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7 | [저널초점]
우리문화의 보이지 않는 힘, 한지의 역사
전주 한지의 어제와 오늘
글/김태호 「문화저널」기자
(2004-02-12 11:51:06)
미래사회에 대해 온갖 예측과 기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문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시대를 좌우하는 힘은 전통과 역사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른바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기억되고 보존되어져야 한다. 이번호 ‘저널초점’은 전북지역의 독창적인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지만 지금은 그 원형조차 사라져버릴 위기에 빠져있는 전주한지의 역사를 찾았다. 전주한지는 문화의 시대에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가능성있는 문화상품으로 꼽히고 있다. 앞으로 ‘저널초점’은 이같은 독창적인 문화유산들을 계속해서 점검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서 종이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던 고구려 소수림왕 때 종이 만드는 기술도 함께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잇고, 자생적으로 종이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서 이미 조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건국부터 소수림왕 때까지의 일을 기록한『유기(留記)』(600년)에는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닥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적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는 소수림왕때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종이 사용과 관련해 저간의 상황을 짐작할 만한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서기 610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기술과 함께 제묵법(製墨法)등을 전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지는 질기고 빛깔이 고와 신라때부터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특히 중국 송나라때에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종이가 먹을 먹는 품이 고려지만큼 겸손한 종이가 송나라 천지에는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종이에 대한 전통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중국이고 보면 우리나라 한지의 우수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려시대에는 구책사업이 불겨의 간행으로 한지의 수요가 양적으로 증가했고, 현종이후 대장경의 계속적인 조판에 힘입어 제지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종이 생산은 보다 활기를 띠게 된다. 예종때에 이르러서는 닥나무 심기가 권장되었고 명종때는 이를 법제화했음을 볼 대 종이 생산이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지 수공업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된 것은 역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러한 전통하지는 조서시대에 기록문화의 발달과 함게 크게 활성화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문사용과 함게 한글이 창제되고 개인문집 발간등 기록문화의 여건이 왕성해지면서 고려시대의 일부 특권계층과 중인계급의 아전들이 한문과 이두를 사용했던 때와는 다른 조건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설치된 조지서는 교육제도의 발달과 함께 향교 서당 서원의 건립 등으로 급증하는 종이의 수요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이미고려시대에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한지는 조선시대에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절정을 이루게 된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종이만드는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지장인’이라하고 수공업 공장을 ‘지장’이라하여 그 내용이 전한다. 이를 보면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닥나무가 생산되었으며 한지의 생산지역 역시 전국에 걸쳐 있었고 특히 각 공장에 소속된 지장인이 다른 수공업종에 비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제지업은 성황을 이루었다.
한지의 원료로 주로 사용되는 것은 뽕나무과에속하는 닥나무다. 닥나무는 옛날에는 저포라고 불리는 일종의 피륙을 짜는 데 사용되었고, 제지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닥나무를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드는 것이 본격화되어 태종때 에는 대호(大戶)는 200조, 중호는 100조, 소호는 50조식 재배하도록 강요하기도 하엿다. 나라에서는 당시 전국 각지에 지장을 배치해 한지의 분업화를 정책적으로 지원햇는데 전주와 남원 등지에 23명, 밀양에 17명, 광주 19명 등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 수를 봐서도 전주의 한지가 정책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엇을믈 잘 알수 있다.
전주 한지는 그 질의 우수성으로 양적인 생산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이는 전주를 중심으로 서화가 발달하게 되는 바탕이 된다. 또한 뛰어난 예술적 장인적 감각을 가진 호남인의 기질과 만나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부채나 생활 고예품들을 낳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는 간행사업은 서울의 경판본, 안성의 안성판본과 함게 전주에 국립 인쇄소를 두고 소위 ‘완판본(完板本)’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전주 한지의 우수성은 그 제조공정에서 절대적을 필요한 물과 따로 떼어 얘기할 수 없다. 닥나무의 공급과 함께 전주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고 전주천은 물이차고 맑아 질좋은 한지를 낳게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전통 한지가 누린 영화도 새로운 서구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한지 생산은 오히려 침체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난리로 인해 제지시설이 판손되고 지장들이 흩어지면서 제지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됐고 생산량도 뒷받침되지 못해 생산자체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관설 제지소로 출발한 조지서는 형식으로나마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고정 19년(1882)에 4백여년간의 세월을 마감하고 폐지되었다. 1884년 서양식 종이와 근대식 인쇄술이 도입됨에 따라 전통 한지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예부터 명서이 높았던 전주를 비롯한 전북일원의 한지도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해방 이전가지만해도 전주는 여전히 한지의 메카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해방 이후 산업화의 영향으로 한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제지공장이 페쇄되고 제지 기능인들도 구심점을 잃어 흩어져 그 맥이 끈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임실이나 완주·전주 등지에서 한지생산이 개인적으로 혹은 협동단지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한두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기계화 된 대량 생산공장을 운영되고 잇는 까닭에 전통 한지 제작의 명맥을 잇기엔 부족하다.
