식까지는 아니지만 「문화저널」이 창간 100호를 맞았다. 창간 100호에 이르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문화저널은 지역문화의 살아있는 스크랩으로 자리잡아 왔다.
문화저널이 창간호로 지역 문화계에 이름을 올렸던 87년은 이른바 ‘80년대’의 열기가 정점에 이르고 있었던 시기였다. 변혁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해방공간 이후 무려 30여년만에 뜨겁게 분출되고 있었고, 민족민주운동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전북지역 역시 예외일 수 없었고 도심과 대학과 노동 현장은 연일 폭풍 같은 민주화의 열시 속에 놓여있었다. 문화저널이 창간되던 87년은 지역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민족민중문화의 시대적 당위가 전북지역에서도 치열하게 탐색되었고, 그동안 제도권에 안주하고 있었던 지역문화의 큰 틀거리들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문화저널의 창간은 분분한 평가를 받았다. 문화주의자라는 조소어린 비평이 있었는가 하면 보수 논객들로 부터는 위험한 잡지라는 내밀한 평가도 동시에 받아야 하는 이른바 회색지대에 문화저널은 서 있었다. 1987년 11월의 문화저널 창간호는 20쪽짜리 서적지에 지역문화의 이모저모를 성의있게 담고 있었다. 흑백바탕에 밝은 황토색으로 깔끔하고 세련되게 선처리한 표지는 디자이너 송희금 씨의 작품이었다. 창간호의 표지를 장식한 디자인은 우리 고유의 문살과 거기에 비쳐드는 어렴풋한 햇살로 문화저널의 미래와 과제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다. 또한 창간호에서 사용된 문화저널의 로고 타이틀은 지금도 문화저널의 표지글씨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 본 창간호는 문화저널의 살아있는 역사를 웅변해 준다. 창간호에 등장한 첫 번째 시인이 땅과 고향의 시인 김용택이라는 점도 그러하고 문화저널이 첫 번째로 찾아간 사람이 시대와 역사에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갔던 정렬 시인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10월에 문을 열고 80년대 후반을 풍미하면서 민족민중미술을 개척해냈던 온다라 미술관도 창간호에 등장했다.
창간호를 통해서 당시 원광대 문리대 학장이었던 홍석영 교수는 「문화저널」이 ‘순수한 향토애의 자연발생적인 유도, 향토문화창달을 갈망하는 문화의식과 드높은 정열에 의한 문화운동’이며,‘ 지방문화가 마치 고여있는 늪처럼 정체성을 면치 못했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뜻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산은 길을 다 거두어 들이고
지역문화를 바로 세우겠다는 갈망. 그것은 어두운 지하의 찻집에 모여들어 문화저널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의 뜨거운 바램이었다. 87년 6월항쟁과 7.8월의 노동자 대투쟁 속에 한 여름을 보냈던 그 정치의 계절에 문화저널은 그렇게 뜻밖의 곳에서 자기의 길을 찾았다. 정치적인 담론이 한 시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가 가지는 힘을 두려워하고 한 시대의 문화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문화저널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저널의 뜨거운 갈망은 요란하게 분출되지 않았다. 창간호에 실린 김용택의 시 <산>은 마치 문화저널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듯 했다. ‘날이 저문다/날이 저물고/어두워질수록/산은 길들을 다 거두어 들이고/샛길하나만 산밖으로 열어둔다/산은 자기 밖에 있는 온갖 나무와 풀들, 온갖 짐승들까지/자기품으로 불러들여 감추고....중략.....산은 먼 곳을 보며/ 슬픈것도 기쁜 것도 아닌 그냥 산의 모습으로/ 아직도 잠들지 않은 산아래 깜빡이는/ 몇 개의 불빛을 따듯하게 그냥 바라본다.’
‘그냥 산의 모습으로’ 있기를 원해서였든지 아니면 누구의 말처럼 ‘무책임하고 무정견한 짓’이었든지 창간호에 창간사가 실리지 않았던 것도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문화저널은 단지 창간호의 한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하얀 백지위에 ‘문화저널은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라는 창간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100호에 이르기 까지 문화저널의 모토가 되어왔다.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정진하기 1년 88년 11월호 창간 1주년 기념호에 당시 진호 행인 겸 주간은 ‘이제 확고한 지향성을 견지하며 구체적인 작업들을 성실하게 해 나갈 것이다.’라는 권두언을 썼다. 거기에는 ‘공유할 수 있는 문학’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스스로 자기 활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위해 문화저널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혔다.
