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 | [문화비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정태춘의 외로운 투쟁
강준만(2004-02-12 12:14:55)
음반 및 비디오물 사전 심의 가 지난 6월 7일 폐지되었다. 음반 사전 검열은 1933년 조선총독부 경무부가 음악을 통해 조선인들의 정서를 통제할 목적으로 실시했던 것인데 그걸 없애는 데에 63년이 걸린 것이다.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 풍토를 감안한다면 63년이라는 세월도 빠른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사전심의 폐지는 대중 음악인들에게 저절로 굴러 떨어진 건 아니다. 부단한 투쟁이 있었으며, 그 투쟁을 도맡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인물이 바로 가수 정태춘 씨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 씨는 이렇게 말한다.
“서태지와 강산에를 비롯, 많은 인기 가수들이 말도 안되는 시대착오적인 법의 희생자였지만 오늘의 승리는 정태춘이라는 단독 흑기사가 처절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정태춘 씨는 ‘단독 흑기사’는 아니다. 그의 부인이자 투쟁 동지인 박은옥 씨의 희생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앨범을 내놓을 때마다 제도권과 마찰을 빚어가며 여론을 ‘사전검열 폐지’쪽으로 몰고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전 검열 폐지에 다 박수를 보내는 건 아니다. 일각에선 “심의가 없어진 틈을 악용, 저질.외설 가요가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정당한 우려다. 그러나 사전 검열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민주의식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기대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인가? 부작용 없는 자유는 없으며, 부작용이 두려워 자유를 포기하면 누리는 방법도 모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씨와 박씨는 사전 심의 폐지로 그들의 「아, 대한민국」(90), 「92년 장마, 종로에서」(93년) 등 두 앨범을 ‘불법’ 딱지를 데고 일반인에게 선을 보일 수 있었다. 두 음반은 불법 딱지를 달았다 뿐이지 노동 단체와 대학가 등에서 20여 만 개나 팔렸지만, 합법적인 판매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그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이겠는가.
어느 기자들이 그들의 「아, 대한민국」을 가르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시대의 위선과 치부를 실랄한 직설로 남김없이 폭로한 역작”으로 평가한다.
아직도 폭로되어야 할 사회적 위선과 치부가 흘러 넘치는 사회에서 그들의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정 씨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는 그간 자신이 ‘투사’의 이미지로 비춰졌지만 ‘가수 정태춘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저를 ‘돈키호테’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료 가수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저는 겸손하게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한 것 뿐입니다.”
“대중가수에서 운동권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어떤 인간적인 비약감 같은 것은ㅇ 느끼지 않았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정 시의 매우 솔직하게 다음고 같이 말한다.
“츠음 운동 진영의 사람들을 만나 공연을 했을 때 당황했다. 그들이 평가하는 기준이 나의 기준과 달랐고 그호를 외칠 때도 어색했다. 더욱이 그들의 그런 문화는 노동자의 것이라기 보다 학생들의 것이었고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나로서는 대학문화나 운동을 접하지 못한 사람으로 그저 흉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갈등을 많이 겪었다. 그렇지만 곧 익숙해졌다.”
정 씨는 익숙해졌을 뿐 ‘골수 운동권’은 아니다. 그는 ‘민중가요’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과거 지배세력이 정체가 무엇이냐고 할 때, 나는 민중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배세력도 많이 변했고 ‘나는 누구 편인가’락 물었을 때 혼돈이 오는 상황이었다. 그저 진보 그룹의 일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미흡하고 여전히 ‘나는 민중적’이라고 말하려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개념을 많이 쓰지 않고......... 그래서 운동 진영에 많이 참여하고 그들과 세계관을 함께 했던 나로서는 혼란을 느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중심은 여전히 ‘소외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어쨌든 민중이란 개념이 모호해진 지금 ‘민중가요’라는 그릇도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그 대안으로 언더그라운드 문화운동을 생각하고 있다.”(「한겨례21」96년 6월 27일)
정 씨의 투철치 못한(??)민중 의식에 실망할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사실 그 점이 정 씨의 돋보이는 점이다. 그는 운동권의 의식화 세례를 받기 이전의 평범한 시민이자 음반인으로서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정 씨의 의로운 투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혹 투쟁은 운동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닌가? 아니 ‘투쟁’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있는 건 아닌가? 그러나 자신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당할 때에 항변하는 걸 가리켜 ‘투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투쟁 정신을 거세당한 소시민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예 투쟁을 모르는 사람들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치열하게 투쟁을 해댄다. 사적 영역만을 놓고 보자면 우리는 모두 운동권 사람들인 것이다.
“가수 주제에 노래나 할 것이지!” “사랑 타령이면 됐지 무슨 얼어죽을 국가와 민족이야!” 정씨를 향해 쏟아졌을 그런 비아냥을 정씨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있다. 그는 거창하게 떠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한 것 뿐이다. 바로 이 정신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최대의 공이 아닐까? 그의 가수로서의 성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