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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 | [문화저널]
노동은의 근대음악사 음악의 생활화를 실현한 두레의 사회 1860년대 음악에 대한 사회적 이해
글/노동은 목원대 교수 한국음악과 (2004-02-12 12:17:06)
기층민중들은 왜 끼어 있었을까? 근대조선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은 농법개량으로 잘 살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배층에 맞서거나 외세에 대항하였는가? 그 이유가 밝혀진다면 근대 음악사의 고리가 풀어질 것이다. 이앙법 실시와 수평적인 공동체 문화의 발달, 그리고 세미(稅米)를 받아들이는 수취(收取)제도의 모순과 외세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스스로를 일깨웠다. 비록, 농민들이 남(국가와 토호)의 땅을 빌어 소작생활을 하고 있지만,제한된 땅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살판-죽을판으로 가족들을 내몰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자꾸만 늘어나는 농촌사회에서 기층민중들이 가장 먼저 눈 뜬 것은 토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바로 이앙법이었다. 농법변화를 일으킨 이앙법이야말로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핵심고리이다. 국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민들은 살기위해 볍씨를 못자리에 키워 논에다 옮겨 심는 이앙법을 사용했고, 그것은 17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앙법은 그동안 논에다 볍씨를 직접 파종하는 직파법과 달랐다. 이앙법은 예사 농법이 아니었다. 파종에서부터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키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증대시킬 뿐 아니라, 벼와 보리를 번갈아 수확할 수 있는 이모작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수리 시설 확충과 집약적인 소경영이 마련되어 상품화패 경제시대로 진입한 것을 계기로 그간의 인습적 사회신분제의 대변동까지 가져올 수 있었던 물적 기반이 이앙법이었다. 이앙법에서 촉진된 농업경영의 효율적 운영은 마침내 두레와 두레풍물을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두레풍물로 공동체를 더욱 공고화시켰고, 음악감수성을 높은 수준으로 성숙시켰다. 그러나, 이앙법에서 발전한 농업경영에는 또다른 측면이있었다 . 새로운 부농이 생김에 따라 지주로서 지위를 상실한 몰락양반(잔반)이 속출하고, 향호부민이라 불렀던 토호들이 경제력을 이용하여 향권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또 권력을 이용한 향리들이 정치권과 결탁하여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초과로 매겨 수탈하는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또다른 측면은 이앙법으로 농업과 수공업 분야에 경제력을 집중ㄷ시키느 srPrl가 되어 판매자와 구매자가 주기적으로 만나 거래를 행하는 시장이 예전과 달리 더욱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5일장뿐만 아니라 시장의 상설화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국가의 조세로 징수된 미곡을 보관하는 조창(漕倉)역시 세미(稅米)를 수납하는 곳으로 강길(水路)에 있는 전국의 모든 조창지역에서는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시장은 문화예술의 멀티미디어 공간이다. 18세기말만 하더라도 전국의 시장은 1천여 곳에서 5일장이 들어섰었다. 자연히 시장이 있는 곳에 파는 자와 사는 자가 모여 흥청거렸다. 판매상인인 보부상, 위탁판매자, 창고 업자, 운수업자, 은행업자랄 수 있는 객주, 브로커인 거간, 여관업자와 객주를 겸하고 있는 여각 등도 그들이다. 상품 유통과정이 활기를 띠고 소비자의 경제적 욕망과 생간자의 공금이 맞물려 정기 시장과 상설시장, 그리고 시전이나 향시, 또 전국의 조창지역 등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흥청거렸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유행도 알 수 있거니와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많아 훔쳐보기나 답답함을 풀어내는 곳이 시장이었다. 시장은 축제공간이자 요즈음 식으로 멀티미디어의 공간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이러한 곳은 상거래만 이루어지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이 소통되는 멀티미디어 공간이었다. 어디에선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시장에 누군들 나오고 싶지 않겠는가! 더욱이 난장판이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름판, 줄다리기판, 윷놀이판 보부상 놀이판,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노름판 등의 난장판뿐이 아니다. 저 유명하다는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사당패,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란이패, 중매구패, 광대패, 굿중패, 각설이패, 풍각쟁이패 등이 시시때때로 사람들이 마음을 뺏어 가고 있었다. 이들이 꼭뚜각시나 탈춤이며 산대놀이, 병신굿, 줄타기, 버나(접시돌리기), 삼판(땅재주), 장대타기, 풍물놀이, 춤, 판소리는 물론 삼현육각 편성(젓대 피리2000 장구 좌고)의 합주도 즐길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당이며 창기 그리고 광대패 악공들이 판을 쓸고 갔다. 물론 이들은 시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미를 씻어 내는 백중에는 어김없이 마을로 찾아갔고, 요즈음의 김덕수사물놀이처럼 인기를 끌었던 패들은 대원군의 부름으로 경복궁에서 초청공연을 하기도했다. 