비평의 칼을 갈아라
문화저널은 창간 1주년을 맞으면서 시험대에 섰다. 문화저널 구락부라는 창간 당시의 명칭은 제 3호를 발행하면서 문화저널사로 제자리를 잡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과 전문화에 대한 내부적인 요구가 거세졌고 조직의 탄력도 한결 둔화되었다. 1주년을 전후해서 모두 초기 3년 동안 여섯차례의 합본호가 나왔고, 안팎으로 많은 문제제기가 뒤따랐다. 창간 1주년 기념호에 당시 mbc의 한긍수 씨는 ‘문화는 여가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므로 문화저널은 껍질을 벗고 삶의 문화에 기반하여 허위문화와 과감히 맞서 싸우라고 고언했다. 그는 그 대안으로 ‘정보지의 탈을 벗고 비평의 칼을 갈아라.’고 말해주었다. ‘우리의 문화에 대한 관심’, ‘값싼 문화에 대한 관심’, ‘고급문화가 아닌 대중적인 문화에의 지향’등은 문화저널에 쏟아진 값진 지적들이었다. 대사회적인 발언에 대한 요구도 거세게 쏟아졌다.
80년대를 넘기고 90년을 맞으면서 문화저널은 이제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지로서 자리잡기시작했다. 문화저널은 전라북도에서 유일한 문화비평지로 인식되었다. 해마다 장르별 비평과 전문가 좌담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문화를 리뷰하기 시작했고, 문화정책에 대해서도 비판과 토론의 장이 마련되었다. 문화공간, 예술회관, 관립예술단, 문예진흥기금, 향토축제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특집이나 기획취재의 형태로 다루어졌다. 물론 가장 많은 원고량을 차지해온 문화정보와 문화가는 지역문화를 개관하는 살아있는 역사로 쌓여져 왔다.
장르비평도 점점 활발해졌다. 지역내에 비평문화가 극히 박약한 상황에서도 전시, 연극, 문학, 무용, 국악, 음악, 영화 등의 전문비평이 실리기 시작했다. 정초왕, 김길수, 김정수 등의 연극평론가들은 지난해까지 연극 이외의 글은 단 한편도 쓰지 않은 채 오르지 연극 이야기만을 줄기차게 해온 기록을 남겼고,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문화저널을 통해서 발굴되었으며 적어도 150여 권의 책이 서평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최장기 연재물, 판소리 명창
지역문화의 뿌리를 찾아 백제 문화를 섭렵하기도 했고 전북의 실학자들이 따로 조명되는 꼭지가 연재되었으며, 민속에 대한 관심도 집요하게 추구되었다. 전북의 전래민요와 판소리, 전통악기에 대한 고찰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역시 걸출한 소리꾼들을 배출했던 고장답게 전북 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유별난 것이었다. 최동현 교수느느 ‘판소리란 무엇인가’라는 기획연재를 시작으로 ‘판소리 명창’에 이르기까지 89년 6월부터 95년 4월까지 장장 5년 7개월 동안 무려 63호를 연재하는 최장기 연재기록을 세웠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문화저널이 지향하는 문화의 개념은 문화예술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광의의 개념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각들이 다양하게 요청되었고, 문화저널은 보다 폭 넓게 문화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문화저널이 지향하는 진보성은 직접적인 정치。사회비평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주된 방식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은근하지만 옹골찬 기획들로 표현되었다. 문화저널이 즐겨 택한 방식은 땅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면서도 시대와 역사를 향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삶속에서 배어나는 정신을 만났다. 박봉우, 이광용, 임옥상, 박문기, 김용택 등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민족예술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이땅의 작가들이었다.