우리의 옛것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서예나 각종 한지공예에 뜻을 둔 전문인들이 늘어나면서 명맥만 유지하던 한지생산이 다시 한번 부활의 전기를 맞고 잇다. 지금은 원주, 전주, 남원, 가평, 괴산, 의령 등지에서 한지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91년 까지만 해도 전국 한지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던 전주 한지는 현재 한지협동화 단지를 비롯해 남원아영 부업단지 등 37개 업체가 조업중이지만 값싼 중국산의 수입과 닥나무 재배가 끊기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하지의 역사는 서화와 함게 문화적 생활양식의 바탕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져왔다. 서구 문명의 수용과 함게 잊어왔던 우리 고유 한자의 우수성과 멋은 다시금 우리의 생활과 어우러지는 기회를 맞고 잇는 것이다. 근대이후 잊어 온 한지의 우수성과 생명은 결국 현대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새로운 부활로 부각되어야 한다.
저널초점-전주한지
「송가종이」전통, 그용기있는 선택
전주의 마지막 지장 송우석씨
글/원도연 「문화저널」편집장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과학기술과 산업조직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근대화는 금세기들어 인간의 생활을 질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그 근대성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와 맞바꾼 크나큰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많은 것들은 단지 옛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리워지고 찾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것에 녹아잇는 선인들의 삶속에 어쩌면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가 우리 가슴 깊은곳에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전주는 물산이 풍부하고 산세가 원만하여 사람이 사는데 가장 좋은 조건을 두루 간진 땅으로 꼽혀왔다. 그리고 천혜의 자연속에서 전주의 예술은 곧 이 땅을 대표하는 문화와 예술이 되었다. 그 빛나는 문화가 있기까지는 질박한 땅의 임심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베어 있엇다. 특히 전주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수 없는 서화의 바탕에는 먹을 배척하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한 전주한지가 잇었다.
전주의 초지장 송우석씨(73·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1가 311). 그는 칠십평생을 한지와 함께 해온 얼마 남지않은 전주 전통한지의 명인이다. 그는 애써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내노라하는 한국의 화가들과 서예가들 사이에서 ‘宋家종이’의 명성으로 기억되고 있는 지장이다. 대부분의 쟁이들이 그러듯이 그 역시 운명적으로 한지와 만낫다. 전주 한지는 그 집안의 가업이었다. 그의 증조부 송승완은 고종때 제지소를 운영하면서 조선중엽 이후 사라졌던 「태지」를 재현해낸 솜씨좋은 지장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가업은 그의 조부(송길환)와 부친(송기헌)을 이어 그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셋째 아들 재훈씨까지 가업을 이어받아 한지 제작공정의 자동화와 기계화에 크게 한몫하면서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한때 젊은 나이에는 지장으로서의 운명을 거슬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단신 유학하여 중하교까지 마쳤으나 끝내는 지장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일본 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문물과 신식학문에 대한 커다란 깨우침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20대 초반의 나이에서부터 초지기술을 전수받은 그는 지금껏 한지와 함께 씨름해왔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지기술을 간직한데서 멈추지 않고 한지 생산의 공정을 기계화하고 새로운 한지개발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한달음에 달려가 자료를 모으고 다시 연구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적용시켰다. 그점이 그가 오늘에 와서 남다른 초지장으로 대접받는 까닭이고, 해방이후 쇠퇴일로를 걷던 한지를 여지것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의 증조부대에 개발되어 지금가지도 송씨 가문이 자랑하는 한지는 태지이다. 태란 빗물로 씻기우는 시내물이나 수돗물이 아닌, 끊임없이 생수가 솟는 우물이나 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이 자연스럽게 넘쳐 흐르는 곳에 달마다 생겨나는 이끼로 파랗게 물이 오른 이끼를 채취하여 지료와 혼합하여 만들어내는 것을 태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완주군 구이에 제지공장을 경영하면서 태지생산에 전념하여 생산량의 80%를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업으로 이어진 태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용 편지지로 쓰여지기도 했고, 송우석씨가 대만에 보낸 태지는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로부터 감사의 편지로 보답받기도 했다.
