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 | [문화저널]
「문화저널」100호의 발간을 축하하며
문화저널(2004-02-12 12:10:12)
깨어있는 정신으로 파종한 건강한 문화의 생명력
글/한승헌 변호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참으로 장하고 대견스럽도다”-지령 100호를 맞는「문화저널」앞에 이 말을 먼저 바치고 싶다. ‘친권자’도 없이 고생하며 제 힘으로 자라 왔다는 점에서 마치 성년의 나이에 접어든 소년소녀가장을 보는 듯이 감격스럽다.
「문화저널」이 87년 6월 항쟁의 최루탄 속에서 잉태되어 그해 11월에 창간된 지 햇수로 어언 10년째. 그동안 한 번의 결호도 없이 100호까지 발간해 온 그 놀라운 끈기와 남다른 노고에 대해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가 좀 달라진 듯 하면서 노상 그렇지만도 않은 이 척박한 한국의 풍토에서, 더구나 이 나라 안에서 가장 가난하고 설움 많은 전북 땅에서 「문화저널」 은 들꽃같은 생명력을 과시하며 전통과 현대 속의 ‘문화’를 파종하고 가꾸어 왔다.
내고향 젊은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내는「문화저널」에 대해서 나는 은근한 자랑스러움마저 느끼고 있다. 인간의 생활양식 전반을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문화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 공감을 느낀다.
또한 ‘전북’이라는 지역적 토양과 숨결 속에서 지역문화 창달의 기수임을 자임해 온 그 당당함이 믿음직스럽다.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 문화의 통폐를 깨고 문화예술의 전통적 본고장으로서 자부심을 되찾아 지역문화의 중흥에 선구적 역할을 다해 온 그 기개야말로「문화저널」의 큰 밑천임을 나는 확신한다.
붓끝에 애향심이 넘치다 보면 자칫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이 흐려지기 쉬운 법인데, 문화저널에 실린 글들은 그러한 걱정을 기우(杞憂)로 돌려놓기에 모자람이 없다.
전북이라는 지역성을 살리되 소재나 필자의 폭을 전북에 국한시키지 않은 점도 바람직하다. 제논에 물대기, 또는 자화자찬에 빠지다보면 사고(思考)의 균형을 잃기 쉽다는 것을「문화저널」은 익히 명심하고 있을 줄 안다.
전북문화저널사의 민주적 운영방식도「문화저널」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언론매체의 굴절 요인으로 흔히 자본 또는 권력에의 종속을 드는데,「문화저널」은 내가 알기에는 그따위로 섬겨야 할 ‘신주(神主)’가 없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재정적 고충이 크겠지만 그 대신 자유롭고 독립된 논의구조와 지면 제작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문화저널」의 가장 큰 강점일 것이다.
이런저런 덕목 중에서 나의 마음을 끄는 또 하나의 요소는「문화저널」이 풍기는 서민성이다. 먼저 편집일꾼들의 체취에서 드러나는 이 서민성을 잡지의 겉모습으로부터 그 내용에 담긴 정신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배어 있어 독자들을 친근하게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그 서민정신이 자각과 비판으로 이어지는 시민정신과 배접(褙接)되어 있어서 여간 미덥지가 않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00호의 지령을 쌓기까지 그야 말로 백번의 산고(産苦)를 함께 해 온「문화저널」식구들과 후원자 여러분께 뜨거운 갈채를 보내며 앞으로도「문화저널」의 의욕에 찬 깃발이 더욱 힘차게 펄럭이기를 기원한다.
제 뿌리와 땅과 공동체제에 대한 믿음
글/김종철『녹색평론』발행인·경북대 영문과 교수
온갖 자원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시대에 뚜렷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지방지로서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망본초란(忘本招亂)의 시대인지라 뿌리 없는 겉치레 문화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무섭게 다가오고 있는 사회적·생태적 위기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사람이 제 뿌리와 땅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각성이 언젠가는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많은 뜻있는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겠지요.
