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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8 | [문화저널]
새로운 화풍 지향한 표현주의 화가 진환
글/이철량 전북대교수·미술교육과 (2004-02-12 11:59:18)
1930년대 우리 나라 서양 화단의 새로운 기류는 표현주의적 화풍이 나타났다고 말 할 수 있다. 학자들의 지적대로 표현주의는 대단히 모호하면서도 실체가 없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표현주의나 표현적 화풍을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미술경향이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표현주의에 대한 주체적 실체는 없으나 적어도 표현주의적 화풍이 한국 화단에 등단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라고 보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양화가 1910년대를 기점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볼 때 1910년대에서 193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인상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보겠다. 물론 인상주의 화풍 뿐만 아니라 고전파 화풍이나 혹인 개인적 접근이지만 독특한 역사화 등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경향은 인상파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1930년대의 표현적 화풍의 대두는 또한 새로운 변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무렵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평론가 오광수 선생은 두 가지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기법으로서의 표현적 경향”과 “이념. 상징체계로서의 표현주의 경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인물들로서 구본웅, 이중섭, 임군홍, 황술조, 김종태, 주경 등이다. 이들과 함께 거론될 수 있는 작가가 전북에서 자란 진환이다. 그는 한창 젊고 혈기있던 때인 21세 때인 1934년에 일본에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혹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그와 그림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는 당시 새롭게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었던 유화라고 하는 그림을 그렸던 선배 화가들과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순래가 운영하고 있었던 간판점에 드나들기도 하며 김영창 등과 어울리기도 했다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환이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또한 당대의 상황으로 보아 신미술을 공부했던 점은 그의 성격이 매우 진보적이며 개척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던 갓으로 보인다. 진환은 1913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51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림과도 인연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그는 일본 유학기간을 제외하고 나면 그의 작업기간은 불과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고 그의 면모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본격적인 유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속에는 표현주의 화가로 지목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말하자면 그는 당대 상당한 진보적 경향의 새로운 화풍을 소화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진환이 일본에 건너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1936년 신자연파협회전에 출품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어 화가로서 입지를 내져냈다. 그가 일본에서 이렇듯 본격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1939년은 전북에서 이경훈과 김영창, 그리고 문윤모가 일본에 유학하던 때였다. 그러니까 진환은 이들보다 상당히 일찍 신미술에 눈을 떴던 인물이었다. 그해는 또한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이 재동경 조선미술협회전을 개최했던 해이기도 하여 한국 학생들의 작품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해이기도 하였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중에서도 특히 진환이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은 1941년도에 이르면 이중섭, 이쾌대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그룹활동을 벌이게 된 점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신미술가협회는 그 이전의 다른 동인전보다 성격이 분명하고 비교적 작품성향이 뚜렷했던 당시의 진보적인 화가들의 모임체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때 진환은 이미 신자연파협회의 공모전에서 장려상과 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의 입지와 성향을 뚜렷이 하고 있었으므로 신미술가협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는데도 같은 성향의 작가들의 모임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진환의 이 무렵의 작품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함께 참여했던 작가들의 성향을 참고해 보면 이렇다. 창립 동인들은 이중섭, 이쾌대, 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김학준 등이다. 그러나 이들 중 이중섭과 이쾌대의 일부 작품이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의 작가들은 상실되었다. 이 모임을 주도했던 이쾌대와 대부분 활동을 운영했다고 전해지는 이중섭의 작품의 성향은 상당히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특히 이중섭은 1930년대 후반부터 소를 집중적으로 많이 그렸다. 그리고 진환의 작품에서도 소가 많이 등장한다. 이중섭에게서 소는 단순한 소재로서의 소로 나타나지만은 않는다. 그는 소를 상당한 정도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소는 색깔이 누런 황소이다. 그러나 이중섭의 소는 황색보다도 흰색을 많이 띈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 그림이 절규하듯, 울분하듯 하는 거센 몸짓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에서 이중섭이 한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황소를 소재로 취해 민족적 색채인 흰색으로 입히고 일제에 항거하는 자존의식을 표출해 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많다. 어떻든 이러한 표현의 연속적인 작업을 통해 이중섭은 독특한 상징체계를 이룩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표현파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중섭을 통해 보면 당시 신미술가협회의 경향을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관전에서 진환의 작품 성향을 추적해 보면 진환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진환도 소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에 대한 단상은 이렇다. “몸뚱아리는 비바람에 씻기어 바위와 같이 소의 생명은 지구와 함께 있을 듯이 강하구나, 둔한 눈망울, 힘찬 두 뿔, 조용한 동작. 꼬리는 비룡처럼 꿈을 싣고. 아름답고 인동덩굴처럼 엉클어진 목덜미의 주름살을 현실은 생활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 시간에도 나는 기대에 떨면서 소를 바라보고 있다.” 진환의 소에 대한 관찰과 감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오랜 민족의 역사를 거대한 소의 몸뚱아리에 비기고 목덜미의 주름살은 일제의 압박에 인동초처럼 견뎌 내고 있는 한민족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기대와 희망찬 눈초리를 소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태도는 진환이 소를 단순히 하나의 애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도 어쩌면 이중섭과 같은 맥락에서 소를 바라보는 어떤 이념과 상징적 표현으로서 표현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 속에서 이러한 모습은 쉽게 발견한다. 그의 화면 속에 나타난 소는 단순히 소로서만 설명되지 않는다. 소와 함께 묘사되고 있는 또다른 세계들이 그의 작품의 의도를 읽어 내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때의 모습들은 대개가 우리의 전통생활, 인물 , 풍경들이 곁들여지면서 소로 하여금 그 어떤 작가의 내면 세계를 설명하게끔 유도시킨다. 그것은 다름아닌 진환의 현실이면서도 도 다른 희망이면서 욕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품이 기법으로서의 어떤 대담성이나 색채 표현에서의 과감한 모습은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담백함이 더 인상적이다. 혹시 진환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전통적인 표현감각을 익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진환은 기법적 측면에서의 화면 구성의 임의성과 또한 내용의 상징적 측면에서 분명 당내에 표현주의적 경향의 작가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전북 지역 화단에서는 파격적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불행하게도 그의 작품 활동이 너무 짧아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지역 미술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오지 못했던 아까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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