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8 | [문화저널]
이 여름의 책 이야기 ①
갇혀서 오히려 자유로웠던 저자의 메시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글/권영덕 전북청년문학회 회원
(2004-02-12 12:04:43)
푹푹 쪄서 소금땀이 줄줄 흐른다. 찬물을 끼얹고 선풍기를 틀고 수냉식 공냉식을 다 동원해도 금세 덥기는 마찬가지다. 북한 동포들은 다 굶어 죽는다는데 지금 이 땅에서는 ‘먹으면서 확실히 10kg 빠지는 법’, ‘올 여름 태양이 당신의 몸매를 훔쳐본다. 섹시 완성 다이어트“가 판친다.’ 또 사흘 굶은 사촌 앞에서 밥상을 차려 놓고 ‘절 한자리 하면 숟갈 주지’ 좀상스럽고 모질게 먹는 것으로 을러대는 세상 꼴이 나를 열받게 한다.
이렇게 더운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해 보지만 영 신통치 않다. 개고기국을 먹으며 기름 반 땀 반 흘리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브리짓드 바르도 당의 점잖은 당원들이 눈을 흘길 테고, 산으로 바다로 싸 들고 나가자니 그것도 마땅치 않다. 요맘때 우리 산과 바다 어디 발 담그고 동당댈 곳이 남아 있겠는가.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과 쓰레기에 치여 몸과 마음 상하고 길 위에 헛돈 뿌리기 십상이니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요즘 휴가인 나처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우성 윗통을 활활 벗고 잠방이 걸치고, 대자리에 네 활개를 쭉 뻗고 눕는 것은 어떨까. 아내는 요즘 나 때문에 잔소리가 참 늘었다. 휴가이니 어디라도 다녀오라고 한심한 듯이 채근한다. 나를 집밖으로 밀어내고 싶은 모양인데 어디 될 말인가.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홀로 있어도 스스로 옛사람의 경지에 나 같은 필부가 이를 수도 없겠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은 바에야...... 삼초를 편안히 하고 눈을 지긋이 감은 다음 마음으로 오르내리는 배꼽을 바라보고 깊고 길게 숨을 쉰다. 그리고 밖에서 들었던 온갖 뜬소문이며 이쁜 여자들이며 책들을 잊어버리고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름은 더워야 마땅하고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것인가.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그것이 열로 뻗치는 나 자신이나 다스리면 이 여름이 조금은 시원하지 않을까? 이렇게 확고한 피서법을 가진 내가 ‘한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이야기’를 쓴다는 일이 어찌 땀 나는 일이 아닐 것인가. 나는 애당초 책읽기로 시원한 여름을 보낼 재간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무엇을 읽지 않으면 눈에 다래끼가 나는 분들이 여전히 있을 테고, 나 또한 하다못해 신문이 안들어오면 전화로 신문사 지국 총무를 닦달하는 자로서 내 어긋난 피서법을 크게 다치지 않는 둘레에서 책을 골라 보기로 했다. 우선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지 않은 책, 너무 재미있지는 않은 책을 찾기로 했는데, 그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이고 지금 책꽃이에서 이 책이 꽃혀 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읽을 만한 책을 찾아 책가게를 헤매는 기쁨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더운 여름에 책의 바다에서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끙끙대는 것보다는 자기 책꽃이에 있는 읽을 만한 책을 꼼꼼히 찾아볼 일이다. 잘나가는 새 책이라고 소문을 듣고 우우 몰려가 샀다가 종이 값만 올려 주고만 쓰디쓴 기억들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통일혁명당 사건’의 무기수였던 글쓴이 신영복씨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하는 계수(1부), 형수(2부), 부모님(3부)께 드리는 편지를 모은 것이다. 나오는 메시지로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가 닿는 조용한 호소력을 준다. 글쓴이는 갇혀 있는 자기가 녹슬지 않기 위하여 녹을 닦아 내는 그의 노력이 징역살이임을 말하면서 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과 역사는 무엇인가. 그 자신에게 준열하게 묻고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한다. 민중이나 역사라는 말은 한물 간 유행어처럼 손가락질하며 말하는 오늘날 그는“......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아무리 작고 외로운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민중의 뿌리가 뻗어 나와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이라고 준열하게 꾸짖는다.
이책은 굳이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펼쳐지는 곳부터 읽어내리면 된다. 그곳에는 믿음을 세운 한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지켜나가는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시간을 어떻게 지켜나가는가를 선승의 죽비가 되어 우리 어깨를 호되게 내려친다. 어디 그것뿐이랴. 사람들이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한 역사는 끝나지 않으며, 잔치가 끝나면 또 새로운 잔치가 준비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잔치들이 모여 대동의 잔치가 되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은 갇혀서 오히려 자유로웠던 그가 이제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당신은 그러한가.” 그리고 그 대답은 책을 쥔 스스로가 해야 한다.
늘 머리맡에 두고 읽으시기를 권한다. 담배 한 대를 피실 때, 아니 화장실에 갈 때, 늘 읽는 것도 괜찮겠다. 일을 볼 때마다 아무데나 펼치시면 땀 뻘뻘 흘리지 않아도 되고 똥내가 시원한 댓바람 속의 깊은 묵향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니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제목은 좀 섭섭했다. ‘...으로부터...에서의’ 따위의 말법은 일본어의 직역이다. ‘감옥에서 한 사색’이나 ‘감옥에서 쓴 편지’로 했으면 어떨까. 아마 그분 탓은 아닐 것이고 출판사의 잘못으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금방 소나기 한줄금 쏟아졌다. 소나기 때문에 그친 매미 소리가 다시 청청하고 하늘도 맑다. 여름이 한창 깊었으니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알겠다. 시원한 여름 보내시기를......
권영덕 / 1959년 부산에서 나고 홍익대 수학과를 졸업, 현재 전북 청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글쓰기 교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