「문화저널」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지역에 뿌리를 둔 문화의 중요성을 애기하고, 그 문화의 정신적·물질적 토대를 되살리는 일에 더욱 크게 기여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은 그동안의 편집에서 보여준 건전한 사회의식과 비판정신에 근거하는 것입니다만, 앞으로도 구체적인 지역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되 그 시각(視覺)만은 세계적인 것으로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문화형성을 위한 교정제
글/박명규 서울대학교 교수·사회학과
문화저널이 100호를 맞게 된 것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거의 매일 책상 위에 놓여지는 여러 형태의 우편물들 속에서「문화저널」을 발견하는 날은 웬지 즐거워집니다. 그것은 전주에서 개인적인 추억들이 새삼스레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문화저널」이라는 책자가 주는 은은한 향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껍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만만치도 않은 이 책자를 넘기다 보면 마치 가을날 들녘에서 마주 대한 들국화와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문화저널」이 만들어지던 당시에 비해 오늘날은 과히 ‘문화’라는 말의 천국이라 할 만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사회학 분야에서도 문화에 대한 연구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다만 몇 년 전만 하더라고 ‘문화’는 비교적 관심의 바깥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거대한 문제들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80년대에, ‘정치·경제·사회’가 아닌 ‘문화’를 그것도 전국의 문제가 아닌 자기 지역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잡지를 간행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가히 도전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 도전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는 100호를 맞는「문화저널」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문화저널」은 돈과 재주로 만드는 책이라기 보다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책입니다. 화려한 선전과 함께 나타났다가 어느 날 사라져 버리는 책자들이 허다한 요즈음에, 정성으로 지켜져 나가는 이런 책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새로움의 추구라는 이름으로 온갖 이국적인 것들을 ‘문화’인양 착각하고 있는 오늘, 자기 삶에 충실한 생활인의 문화를 진솔하게 담아 내는「문화저널」은 더욱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 담론이 자칫 경박한 또 하나의 외국문화숭배로 이어질까 걱정스러운 요즈음「문화저널」의 잔잔한 목소리는 건강한 문화형성을 위한 교정제로서도 중요할 것입니다. 진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유행에 민감하게 튀지도 않는 주제, 높은 수준의 내용이면서도 어려운 말로 독자는 주눅들게 하지 않는 글쓰기, 유명인으로부터 일상 생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필자들「문화저널」의 이 소중하고도 놀라운 균형감각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잡지의 간행을 위해 거의 매일 고민하며 동분서주해 온「문화저널」의 식구들께도 축하의 말씀과 함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다시 한번「문화저널」100호 발간을 축하하면서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호남문화’의 구심점으로 서라
글/문순태 소설가·광주대학교 교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동안「문화저널」을 의욕적으로 이끌어 온 분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나는「문화저널」이 주최한 문화강좌에 참석하는 자리에서 전북 사람들이 지역 문화에 대한 애착이 참으로 뜨겁다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유도한 것이「문화저널」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내가 알기로「문화저널」은 그동안 전북 지역의 사회·역사·문화적 역량을 축적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보다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을 서 왔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밖에도 지역의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를 논의하고 의견들을 통합하는 일과 전북 사람들이 보다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를 열어 가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문화저널」의 200호를 생각하면서 다음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사실 전북은 전북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전북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전북문화의 중심부에는 전통문화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유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역문화의 강점은 고유성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요즘에는 문화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보편성이라는 것은 서구적 가치기준으로 보는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세계적 보편성이라는 서구인 문화의식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문화저널」은 전북문화의 고유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잘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각을 보다 넓혀 지역 문제를 전국화 또는 세계화하고 세계적인 것 전국적인 것을 전북화하는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북지역문제로 국한시키는 것보다는 ‘호남문화’ 전체를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전북문화와 전남문화는 한 뿌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문화저널」은 호남으로 시각을 확대시키기 바랍니다. 어차피 전북문화를 역사적으로 조명하자면 백제정신이라 동학 농민정신을 따지지 않더라도 ‘호남’전체와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문화저널」이 호남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광주·전남의 문화단체들과 서로 협력 연대의식을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국 어디에서나「문화저널」을 받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모든 호남인들의 아름답고 정의로운 마음들이 한데 모여 <문화저널>이라는 이름의 큰 마당에 함께 모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민중삶과 함께하는 문명전환의 씨앗
글/채희완 부산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부산민족미한연구소 소장
전북에 아는 이가 있어 『南民』을 가끔씩 받아 보고 전주에도 지역 문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참 반갑고 고맙구나 싶었는데, 지령 100호를 내는「문화저널」이라니 “저절씨구나 얼씨구” 추임새가 절로 납니다.
이태 전에 동학 백주년기념행사의 한가지로 고부·정읍 일원에서 벌이는 ‘역사맞이 굿’ 준비 차 문화저널 사람들을 만났는데, 옹골차고 야무지게 뒷일을 맡아 하는 것 보았습니다. 여러 덕분에 그 행사가 큰 탈없이 치러졌지요. 그런데 이제 문화저널의 사업 및 행사 연혁을 보니, 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의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그 몇 해 전부터 3회에 걸쳐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현재’에 관한 시민문화강좌를 용의주도하게 열었던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야 알겠네요. 그 큰 굿판이 뒷탈없이 보란 듯이 버젓하게 열리게 된 그 음덕을.
문화저널이 ‘계획적으로’ 규모있게 벌이는 사업 중에 알뜰살뜰 지역 문화의 역사 현장을 몸으로 모듬는 ‘백제기행’도 그러하고, 숨은 예인을 찾아, 무대로 모시는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도 그러하고, 문화저널이 있어 전라도 문화의 ‘자존심’ 문화저널이라 내세우는 것도 가당하고 그게 또 참 부럽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 문화의 본향은 전라도이고, 또 그게 우리 민족문화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그런 자존심은 온 나라 사람에게 내놓을만 합니다.
