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문화저널]
어둡고 괴로워라
글/윤홍길 소설가.한성대학교수
(2004-02-12 12:16:32)
남편은 알맞게 취해있었다. 귀가 시간도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태평성대 같으면 가장으로서의 성실성을 제법 높이 평가해야 할 상태였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술을 마셔요?”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었다. 결코 퇴근 후에 한잔 걸치고 들어와도 무방하리만큼 한유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행분 여사의 입에서는 자연 모진 소리가 나 오고 말았다
“딸 가진 애비들끼리 모여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느라고 좀 늦었어”
달국 씨는 들릴락말락 낮은 소리로 현관 바닥에다 변명을 깔았다 . 코트를 벗는 남편을 곁에서 도우면서 행분여사 또한 엉겁결에 목청을 낮 추었다.
“그래서 걱정 끝에 인류의 미래를 건질 무슨 뾰족한 수라도 찾아냈수?“
“찾아내긴. 그저 땅이 꺼지게 신세타령만 늘어놓다가 뿔뿔이 헤어졌지. 딸들 지키느라고 집집마다 지금 난리들이야.”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으로 험악해졌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다 벗은 코트를 받아 들면서 행분 여사는 그코트를 상대로 한바탕 장탄식을 토했다. 그러자 하마터면 잊을뻔했다는 듯이 달국 씨도 덩달아 대짜배기 장탄식으로 맞장를 쳐 왔다.
“좀 어때?”
남편이 턱짓을 곁들여 물었다. 남편의 턱끝이 향하는 곳은 이제 고3으로 올라가는 고명딸 향옥이의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보나마나 또 헤드폰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참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들으나마나 또 헤드폰에서는 귀청이 터지게 볼륨을 높인 서태지와 아이들의그요상한 노래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을 것이었다. 어째서 요즘 애들은 헤드폰으로 귀를 고문하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되느 것일까. 어째서 요즘 애들은 윤형주나 양희은을 좋아하지 않고 노이즈나 룰라나 서태지와 아이들만 좋아하는 것일까. 행분 여사는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장탄식을 토했다. 대관절 어째서 그 음악 같지도 않은 음악. 암만 들어봐도 음악이라기보다는 소음처럼만 느껴지는 그 격렬한 가락과 율동에 사족을 못 쓰는지 그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비가 왔는데도 문도 안 열어 보고,못된 것 같으니.”
서운한 감정을 시선에 모아 딸의 방문 쪽을 행해 홱 뿌리고 나서 남편은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딸의 방에 먼저 들러 한바탕 예뻐해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어쪄랴,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품 밖으로 벗어나면 상전이요, 애물인것을.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딸의 비위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것이 피차 신상에 이롭다는 사실을 남편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인지 아새끼들인지 하는 그것들은 어떻게 됐대?”
“아직도 행방이 오리무중이래요. 철딱서니 없는 기집애들만 자살 대기조니 뭐니 하고 아우성치면서 이리 저리 몰려다니고 있어요.“
남편의 엄명에 따라 가사를 전폐하다시피 해 가며 진종일 추적한 각종 신문과 방송 뉴스를 행분 여사는 간추려 전했다.
“무책임한 녀석들 같으니! 제깟 것들이 뭐야? 뭔데 남의 귀한 딸들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장난들을 쳐? 은퇴하고 싶으면 조용히 은퇴할 일이지 공연히 왜 평지풍파는 일으켜서 나라 전체를 벌컥 뒤집어 늫느냐 이거야!”
남편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느라 집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깜빡 잊고 있었다.
“지깟 것들이 발해를 꿈꿔? 교실 이데아를 부르짖어? 흥, 욱기고 있네! 흑인들용모를 흉내내고 흑인들 박자에 맞춰서 흑인들 춤이나 춰대는 국적불명의 철부지들이 감히 그런 기특한 걸 주장할 수 있어? 매스컴도 마찬가지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예술이라고 매일같이 방송에 내보내고 우상을 만들어서 수많은 청소년들한테 병 주고 약 주느냐 이거야.내말은.“
“저 방까지 들리겠어요.”
행분 여사는 우선 남편의 입부터 단속하는 일이 급했다. 그니는 요즘 젊은 가수들에 대해
남편보다는 약간 관대한 편이었다. 모든 게 장삿속이라고 생각했다. 장삿속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갖은 정성을 다 들여 곱게 키운 자신의 딸이 그 장삿속에 놀아나 대학입시를 앞둔 중대한 시점에서 오빠부대의 일원으로 가담했다는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
“기왕 오빠부대 할 바엔 차라리 우지원이 팬이 돼서 농구장 쫓아다니며 괴성 지르고 스트레스 푸는 편이 나을 뻔했어요”
달국 씨 부부가 고명딸을 부쩍 염려하기 시작한 것은 인기 가수들의 잇다른 죽음 뒤끝이었다. 여학생들의 비관 자살이 화제에 오르자 부부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딸의 의중을 슬쩍 떠보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천연스런 반응이 힘도 안 들이고 나왔다. 그럼 너한테도 그들의 죽음이나 룰라의 은퇴가 절대적인 사건이냐는 물음에 제 우상은 서태지와 아이들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불과 며칠만에 바로 그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씻고 좀 쉬세요. 그래야 임무를 교대하죠.”
진종일 서태지의 행방을 뒤쫓는 매스컴을 따라 다니는 한편 두문분출하는 딸의 동태를 감시하느라 행분 여사는 흠씬 지쳐 있었다. 서태지의 집 앞에 모여 울며불며 소동을 벌이는 어린것들을 보고 부부는 대뜸 아파트의 베란다 쪽부터 단속했다. 눈에 띄는 기다란 줄이나 칼 따위도 집안에서 치워 버렸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어 24시간 부모가 교대로 딸을 지키는 중이었다.
“저게 뭔 소리야?”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던 남편이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다. 행분 여사는 대꾸할 겨를도 없이 벌써 딸의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방금 방바닥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를 분명히 들은 까닭이었다.
“항옥아! 항옥아!”
노크도 생략하고 안으로급히 들어섰을 때 그들 부부의 눈에 비친 것은 헤드폰을 둘러쓴 채 책상 앞에서 졸다가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딸의 참담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