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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8 | [저널초점]
저널이 본다 평화의 잔치 올림픽과 두 개의 조국
글/정철성 「문화저널」 편집위원 (2004-02-12 12:06:30)
빛이 넘치는 팔월의 하늘에는 찌는 듯한 열기가 조용히 걸려 있다. 나뭇가지에 늘어진 잎새들이 어쩌다 스치는 바람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맛있게 들이킨다. 들이켜보면 사람이 이 골짜기에 들어와 터를 이루고 살기 전에도 자연은 비슷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꾸고 있었을 것이다. 팔월의 햇빛에는 만물이 자신의 성장에 놀아 움찔거리면서 껍질을 벗고 한 치수 더 큰 외피로 갈아입게 만드는 자양분이 있다. 한편 살아 있는 것들이 삶의 희열을 노래하는 그 순간에도 바로 아래 밑바닥에서는 삶의 곤한 무게를 벗어버린 주검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분해되고 있다. 빛이 가장 강할 때 그림자 또한 진하다는 비유는 이런 장면의 역설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팔월의 풍경은 풍요의 절정이 뿜어내는 윤기와 밑바닥으로 침몰하여 썩어가는 것들의 냄새를 공유한다, 그리하여 한여름에 느끼는 자연의 위력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서로 다른 두 개의 힘이 같은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근대 올림픽 백년을 맞아 화면과 지면이 어지럽다.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몇 개나 따는지 그래서 우리가 세계의 몇 등 국민이 되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도무지 허망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예를 들어보자. 육상의 백미는 역시 백 미터 달리기이다. 백 미터를 십초에 달린다면 백분의 일 초에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십 센티미터이다. 이 한뼘의 거리를 좁히려고 선수는 온몸의 힘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짜고 있다. 한 뼘의 차이가 사냥꾼에게는 잡느냐 마느냐의 거리이고 쫓기는 짐승에게는 더 절박하여 사느냐 죽느냐의 거리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수렵 시대가 아니라 탈산업 정보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설령 우리가 수렵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수렵의 불안정한 확률에 생존을 걸기보다는 농사를 지어 곡식을 터는 쪽을 택하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육상의 최단거리 종목이 백 미터 달리기라면 최장거리는 마라톤이다. 마라톤 경기도 마찬가지이다. 백 리가 넘는 길을 두 시간에 달려야 할 절박한 필요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전설이란 사실보다 덧붙여진 부분이 더 많은 법이지만 기원전 490년에 그리스의 한 보병이 목숨을 걸고 달려야 했던 승리의 소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마라톤 선수로 떠오르는 인물은 손기정과 황영조이다. 마라톤을 마라손이라 발음하는 노인들이 당시의 감격을 얘기할 때면 백범 김구와 같은 로맨티스트가 아니더라도 공연히 눈자위가 뜨거워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기정 선수의 달리기에는 일장기 말소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고 그것이 그를 단순한 마라토너가 아니라 시대의 선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황영조가 다른 나라 선수도 아닌 일본 선수를 제치고 언덕을 넘어 주경기장에 들어설 때의 감격도 상당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승선을 향하여 두 손을 치켜든 그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여유가 넘쳐 아쉽다는 느낌의 이면에서 시대가 바뀌고 감수성도 달라졌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왜 달리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기록에 도전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흔히 다른 동물들의 능력과 인간의 기록을 비교하여 사대적으로 인간의 신체적인 능력이 보잘것없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도구의 도움 없이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 도전과 성취라는 단순한 도식은 기록 갱신에 성공하느냐 마느냐를 넘어서 시도만으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한가지 일에 몰두하여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선수의 모습이다. 저기 텔레비전 앞에, 아니 더러는 아직도 벌레 우는소리로 지글거리는 라디오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둘러앉아 숨죽여 승전보를 기다리는 고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선수들이 있다. 이것이 올림픽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올림픽이 신에게 바치는 정성을 몸으로 표출한 것이었다면 인간의 시대에 우리가 그 대상을 인간으로 바꾸는 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올림픽이 개인적인 명예를, 결국은 금전적인 보상을 얻으려고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장에서 훌륭한 기록을 세운 선수와 시장에서 승리한 부유한 상인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빨리, 높이, 힘차게’라는 구호에만 집착하여 올림픽이 평화의 잔치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금메달의 빛깔에 사로잡혀 화려한 축제의 마당 뒷전에 그리고 그림자에 묻힘 담 너머에 떠도는 - 전쟁과 기아의 공포에 질린 - 얼굴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한민족은 두 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하였다. 북한에도 국기에 해당하는 깃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지내던 시절과 달라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북한을 잘 알지 못한다. 미국의 어린이는 저 나라가 핵폭탄을 만들다 보니 가난해져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나라가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도 올림픽을 보고 있는가? 북한에 사는 사람들도 금메달을 기다리고 있는가? 고정 간첩과 탈북자와 귀순자 말고 북한에는 누가 사는가? 현실의 벽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우리의 가슴은 한국이 두 개의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조국을 되찾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창밖에 걸린 동고산에는 여름 오후의 무성한 초록빛이 가득하다. 자연의 순환에서 우리는 죽음마저 새 삶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 위하여 잠시 헤어지는 이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대자연에는 새로 태어나는 것도 없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없다. 다만 자리를 바꾸어 다른 결합의 형태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서 갈라진 부분들은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 같다. 팔월의 빛이 우리에게 지혜를 베풀어 온전한 조국을 되찾는 길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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