한편으로 문화저널은 ‘사람과 사람’을통해서 한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 인재들을 만나기도 했고 여성에게 주어지는 온갖 제약들을 이겨내며 당당하게 사회의 주체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잔잔하게 소개되도했다. 그것은 성공지향적인 대부분의 저널리즘과는 차별적인 특징이었다. 초야에 묻혀 자신의 신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발굴은 때때로 대어를 낚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옹기장이 이현배, 만두가계에서 빵을 빚으며 소리장단을 맞추는 소리꾼 부부등은 그렇게 발굴된 사람들이었다.
대안의 문화는 치밀한 실천으로
문화저널이 발굴한 전통과 사람들은 단지 지면을 통해 소개에 그치지 않았다. 문화저널이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실천의 방식은 백제기행과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시민문화강좌 등의 프로그램이었다. 백제기행을 통해서 그들의 삶과 정신은 많은 사람들과 깊이 공유되었고, ‘전라도의 춤...’무대로 모셔진, 그러나 이제는 늙어버린 예인들은 그들의 모든 재주와 신명을 풀어놓았다.
동학농민혁명은 그 실천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89년 6월호 문화저널의 문화칼럼을 통해서 원광대 신순철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자고 맨처음 제안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이종민교수는 다시 똑같은 제목의 칼럼으로 그 제안에 화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은 문화저널의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실천되었다. 맨 처음 떠난 제 1회 백제기행의 무대가 고부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문화저널의 관심은 집요했다. 기념사업회가 출발하기 3년전부터 매년 여름에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시민강좌를 지속적으로 열어왔고 그것은 문화저널의 지상강좌로 그대로 옮겨졌다. 박맹수 교수의 사료가 정리되기도 했고 그 문화사적 위치가 점검되었으며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많은 지면을 할애되었다. 이밖에도 한국미술사와 판소리강좌, 영화사 강좌가 지상강좌로 녹음되었고, 93년 11월에 시작한 이철량 교수의 전북미술사는 햇수로 4년을 넘기면서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당대의 이야기꾼들이 모이다
문화저널에는 당대의 이야기꾼들도 모여들었다. 박남준 시인은 이야기 보따리, 문학산책, 시인의 편지 등을 통해서 아름다운 시인의 감성으로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김두경의 옛말사랑, 김익수 。이완옥의 물고기 생태학, 김유석의 농촌일기, 옹기장이 이현배의 이야기 등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여성과 문화는 여성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으로 지평을 넓혔고, 소비자 문제 역시 갖가지 사례들이 소개되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건강교실은 단순한 상식의 차원을넘어서 보건과 복지로까지 문제의식을 넓혀갔으며,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도 각별했다.
문화저널의 사설격인 ‘저널이 본다’와 문화칼럼은 늘 문화저널이 지향하는 문화의 개념을확장시켜 주었다. 건강한 문화란 무었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곳에 있었고 한시대의 아픔이 또한 그속에 녹아있었다. 문화정책에 대한 일관된 주장이 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녹아 있었다. 수천 명의 해직교사들이 학교를 쫓겨났을 때 문화저널은 그 문제에 대해서 대사회적인 발언을 계속했으며 현장의 교사들과 해직교사들이 꾸미는 기획이 계속되었다.
미덕보다 더 큰 과제
그러나 문화저널은 그동안의 미덕에 못지않게 수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여전히 비평의 칼날은 무디고 제한된 취재는 자칫 균형감각의 상실을 가져올 우려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창간 99동안 633명의 필자들이 문화저널에 참여했고 약2천여 개의 기사가 씌여졌지만 단 한번도 줄 수 없었던 원고료는 고스란히 문화저널의 정신적 주채로 남았다. 창간호에서 언급되었던 지역문화의 정체성이 100호에 와서도 다시 똑같이 언급되어야 하는 현실은 거꾸로 그동안 문화저널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반문이기도 하다
20쪽짜리로 시작했던 문화저널이 지금은 100여쪽 안팎으로 늘었지만 그 문화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아직도 첩첩산중이 아닐수없다. 창간호에 쏟아졌던 격려와 질책은 100호를 넘어서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화저널이 창간으로부터 지금까지 결을 쌓으면서 가져왔던 고민과 문제의식은 마땅히 되돌려지고 나누워져야 한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었고 지방정부는 문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지역 문화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에 아직은 입맛이 쓰지만, 문화저널 100호에 쌓여진 수많은 고민과 토론과 이야기들이 보탬이 될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