전주를 대표하는 한지의 명가답게 그의 증조부대부터 이어진 한자 연구는 송우석씨에게도 이어졌다. 해방후 물이 차고 맑은 곳을 찾아 현재 평화동 골짜기로 이사한 그는 그곳에 공장을 세우고 부친과 함게 한지생산에 몰두했다. 점차 한지명가의 지가가 알려지면서 1965년에는 전락북도 한지공업협동조합의 한지 초지공양성강습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그의 공장을 거쳐나간 4-50명의 지장들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융성했던 전주한지의 주역이 되었다.
오늘까지 ‘송가종이’의 명성을 이어주는 것은 송시가 특별하게 개발한 화선지로부터 유래했다. 초지공 강사로 활동한 이후 그는 특수지의 개발에 더욱 전념하면서 마침내 옛날부터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쓰던 화선지를 연구 개발하는데 성공햇고 1957년에는 발명특허를 받기도 했다. 한지에 실을 먹인 새로운 한지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일본 대만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연구와 상품개발에 힘을 써 76년 에는 갈대를 이용한 화선지를 새로 개발하여 비로서 ‘송가종이’의 영예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술사에 빛나는 작가들의 작품이 바로 그 ‘송가종이’로부터 시작되었고, 격조와 권위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전통 한지도 근대화의 물결을 거스르기에는 힘이 부쳤다. 더욱이 전국에서 최고로 꼽혔던 전주 한지는 급격히 쇠락해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화황을 누리던 태지생산은 점차 생산량이 줄어들어 지금은 거의 생산이 중단되채 명맥이 끊겨있다. 태지뿐만아니라 한지의 수요 자체가 줄었고 양지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특별한 수요계층을 갖게 되면서 한지는 급격히 몰락해나갔다. 한지에 대한 자부심으로 장인의 길을 걷던 많은 지장들이 한지를 버리고 각기 새로운 생업을 찾아가면서 이제 전통적인 지장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전통 서화가 여전히 각광받고 내노라하는 예술가로 대접받지만 그 예술을 지탱해주는 지장의 영예와 자부심은 끝간데 없이 무너져 갔다.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전통한지의 제작은 이제 진귀한 볼거리가 되었지만 송우석씨 같은 고집센 지장들은 여전히 그속에서도 온전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지난 73년 문화재과리국의 국가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 지정을 위한 조사대상자가 되기도 햇지만 여지껏 지방문화재로조차 지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까닭이다.
그가 운영해온 「송지방」은 이제 그저 운영해 나가는 것만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몇 년전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질 않지만 전통하지를 되살리는길은 묘연하기만 하다. 거기에 환경 폐수대문에라도 전통적인 수공으로 한지를 생산해낼 수가 없고, 85년부터는 값싼 중국산 한지가 밀려들면서 ‘송가종이’는 지금껏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때 지장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여 사진예술에 손대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지장이다. 지금도 「송지방」의 한켠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수공 기구들이 쌓여져 있고 틈틈이 수공한지를 재현해보기도 하지만 그의 손에서 비롯되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가볍고 질긴 한지를 다시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통한지를 재현하고 전수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넘어 국가의 정책적인 관심에 맡겨져 있다. 명성높은 전주한지를 앞으로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하면서 종이박물관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그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막다른 선택인지도 모른다.
