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8 | [문화저널]
제 49회 백제기행
쪽빛 닮은 사람들의 쪽빛 여행
글/정선옥 성균관 대학원 공연예술학·연극배우
(2004-02-12 12:07:20)
여러 차례 별러도 시간이 맞지 않아 매번 아쉬움으로 대신해야만 했던 백제기행이었지만 제 49회의 ‘쪽빛, 그 아름답고 신비한 빛깔’이라는 테마 기획에는 모든 일 제쳐두고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행여나 자리가 모자라 기회를 놓치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에 곧바로 문화저널에 전화를 하니 정확한 날짜도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응답이다. 6월 말일 쯤이면 연습하고 있던 공연도 끝나고 학교도 방학을 하니 그때쯤이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며 달력에 미리 표시를 해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쪽물 여행을 떠난다고 수다를 떨었다. 4월 중순의 일이다.
드디어 출발. 시간관념이 희박한 대가 택시까지 타고 예전 시간 30분 전에 출발 장소에 도착했다. 바로 전날 밤을 꼬박 새서, 눈좀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여행의 짧은 일정을 잠에 뺏길 수는 없었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들이 버스에 오를 때마다 서로들 활기 있게 나누는 인사말과 웃음소리가 너무도 싱그러워서 나도 행여 낄수 있을까 싶어 눈빛 빛내며 좌석의 앞뒤를 살피는데 어린아이부터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두 들뜬 얼굴로 한 모습이 되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 나와 같은 모두, 모두와 같은 나, 나만 방방 뜬게 아니잖아! - 아무런 연관 없이 살다가 쪽빛이 인연이 되어 같은 버스에 동행이 된 사람들. 직업도 다양하고 이번 기행에 대한 기대도 저마다 다를진대, 나는 벌써 나이 차이와 상관없이 다들 친구같은 생각이 든다. 늘 연극하는 사람들 속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다른 직업,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새롭다.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말하는 표정과 입매, 눈살 찌푸리는 작은 움직임만 봐도 벌써 많은 걸 나눈 것 같은 친숙함은 아마 이번 여행에서만 가질 수 있는 특이한 교제 방법이리라. 보성 차밭을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는 벌써 얘기소리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남원을 지나면서 빗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도 좋고 빗발도 싫지 않은데 다만 쪽빛 물들이는 과정을 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들 어떠랴 싶어졌다. 창밖 풍광이 달리는 버스 속에서도 손에 잡힐 듯 정겹다. 이제 곡성의 산은 비에 깨끗이 씻긴 후 나즈막한 대기의 압력을 견디고 서서 방금 지나온 곳보다는 좀 더 단단한 매무새로 끝도 없이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 범상한 기운을 위로 뻗고 숱한 영역의 색채를 입고 들뜬 나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빗발이 굵어지더니 이내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몰아친다. 보성 차밭이 가까워지면서 설예원 원장님의 ‘차 이야기’를 들었다. 차를 즐겨 마시면서도 그 세세한 내용에 무심했던 처지로서는 ‘차 이야기’가 반가울 수밖에. 게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재미나게 얘기하는 재주를 가진 이의 감칠맛 나는 목소리에서는 차의 향취가 풍겨 오는 듯 싱그럽다. 어찌 이 사람뿐이랴. 세상에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며 사는 이들이 참으로 많구나. 삶의 가치를 진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뒤돌아볼 줄 아는 이들, 그리고 없는 시간을 내어 전통의 백을 찬찬히 짚어 볼 줄 아는 - 그 속에서 풍요롭게 웃을 줄 아는 이들, 고진스러이 이끌어 가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현대 문명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자신을 추스르며 살기에 아름다운 이들과의 시간은 그 차체가 낱낱이 즐거움이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차 맛 또한 일품이로고.
국악을 좋아하는 한 선생님의 지도로 우리 노래를 몇 곡 불러대니 율포 해수욕장이란다. 비바람에 너울대는 파도에 홀려 차창 열어놓고 큰 숨 몇번 들여 마신 후 배당된 숙소에 곧바로 연장을 풀고 식사를 마치니 곧바로 쪽물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사는 벌교 사나이 한광석씨, 그가 준비한 비디오 자료로 전통 염색법으로 쪽물 들이는 과정을 보고 나니 그는 우리에게 쪽물 염색과 함께 한 자신의 작업과 폭넓은 인식의 한 고랑을 파 보여준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다. 염색에 대한 내가 알고 있었던 평소 지식은 일행 중에 염색을 전공한 이들이 있어 궁금증을 대신해 풀어주었다.
