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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8 | [문화저널]
작고한 살풀이 춤 명인 - 장녹운 천근만근의 한으로 풀어낸 예순일곱 해의 생애 영원히 숨어있는 명인 장녹운
정리/편집부 (2004-02-12 12:05:54)
살풀이춤의 명인 장녹운 씨(본명 장옥순)가 지난달 18일쯤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홉 살 때 판소리를 시작, 열세 살부터는 춤을 익혀 검무, 화소춤, 승무, 살풀이 등을 고루 섭렵했던 그는 국악 외길을 걸어온 숨은 명인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온몸을 감싸는 통증으로 병원을 찾아다니다 폐와 간, 취장에까지 번져버린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지 20여 일만에 그는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영영 떠나갔다. 그의 삶이 그러했듯이 원광대 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그의 빈소는 떠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더없이 외롭고 쓸쓸했다. 문화저널의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 92년과 95년 두 차례나 초대되어 사풀리춤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그는 그의 춤을 사람들이 기억하기 시작하자 곧 세상을 버린 셈이 됐다. 그의 살풀이춤은 ‘춤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 진지한 자세로 여유하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을 들어 장단을 맺는 맵시가 매력적이다. 들어 올린 팔로 장단을 휘감아 뿌릴때는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춤이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살풀이춤의 진가가 확인된 무대는 1984년 국립국악원이 마련한〈한국의 명무전〉이었다. 아홉 살 때 고향 남원을 찾아든 협률사 공연을 구경하다 노래에 홀려 소리판에 뛰어든 이후 그는 서울, 경남 하동, 순천, 광주, 전주 등 전국의 권번을 운명처럼 떠돌면서 소리공부를 다녔다. 당시 소리공부의 거의 유일한 길이었던 권번에서 그는 다시 춤을 만났고 전주에 와서 비로소 그는 그의 스승이었던 정형인으로부터 춤을 사사받았다. “살풀이요? 살풀이가 어디 모양으로 추는 춤입니까. 살풀이는 한으로 추는 것인디, 한이 어디 그렇게 가벼운 것이요? 사람이 그리워서 쫓아가 잡고, 잡을 듯 말 듯 잡지 못허고, 애통하게 돌아설 때 거기서 바로 가을감나무 떨구듯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까. 어쩔수 없어 스스로 돌아서는 한의무게를 내 인생의 무게를, 내 몸뚱어리에다 실어서 추는 것이 살풀이입니다. 이 손사위 하나만 보더라도 낙엽사위라고, 손을 이렇게 꺾을 때, 공중에서 시름없이 떨구는 낙엽 지듯이 꺾으면, 그 손짓이 가심 속 한을 쓰다듬어 울게 하는 것이지요.” 권번이 무너지고 조직적인 예인활동이 등장하면서 그 역시도 국극단활동을 시작했다. 비로소 예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60년대 들어 국악협회가 지방마다 만들어졌고, 전주에 자리를 잡은 그는 국압협회 전북 부지부장까지 지내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국악이 새로이 조명받고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때맞춘 듯 전주를 떠났다. 한창때인 마흔살 나이에 구성진 수리성으로 좌중을 휘잡았던 그는 목이 갈려 소리를 작파해야 했고, 거기에 지병인 관절염으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던 그가 다시 84년 <한국의 명무전>에 홀연히 나타났다. 명무전을 계기로 그는 다시 전주로 내려왔다. 92년 문화저널이 마련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무대에 그가 처음 섰을 때, 사람들은 그의 몸서리쳐지도록 감동적인 춤을 두고두고 이야기했었다. 주위의 권유로 이리시 영등동에 「판소리 보존연구회 이익지부」를 열고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 열정을 쏟으면서 그의 딸과 함께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살풀이춤을 이어가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를 모아 지난해 지방 무형문화재를 신청했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겼고, 마음의 상처는 그의 육신을 더 이상 지탱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갔다. 그의 뒤를 이어 국악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큰딸 유지연 씨는 어머니가 마지막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가신 그길을 못내 서러워했다. 지난해 문화저널의 무대에 앵콜 초청된 그는 그 살풀이춤을 추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얀 한복에 말없이 서리서리 풀어내는 그의 맺힌 한은 그 무대를 온통 울렸고, 결국 그 살풀이춤은 그의 고별무대가 되었다. 그는 비록 세상이 정해놓은 명창이나 명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춤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깊이와 한의 무게를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영원히 숨어있는 명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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