전주한지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
전주한지공예대전
글/허옥철 「문화저널」기자
옛말에 ‘천의 수명은 오백년이요, 종이의 수명은 천년’이라 햇다. 우리나라 종인인 한지는 질기고 가볍고 수명이 길어 책을 만들 때나 그림은 그릴때는 물론 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널리 쓰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숯과 함께 한지를 매달아 잡균의 근접을 막고, 한지를 노끈처럼 꼬아서 망태기 바구니, 색한지를 오려 붙인 반짇고리 혼수함 삼층지창, 연 부채 탈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러한 종이를 이용한 고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성행했는데 한지의 역사와 더불어 한지공예 역시 줄잡아 1천 5백년이 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지는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은은할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정감이 있어 우리 민족성과 비교하곤 한다. 아울러 투박하지만 빛깔과 질감이 곱고, 한지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난다.
고려시대 대 전주와 남원은 한지 최고 생산지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뒷받침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지공예가 가장 성행했는데 이는 문서와 서책의 간행이 활발하여 종이의 생산량이 많아져 종이가 널리 보급된 시기와 일치한다. 실용성과 장식성이 뛰어난 전통 한지공예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전해져 올만큼 수명이 길고 튼튼하고 멋스러운 격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저렴하고 편리한 각종 생활 용품이 일반 가정에 까지 고루 보급되고 값싼양지에 밀려 한지의 생산량이 줄어듦에 따라 한지가 귀해지고 비싸 지면서 전주한지의 전통은 쇠퇴했다.
지난해 처음 마련돼, 사양길에 접어든 전주 한지의 활로를 찾고 한지의 고향 전주만의 고유한 특색을 살려냈다는 호평을 얻은 하지공예대전은 생활용품으로서의 질감과 아름다움, 다양성이 돋보이는 한지 작품의 전통을 되살려 낸 의의가 크다. 전국 공모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두 번째를 맞은 올해 한지고예대전은 특히 전통부문 뿐만 아닌 현대 부분까지 규모를 확대하여 생활용품이나 관광 자원화 할 수 잇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엇다. 종이의 전통이 깊은 전주의 문화를 조명, 이 지역만의 독창적인 문화상품으로 개발시켜 가기 위해 마련한 이 공모전은 근래 들어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를 더욱 활기 있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출품 부문은 지호 지승 전지를 비롯한 전통 부문과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생활 용품 및 관광 자원화 시킬 수 잇는 작품들인 현대 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살을 두텁게 하여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색한지와 문양을 붙여 완성하는 전지공예,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그것을 종이끈처럼 이어가면서 꼰 다음 옷감을 짜듯 엮어서 형태를 만든 지승공예, 종이를 물에 불린 후 풀을 섞어 찧은 것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색칠을 하거나 색지를 발라 완성하는 것이 지호공예이다.
올해 대상은 전통 부문에 김종원씨의 작품「6폭 머리맡 병풍」에 주어졌다. 상단은 다양한 서체의 백수백복을 소재로 조각도로 글자를 따서 붙이고 하단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우리 전통생을 살려 구성한 작품으로 전체적인 색상의 조화와 정성이 한결 돋보인 작품이었다. 현대 부문의 대상은 「한지를 이용한 장식커튼」을 출품한 이양숙, 김순옥 씨에게 주어졌다. 이 작품은 한지가 가지고 있는 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고 실용성과 장식성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한지를 이용한 포장용기, 팬시용품, 장신구등 상품화시킬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어 이제 시작한 신생 공모전임에도 한지공예 활성화와 한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한몫을 해 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창작 예술품이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고 있고 특히 생활용품과 관광 자원화 시킬 수 잇는 작품 개발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한지의 쓰임새가다양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지공예대전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40-50년전 까지만 해도 장이 열리면 색실상자 혼수함등 여러 가지 소품을 파는 것을 쉽게 볼수 있었으나, 플라스틱 스테인레스의 등장으로 점차 우리 생활에서 사라져갔다. 이처럼 한지공예가 계속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을 등한시한 우리의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요즘들어 한지공예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활발해 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한지공예대전은 그 대표적인 작업으로, 전주의 한지를 특산화 하고 그것을 상품화시키는 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가 크다. 여러 가지 지역문화 유산의 상품화와 함께 한지축제 역시 독창적인 문화축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 축제가 일회용 행사에 그치지 않고 생산과 상품화의 연계 작업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