회의와 여자치마는 짧을수록 좋다지요? 문예행사판에서도 늘 느낍니다만 예우상 대접받아야 하는 축사나 격려사도 짧을수록 좋고,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본행사를 그르치게 질질 빼면 안돼지요. 그래도 한 마디, 만수무강하옵시고, 오늘 찌들고 쩔은 민중삶 속에 새로운 문명전환의 씨앗이 숨어 있다 하지요.
진정한 ‘홀로서기’의 길잡이
글/임진택 연극 연출가·소리꾼
‘홀로서기’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아서 그 시들이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지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베스트 셀러였던 그 시집의 명성이 거의 시들어가는 요즈음 또 다시 ‘홀로서기’라는 단어가 부각된 것은 다름아닌 ‘전라북도’의 장래와 관련되어서였습니다.
나는 일부 정치인들의 그러한 주장이 무척이나 가소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전북 홀로서기’는 사실상 ‘전라고 갈라놓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홀로서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라도를 갈라놓으려는 그들의 행태가 실로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그들에게 그러한 명분을 주게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랫동안 차등과 멸시를 받아온 아픈 역사에 대해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치유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혹 조급하고 감정적인 대응을 해 온 부분이 없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돌이켜 볼 때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역자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지금 ‘홀로서기’는 매우 중요한 명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내용이 전라남도에 대한 북도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천박한 발상일 뿐입니다. ‘홀로서기’는 중앙정부에 대한 자치단체의 대응이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중앙정부가 넘어뜨리면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면 일어나는 자치단첼면 존립할 이유가 도대체 없습니다. 나는 전라도만이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할 것 없이 모든 지역들의 스스로 홀로서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와 국민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홀로서기’에 대해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홀로서기’가 마치 ‘외발로 서기’인양 혼동하는 경우이죠. 홀로 서는 것은 두발로 버티고 설 때 가능할 것이지 외발로 서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전라북도더러 홀로서라고 요구하면서 외발로 설 것을 강요합니다. 전라도의 ‘홀로서기’는 북도와 남도가 두 발로 버텨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함께 두발로 설 때 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 전라도는 시급하게 ‘홀로서기’의 내용과 방식을 정립해야 할 때인 듯 싶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깨져나가고 그 삶의 뿌리이자 터전인 농촌공동체가 와해되어 가는 오늘날 전라도야말로 뜻을 모아 지켜 나가야 할 과제가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전라도가 먼저 올바른 의미의 ‘홀로서기’를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나라 전국 각 지역이 제각기 홀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저널」은 그와 같은 ‘홀로서기’를 실천하는 길잡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습니다.「문화저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빠리에서 -
안쪽 문화를 살려 바깥 문화를 성찰하는 일
글/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 불문과 교수
한동안 한국 사회의 중앙 편주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난 후 그런 얘기는 좀 수그러든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역간의 평등이 이뤄졌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문화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문화적 주제, 문화적 운동, 문화적 사안의 대부분이 여전히 서울의 손바닥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 단위의 차원에서 한국 문화가 미국 문화에 지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문화의 서울 편중을 우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 제국주의의 동심원적 구조 내에 그것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 문화의 지도 안에서 이 문화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지역을 찾기란 아주 힘듭니다만, 그렇다고 아예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북은 지방자치에 관한 논란과 무관하게 훨씬 이전부터 지역문화의 독자성을 살려 온 희귀한 고장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그것을 80년대 초엽 마산에서 여러 전북사람들을 만나면서 느꼈습니다. 노래방이란 게 없던 그 당시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뽕짝이 주류인 그 노래판에서 느닷없이 한 분이 판소리 가락을 뽑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주 기이한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지방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때 처음 지역문화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의 열풍이 지나고 얼마 뒤에 저는「문화저널」이라는 잡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이 놓은 데 놀랐습니다. 그 수준은 지역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하는 데 있지 않고 지역문화의 독자성으로 미국화의 물결에 휩쓸려 있는 한국 문화 일반과 당당하게 겨루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의 독자성이 일상의 감각이자 리듬으로 생활화되어 있는 고장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장은 아주 드물게만 있습니다. 안쪽의 문화를 살려 바깥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때문에 외롭고 힘겨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화저널」이 벌써 100회를 맞는다고 합니다. 그 숫자 속에서 저는 외로움과 고투의 주름살을 봅니다. 바깥 문화의 잠식력은 그곳에서도 위협적인 숨결을 내뿜고 있을 것입니다.「문화저널」의 주름살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름살은 생의 지혜와 경험이 새겨지는 자리입니다. 저는「문화저널」이 그동안 몸에 새긴 지혜와 경험으로 더욱 깊고 넓은 작업들을 향해 나아가리가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