우리의 전통 염색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살아가려는 의지가 살아 숨쉬는 듯 하다. 자연 소재의 염색 천에 스며든 자연 색채의 절묘한 조화는 햇빛 아래서 특히 색채의 멋이 더욱 빼어나게 반사되는 독특함이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꿈꾸곤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털고서, 현대 문명이 주는 편안함과 넘치는 물질혜택의 울타리를 넘어 한 발자국씩만 되돌아가 진지하게 자연과 하나되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는, 그래서 연극에 몸담은 나는 밀폐된 공간이 아닌 툭 터진 야외를 꿈꾸며 한 술 더 떠서 자연 채광 아래 모시의 올마다 스며든 천연 염료로 채색한 우리 옷을 입고 가장 본질적인 얘기를 질펀하게 풀어놓고 연극과 자연과 관객이 일치되는 시간을 마련해 보고 싶은 그런 꿈.
살아야 하기에 그저 살아가는 수동적인 작태가 싫어서이건, 농촌에서 도대체 수지타산이 맞지않는 농사를 하면서 뭔가 자신만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끝에 선택한 일이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에 부응한 우리 얼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었건 간에 지금 그는 쪽을 심고 거두며 물을 들이고 장인 정신을 몸소 터득해 가며 ‘한광석의 쪽물세계’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하고 흥겹게 했다. 다른 일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야기속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주인 아낙을 퉁명스런 퇴청 재촉을 여러 차례 받은 뒤에야 이층 간이 숙소로 돌아가 소리 공부하는 처자들의 판소 리 몇 대목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덜 익은 소릴지라도 그네들의 소리는 신선하고 대견했다. 장래 가능성만 가지고도 충분히 훌륭한 그들은 흥에 겨워 연신 청해대는 우리의 몰염치를 탓하지도 않고 춘향가에서 심청가 , 홍보가로 가분가분 넘나든다. 제49회 백제기행이 마련한 작은 음악회는 너무나 소박해서 방청객들의 열기가 한몫을 했다. 여기저기 수줍게 던져지는 추임새가 흥을 더하고 어깨가 좌우로 흔들흔들, 손바닥으로 북장단을 맞추니 이 아니 좋을쏘냐. 자고로 장식과 차림이 많은 자리일수록 본질이 흐려질 염려가 많으나 이날의 방해꾼은 율포 앞바다의 파도 소리와 너무나 시원하고 상큼한 밤바람뿐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문화저널 기자단이 손수 차려 주는 황송한 다과시간. 대자연이 간곡히 부르는데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고기 몇 점, 술을 챙겨들고 밤바다로 나왔다.
비는 그쳐 있고 하늘인지 바다인지 한통속이 되어 설크러져 있는데 짙은 먹장구름을 헤치고 둥근 달이 꿈에 본 듯 스쳐 간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억수같은 비가 내렸는데 참 자연의 애교어린 조화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달이 걷어 놓은 구름 사이로 별이 떠올랐다. 동백기름에 머리를 함초롬이 빗어 넘기고 연분홍 저고리 차려입고 님을 마중나온 처녀의 그리움 같은 별이 하나 둘 고개를 빼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이 백제기행 팀에게 내린 축복의 선물이라면 도리로라도 화답을 아니할 수 없제, 받기만 하고 돌려줄 줄 모르면 사람의 도리가 아닝게. 목소리 가다듬고 바다와 하늘을 향해 달과 별의 정기를 받으며 노래불렀노라. 시간 가는 종 몰르고.
다음날, 기분내다가 기어코 감기에 걸렸다. 연신 재채기를 해대며 벌교에 도착하니 한광석 씨는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준비성좋은 여성들은 욕심껏 흰색 면티셔츠를 몇 장씩 가져왔는데 맨 손인 처지로서는 눈공부 귀 공부나 할밖에, 커다란 단지에 쪽물 우려낸 염료가 들었고 작은 단지에는 붉은 물이나 분홍 물을 내는 잇꽃(홍화)잎이 가득 들어 발효되고 있다. 한광석 씨는 홍화 잎을 한 자루 준비해 놓고, 물을 끓이고 있다. 홍화와 쪽물을 들일거라고.