전라도 과양사람으로 순국지사인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을 보면 고종이 「아리랑타령」류를 들ㅇ어야 비로소 잠을 잤다고 밝히고 있다. 기층민중들의 민악(흔히 민속악이라고 말하는)은 전 계층의 음악적 마음이었다. 이 예인들이나 집단 이름은 그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치며 들먹여지는 패들이 아니다. 적어도 조선시대 기층민중들의 삶과 죽음 사이에 함께 호흡하며 그 문화예술의 질로서 민중의 삶을 다스려 온 아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뭇 사람들의 넋을 잃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예인집단들은 그 자리에서 도태되는 무서운 음악 사회였다. 그만큼이나 기층민중들응ㄴ 문화예술을 보는 눈이 요즈음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 있었다. 이시대에 사는 모든 예인들 또한 기칭민중드보다 더 뛰어나지 않고서는 밥도 빌어먹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기층 민중들의 문화 감수성은 그 수준이 무섭게 높아 있었다. 생각해 보자. 심지어는 지금도 전라도 땅에 가서 어설픈 기량으로 소리판을 벌이기라도 할라치면, 뭇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마당놀이의 여왕 김성녀의 고백이 우리들을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다. “그런 소릴 헐려면 그만 내려와~”라고 질타한다는 고백이. 그래서 전라도 땅에 마당놀이 공연하기가 좀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음악의 생활화를 실현한 두레와 두레풍물 기층민중들의 문화예술 수준이 왜 이처럼 높았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기층민중들 자신이 문화예술을 생활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앙법과 이모작이라는 농사 기술 축진과 함께 경제적인 농업경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도 농민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두레’를 조직하였다. 수평적인 공동노동 조직체였던 두레는 두레풍물을 발달시키고, 이것이 음악을 생활화하고 생활을 음악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두레조직은 기존의 수직적 향촌지배에서 벗어나 농민들의 수평적 연대를 공고하게 하는 기틀이 되었다. 두레풍물은 꽹과리 징 장구 북등 사물이 중심이었지만 그 악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낭기며 영기, 또 새납(태평소, 호적)이며, 땡깔이며 잠색 등이 있었다. 또 윗 마을 아랫 마을이 같은 자리에 있었던 큰 마을에는 몇 개의 두레 풍물 패가 있었다. 마을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두레가 있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마을은 일년 생활이 음악이었다. 그렇지만 두레풍물은 사물이 중심이다. 여기에서 사물이 장단악기라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모두가 장단으로 살고 장단으로 죽는 생활화가 마을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있었다. 어느 마을이고 그 구성체는 두레와 두레풍물로 문화 공동체가 되었으며, 수평적인 조직과 연대가 가능했다. 후에 다시 밝히겠지만, 바로 이 점이 1860년대 온갖 농민항쟁이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관군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장단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노래 가락을 더 세련되고 더 풍요럽게 만든다. 농민들이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까지 때로는 지신밟기, 쟁기로 논밭을 일구는 가래질 소리나 밭갈이 소리, 논밭에 거름주며 부르는 거름내기 서뢰, 논에 물 대는 물푸기 소리, 못자리에서 못단 만드는 모찌기 소리, 모심는 모심기 소리, 모심은 후 보름 지난 뒤 논매는 논매기 소리(초벌소리, 두벌소리, 세벌소리, 네벌소리),벼를 베는 벼 베기 소리, 그네(쇠틀)에다 낟알을 훑어 내는 그네 소리, 마당에서 대상을 차려 놓고 곡식 털기를 하는 개샅질 소리, 그 밖의 타작소리나 도리깨질 소리 등 모든 ‘일노래’가 헤련되게 발달되는 것은 두레풍물의 장단이 뒷받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활이 음악이었고, 음악이 생활이었다. 한국인에게 음악은 삶과 사회가 함께 만든 사회문화적 언어이다. 그런데, 왜 근대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역동적인 사회를 전개시켰을 까? 단적으로 말하면 기층민중들이 국가재정의 모든 세원(稅源)을 떠맡는 수취(收取)의 대상이 되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한 기층민중들의 각각이 항쟁으로 이어진 것이고, 유럽이 세계 시장을 독점 장악하기 위하여 식민지 개척에 나서는 범세계적 흐름을 조선이 더 이상 피할 수없다는 위기감의 팽배가 반외셍춘동을 전개하게 된 원인이었다. 일어서는 풍물, 조극 산하를 울리는 북소리였다. 궁가(宮家)에서 말단 공무원인 향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18~19세기의 상품화폐경제의 유통구조를 장악하고 국가권력을 행세하고 있었다. 또 각 지역마다 수령과 토호 그리고 향리 등 3자가 결탁하여 국가재정의 근간인 3정(전정, 군정, 환곡)보다 초과징수하고 있었다. 그 현장에서 농민과 천민들은 조상 대대로의 삶의 터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떠돌이 신세가 되어 산 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사람, 흑자는 품바타령으로 빌어먹는 도시의 거지떼, 흑자는 도족이 되어 사회적 문제가 축적되어 갔다. 더 이상 떠나지 않기 위해서 죽기를 작정한 사람은 벼랑에서 맞설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60년대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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