홍화가 든 자루를 물 속에서 담그고 부지런히 막대기로 건드려준다는데 처음 배어 나오는 황색 색소는 그냥 버리고 뜨거운 물을 다시 불고 홍색 색소를 추출해 낸다. 거기에 오미자국을 놓고, 잿물을 붓고 저으니 아하! 그 빛깔 감탄만 하고 있던 내 앞으로 티셔츠를 가져온 여성들이 앞다투어 발간 염료통에 손을 넣고 조몰락거린다. 티셔츠가 두꺼워서인지 연분홍색이 탁하게 착색되는데 그 물을 모시나 마직 천에 이용하면 제격일 것 같다. 충분히 배어등면 명반을 타서 마무리를 하는데 그럼 빨간 색이 더욱 선명해 진단다. 다시 여러 번 물에 헹구어 탈색되지 않게 하고 말린다. 여기저기서는 감탄사가 홀로 나오는데 나는 욕심에 티셔츠 못 가져온 걸 한탄하는 한숨만을 내쳐쉬었다. 다음은 쪽물 차례, 염료가 든 항아리에 옷을 푹 담그고 조몰락거리다 꼭 짠 후 탈탈 터니 진초록에 가깝던 색채가 점점 쪽빛으로 변한다 거참 신기한 일이다.
무대 작업을 하다보면 배우 일 말고도 의상을 맡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품 분석을 마치고 각 인물에 맞게 의상 디자인이 나오면 천의 재질과 색상을 찾아다니는 일이 가장 번거롭고 시간걸리는 일이다. 혹여 작품에 맞는 천의 색상이 조명 아래 뜨거나 지나치게 선명하여 무대 위에서 겉돈다.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전통극을 할 경우는 특히 그러한데, 의상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염색, 특히 우리의 전통 염색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연극 무대에 온통 전통 염색으로만 된 의상이 펄럭인다면 그 얼마나 환상적이겠는가.
한광석 씨의 인솔로 일행 중 몇 몇이 쪽밭의 피를 뽑으러 논에 들어갔다. 질퍽한 논에 발이 푹푹 빠지고 땅에 찰기가 있어 발을 옮기려면 힘이 드는 모양인데 논두렁에서 한광석씨는 고전하는 일꾼들을 보면서 장난기 많은 웃음만 배어 물고 있다. 그가 완성해 놓은 다양한 색채들은 모시 천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어 가히 예술품이란 말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볼수록 깊이가 있는 색채의 두루말이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방에서 그것들을 꺼내는 그의 눈빛은 장성한 자식을 인사시키는 듯 조심스럽고 자랑스럽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들의 하나하나가 피와 살일 게다. 제대로 된 색채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자주 시행착오를 경험했으며 따가운 눈총을 외면했으며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해야 하는 처지가 막막했을 것인가. 다행히 그의 얼굴엔 자부심과 긍지가 배어 난다. 잊혀져가는 소중한 우리네 생활 문화의 한 켠을 지키고 있다는, 그래서 참된 목표와 그 자신의 열정을 바칠 일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것을 지켜 가는 참일꾼들이 많다. 그들은 대량생산의 시대에 묵묵히 수작업을 하면서 자연에 순응하여, 자연과 일치하는, 결국 인간이 자연의 은혜를 입는 통로를 열심히 닦아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쪽빛의 신비한 빛깔보다도 그것을 일궈 내고 지키는 이의 퍼런 손에 더 깊이 물들었고, 이 모든 것을 소중한 눈으로 건져 올리는 안목을 지닌 백제기행 주최측에 가금 따뜻해졌고, 쪽빛에 가슴 시리고 그것의 가치를 가늠할 줄 아는 이들의 행보에 뿌듯했다. 바로 이들이 있기에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는 미약하나마 가치 있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 쪽빛 기행은 쪽빛을 닮은 사람들과의 한바탕 놀이였다. 만나고 즐기고 배우며 깨우치는 자연스런 과정을 퍽 인상깊게 받아들였다. 지금 내 가슴은 온통 쪽빛, 여름 내내 신선한 바람이 무시로 넘나들 것 같다.
정선옥 / 전북대 독문과를 다니던 86년부터 연극을 시작했다. 극단 디딤예술단의 대표를 지냈었고 지금은 성균관대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